2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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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168A번지의 현관문을 바라보며 리암 블레어는 한숨을 쉬었다.
- 그대가 처리하게. 어차피 그대 가문의 재산 아닌가?
‘처리하라고 해봤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란 소리겠지만.’
고대 마법사가 맨덜랜드에 왔다. 워낙 두문불출인 남자라 다른 귀족들처럼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내기 쉬운 자가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맨덜랜드에 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낌새를 눈치챈 거지? 그보다 라크시스 옌은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가.’
발자크 로스, 그러니까 어둠의 사도 카얄은 고대 마법사를 싫어했다. 싫어한다기보다 혐오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다리 위를 기어오르는 것을 본 것처럼.
라크시스 옌이라면 오히려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인 사람이었다.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진 자 중에 여태 중립으로 남아있는 자도 몇 안 되었다.
그래서 처음 발자크 로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라크시스 옌을 세뇌시켜 제 편으로 끌어들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자크 로스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내게 라크시스 옌은 네게 검둥이 같은 존재야. 주인이 어떻게 노예를 회유할 수 있겠나?’
차갑기 그지없던 빈정거림을 듣는 순간, 리암은 발자크 로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피부 검은 남대륙인들은 말도, 숨 쉬는 공기도 섞기도 싫은 가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요즘 들어 검둥이들이 거리에서 많이 보였다. 가멜이 제국령이 된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으니, 그들과 그들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 본토에 거주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굴뚝 닦이처럼 새카만 피부를 지닌 자들이 제국인들 사이에 섞여 회계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심지어 귀족가의 자제가 되어 사교계를 활보하는 꼴을 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하필 뮐러의 딸이 검둥이인 건지.’
프레디 뮐러의 딸. 리암 블레어의 약혼녀. 레베카 뮐러.
병약한 숙녀라 사교계 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고 요양한단 말을 듣는 순간부터 사생아이리라곤 진작 짐작했다.
하지만 사생아래도 프레디 뮐러의 유일한 자식이라 생각하면 결혼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프레디 뮐러의 딸은 제게 뮐러가의 막대한 재산을 모두 가져다줄 것이었으며, 밀레이나 로드리치라는 든든한 지지자도 선물할 예정이었으니까.
못생겨도 괜찮았고 아이를 낳지 못해도 괜찮았다. 도리어 병에 걸려 일찍 죽어버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만큼 뮐러가의 재산은 빠르게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그래서 줄곧 공을 들여왔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연서를 보내며 값진 선물을 보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순간 레베카 뮐러가 제게 빠져 곧바로 결혼하자고 달려들도록 물밑 작업을 해둔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 뮐러의 정체가 밝혀지고 난 후 리암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레베카 뮐러가 로드리치가의 메이드 헬렌이었다니. 그것도 더러운 가멜인의 피가 섞인 검둥이였다니.
형식적으로나마 이뤄질 결혼식에서 그 여자가 제 곁에 서 있는 꼴을 상상하는 게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말 병신, 다리 병신이어도 괜찮았고,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상관없었는데 왜 하필 검둥이냐고.
곁에 선 마부가 주인의 심기가 영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리암은 괜히 그를 노려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때 싱그럽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리암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총리 각하. 생각보다 빠르게 오셨네요?”
붉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쥐며 나타난 여인은 어지간한 남자들이 한 번쯤은 뒤돌아볼 정도의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정숙 따윈 내다 버린 사람처럼 어깨와 가슴을 한껏 드러내고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풍만한 가슴이 금방이라도 앞섶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여자는 그것이 제 매력이라는 것을 익히 아는 듯 리암에게 다가가 물컹한 가슴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리암은 미동도 없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천박하긴. 그 살덩이 좀 가리게.”
“흐응,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각하뿐이실 거예요. 그러니 아직까지 결혼을 못 하셨지.”
여자가 아랑곳 않고 리암을 도발하며 뒤로 물러섰다. 더는 달라붙지 않는 것이, 리암 블레어의 싸늘한 언사가 익숙한 듯했다.
헐레벌떡 뒤따라온 부인이 재빨리 어두운색의 숄과 망토를 여자에게 겹겹이 둘러 상체를 가렸다.
리암은 반쯤 열린 현관 앞, 응접실로 향하는 길목마다 축 늘어져 있는 남자들을 흘긋거리곤 오물이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썼다.
“그대처럼 문란한 것보단 낫지. …하아. 조만간 이 집을 불태워 버려야겠군.”
“어머, 각하의 조부님께서 이 집을 얼마나 애정하셨는데요. 각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다 각하의 조부님 덕분이랍니다.”
“내 재산은 아니지. 단 한 번도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없는 것이었으니.”
여자는 리암의 가슴팍을 찰싹 때리며 깔깔거렸다. 리암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챙길 건 다 챙겼나?”
“챙길 게 필요할까요? 가져가봤자 라크시스 옌에게 들킬 뿐인데.”
“칠칠치 못하니 들킨 거겠지. 로드 켈튼과 고대 마법사가 맨덜랜드에 올 일이 무어 있다고.”
“아마 그 망할 놈의 기자 때문이겠지요.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 재수 없게 이름도 똑같아선.”
리암이 빈정거렸다.
“아, 그대의 전남편? 데이먼 포드 말이지.”
그러자 내내 야살스럽게 웃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돌연 험악해졌다. 또 다른 인격이 튀어나온 것처럼 순식간에 바뀐 낯에 대고 리암은 여자를 도발하는 언사를 이었다.
“이혼당한 남편이 쫓아오기라도 하는 모양이군. 하긴 내가 데이먼 포드라도 그대 같은 아내는 지옥에 내던지고 싶을 거야.”
“제 앞에서 다시 한번 그놈의 이름을 꺼내셨다간 각하를 미라로 만들어 남은 평생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어요.”
“이 나라의 총리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분노를 참지 못한 여자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본인이 매우 화났음을 몸소 표현하는 중이었다.
리암은 여자의 붉은 기운에 닿은 제 코트의 밑자락이 좀먹은 것처럼 갉아져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생긴 건 저래도 역시 카얄의 측근이긴 한가 보지.
확실히 이 여자는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자유자재로 뿜어져 나오는 저 저주에 잿더미처럼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리암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여자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리암은 몇 번 입지도 못한 새 코트를 벌써 못 쓰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조용히 혀를 찼다.
리암이 더는 도발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여자도 저주를 거두었다. 부인과 마부는 겁에 질려 창백해진 지 오래였다.
여자는 부인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걸 흘긋거리곤,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다시금 미소를 입가에 덧그리며 긴 장갑을 낀 오른손을 리암에게 척 내밀었다.
“제 손 안 잡고 뭐 하세요? 숙녀의 손을 이렇게 무안하게 만드는 신사가 어디 있나요?”
“실례했군. 아무리 봐도 내 앞에 숙녀는 없어서 말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암은 살기를 느꼈다. 목덜미에 칼이 들어와 예리한 생채기를 내며 턱 밑까지 달라붙은 기분이다.
저 천박한 여자의 역린을 건드렸다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면서도 통쾌했다.
카얄이 아니었다면 상종도 안 했을, 아니, 애초에 제국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여자다. 밑바닥을 기는 건 검둥이나 저 여자나 다를 바 없는데, 이 여자만큼은 적당히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사실은 리암을 줄곧 피곤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입 조심해. 리암 블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아르카나의 창부.”
여자는 리암을 죽일 듯이 쏘아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부인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움켜쥐고 겨우 일어선 상태였다. 그녀가 멀쩡히 서 있는 걸 확인한 여자는 마차로 걸어가며 부인에게 명령했다.
“달리아. 내가 떠나자마자 계획을 실행해.”
“…정말로 다 죽이실 겁니까?”
부인은 머뭇거렸다. 자신은 눈앞의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지만, 간혹가다 지금처럼 급진적인 명령을 받을 경우 이를 그대로 따라도 되는 건지 늘 고민했었다.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처럼 쏘아붙이며, 명령을 따르라고 말했다.
“못 들었어? 계획대로 하라고.”
여자는 제 손이 진저리난다는 듯 쥐고 있던 리암을 뿌리치곤 되돌아와 부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도 포함이야. 달리아.”
“…예.”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대답을 들은 여자가 다시금 몸을 홱 돌려 리암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품위라곤 하나도 없는 몸짓으로 마차에 올라타선, 창밖으로 고개를 쭉 빼 밀곤 뒤늦게 생각난 명령을 툭 내뱉었다.
“아, 데이먼 포드를 발견하면 산 채로 내게 데려와. 직접 가죽을 벗겨 버릴 거니까.”
날더러 죽으라면서 데이먼 포드는 어떻게 대령하란 말인가.
달리아는 속으로 토를 달면서도 겉으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데이먼 포드라면 이를 가는 여자는 저렇게, 입버릇처럼 잔인한 말을 내뱉어 왔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것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진 리암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수도 모르간으로 향하고 있다.
우중충한 항구도시도 이젠 더 이상 볼일이 없다. 맨덜랜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는 충분히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탁―
문이 닫히고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검은 마차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웨스트스트릿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달리아의 몫이었다. 몇 년 후에나 이루어지리라 여겼던 계획을 앞당겨 실행하고, 잡다한 뒤처리를 마무리한 후 맨덜랜드에서 황혼 국교회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는 것.
성급한 계획 실행은 언제나 의문을 낳고 실수를 낳는다. 하지만 자신은 방금 떠나 버린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존재였다.
어느 정도 멀어져서 이젠 까만 점처럼 보이는 마차의 꽁무니를 보고 있자니… 저 여자가 더 이상 맨덜랜드에 오지 않겠구나, 이젠 진짜 자신만이 이곳에 남은 거구나, 하는 쓸데없는 불충심이 가슴 속에서 벌레처럼 비집고 나타났다.
달리아는 제 뺨을 때렸다. 명령은 따른다, 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면서.
달리아는 유령처럼 168A번지로 도로 들어갔다.
그렇게 수 분이 흘렀다. 마차가 떠난 자리, 달리아가 매몰차게 닫고 사라진 현관 앞으로 충격받은 얼굴의 두 사람이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바로 골목에 숨어 지금껏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시아와 라크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