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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4)화 (224/292)
  • 224화 

    시아가 화제를 돌리자마자 라크시스는 반색했다. 그도 자신의 비이성적인 판단들을 불편해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는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를 돌릴 자잘한 대화거리가 때마침 주어진 셈이었다.

    “파장 감지기 자체엔 큰 이상은 없었고, 봉인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오래 걸릴 거라고 전해 오긴 했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볼래요?”

    라크시스는 코트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전화선이 없는 수화기를 꺼냈다. 황동 빛 몸체에 손잡이 부근엔 숫자 버튼이 달려 있는 것이 전화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딱 한 가지, 전화선만 없었다.

    송수신기가 필요 없다니. 봐도 봐도 신기한 모습이다.

    “그 후에 연락 온 건 따로 없네요.”

    그 말에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락이 왔었는지도 알 수 있는 거예요?”

    “신호가 축적되면 불빛이 들어오거든요. 어디에서 연락이 왔는진 알 수 없지만요.”

    어쨌거나 저 수화기만 있다면 연락을 자유자재로 받을 수 있단 소리 아닌가. 굳이 전화부스나 전화기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말이다.

    시아는 간만에 진심으로 부러운 눈길로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마도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칠십 년 후에도 그런 수화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겠네요.”

    “많진 않겠지만요. 마법사이거나, 마정석을 주기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죠.”

    라크시스는 수화기를 잠시 띄워놓곤, 허공에 나타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종이가 나타나 공중에 빳빳하게 떠올라 있었다.

    라크시스는 마치 책상 위에서 글씨를 쓰는 것처럼 편하게 펜을 놀리더니, 메모를 적은 쪽지를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일단 우리가 알아낸 정보를 간략하게 전해 둘게요.”

    라크시스는 손가락을 움직여 펜도 사라지게 했다. 시아는 펜과 쪽지가 사라지며 남긴 파란 불빛과 연기를 바라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편리하네요.”

    “중앙 우편국의 시스템을 흉내 내는 거죠.”

    중앙 우편국이라.

    첫 번째 시간 여행에서 라크시스를 따라 가보았던 아르카나 중앙 우편국은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미래에는 없는 시스템들이 제국 전역의 교류를 매우 신속하게 이뤄내고 있었으니까.

    마력은 전기와 갈리프콜만으로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하고도 초월적인 힘이었다.

    마도 시대와 칠십 년 후를 비교해 보자면, 오히려 칠십 년 후가 쇠퇴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력이 사라진 빈자리를 대부분 사람이 채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아는 황궁에 전화를 걸던 미래의 양부를 떠올렸다. 교환원이 없으면 전화가 걸리지 않았었지.

    “중앙 우편국이라면… 마력 신호 일련번호나, 그런 것들 말이에요?”

    “사실 고유 마력을 추적하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도 저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라크시스는 탐탁지 않은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걸 이용해서 중앙 우편국을 개편할 생각을 했던 건 대공이었죠. 차탈 말입니다.”

    뜻밖의 이름에 시아는 놀랐다. 과거 철도 개발 사업을 도맡아 지하에 선로를 만든 사람도 차탈이었는데.

    후에 17대 황제로 기록되는 차탈의 업적은 알리나 못지않게 여럿 있었지만, 중앙 우편국에 마력 추적 시스템을 접목시킨 것까지 그가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각도 못 했어요. 미래엔 그런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요.”

    “종말 이후엔 마력이 모조리 고갈되었다고 했죠. 기차는 마정석 대신 갈리프콜을 사용해서 전과 비슷하게 이용했겠지만, 마력 추적 시스템은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요.”

    쓸모없어진 기술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그 말인즉, 종말을 거치며 살아남은 차탈의 업적이 생각보다 더 위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시아는 차탈이 그가 태어나 자란 나라 하나만큼은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제국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짐작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능력과 야망은 별개죠. 사실 저도 대공이 이 정도로 망가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온 집배원이 168A번지의 문을 두드렸다.

    이젠 얼굴을 아예 외울 지경인 부인이 벌컥 문을 열었다. 서른 후반은 되어 보이는, 저택의 안주인을 도와 집 관리를 돕는 하녀장처럼 보이는 부인이었다.

    몇 없는 주름에 비해 희끗희끗한 머리가 많아 부인은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찌들대로 찌들어 거뭇한 눈가와 움푹 팬 뺨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오늘만 해도 저 부인이 문을 얼마나 많이 여닫았던가. 벨보이도 저 정도로 손님맞이를 하지 않을 터였다.

    수화기를 도로 집어넣던 라크시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리곤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꺼낸 건 두툼한 서류철이었다. 라크시스는 종이 더미 속에 고이 끼어있는 사진을 꺼내 들곤 눈살을 찌푸렸다.

    라크시스는 저 멀리의 부인과 사진을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미미하게 인상을 쓰더니, 시아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시아. 현관이 열릴 때마다 마중 나오는 부인을 잘 살펴봐요.”

    “하도 얼굴을 봐서 이젠 이웃처럼 느껴질 정도이긴 한데, 누군지는 모르겠는걸요.”

    시아는 그새 심드렁해져서 기지개를 켰다. 역시 잠복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의술사가 천직인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건 제 기우입니다만… 이 사진 속의 여인이 나이가 든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시아는 라크시스가 내민 사진을 받아 들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활짝 웃는 소녀와 소년이 있었다.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족히 몇십 분이 걸렸다던 흑백 사진의 시대에 이렇게 한참을 웃는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매로 보일 정도로 소년과 소녀는 닮아있었다. 어지간히 사이가 좋았나 보네. 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인과 사진 속 소녀를 비교했다.

    확실히 닮은 구석이 많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하며 우묵한 눈그늘에 결정적으로 눈 밑의 점까지.

    “나이 들면 저 부인과 똑같아질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래서 이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누군데요?”

    라크시스는 말없이 사진을 뒤집었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뒤쪽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거스 & 달리아 벤슨]

    시아는 경악하며 사진을 툭 떨어트렸다.

    “저 부인이 달리아 벤슨이라고요?”

    * * *

    “어떻게, 그게… 벤슨 경감님은 여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했잖아요!”

    시아가 화들짝 새된 소리로 외치자, 라크시스는 고개를 수그리며 속삭였다.

    “쉿, 다 듣겠어요.”

    실제로도 공원을 산책하고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시아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사진은 어떻게 구한 건데요?”

    “벤슨 경감이 본인이 지금껏 조사해 온 자료를 주면서 함께 줬던 사진이에요.”

    라크시스는 속삭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여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찾아다니지도 않았겠죠.”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죠. 사고로 가족을 잃은 환자들이 많이들 그래요. 머리로는 가족이 죽은 걸 알면서도, 확실한 증거를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요.”

    전 벤슨 경감님도 그런 줄 알았죠.

    시아는 웅얼웅얼 덧붙였다. 아무리 제가 그렇게 주장해 봤자, 누가 봐도 달리아 벤슨처럼 보이는 여자가 살아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녀가 달리아 벤슨인지는 다시 확인해 봐야 하지만, 어쨌든 뜻밖의 사건에 시아의 사고가 명료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간질거리던 미련이 자취를 감추며,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어느새 서류철을 도로 품에 넣곤 일어나 있었다. 시아는 그를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공원의 벤치보다 168A번지에 더 가까운 곳, 바로 옆 건물 틈새의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상황이 수사를 돕고 있군요.”

    결국 단둘이 오붓하게 남은 시간을 보내느니 하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라크시스의 투정에 시아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시간 여행은 두 사람이 마냥 즐겁게 연애를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평범한 손님인 척 문을 두드리고, 저 부인의 머릿속만 재빨리 읽어보죠. 그녀가 진짜 달리아 벤슨인지만 확인하고 다시 한번 계획을 세워봐야겠어요.”

    라크시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과 시아의 차림을 살폈다. 다행히도 지금껏 168A번지에 드나들던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이대로 이단인 척 달리아 벤슨을 닮은 부인을 만나고 돌아온다. 그렇게 합의를 본 라크시스와 시아가 골목의 그늘에서 벗어나 밝은 길가로 나오려 했을 때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웨스트스트릿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며 시야를 가로막았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재빨리 도로 뒷걸음질을 쳐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깊이 숨겼다.

    검은 마차였다. 장식 없이 검고 매끄러운 외관은 위험한 인물이라도 실어 온 것처럼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설마 168A번지의 손님일까?

    지금까지 168A번지를 찾아온 손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에 잠시 다른 집의 손님인가 하며 의문을 갖던 찰나, 마부가 내려 현관문을 두드리며 시아의 의문을 일축시켰다.

    “안에 누가 탔길래 이렇게 요란하게 나타난 걸까요?”

    “지켜봐야 알겠는걸요. 일단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두죠. 못해도 황혼 국교회의 간부 정도 되는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윽고 달리아 벤슨을 닮은 부인이 나타났다. 마차의 존재를 확인한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살짝 열린 현관 틈새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부인의 소리와 섞여 흘러나왔다. 공원에 있을 때 유리창으로 봤던 여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부인이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마부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계단을 받치자 병적으로 광을 낸 구두와 함께 짙은 목재로 만든 지팡이가 그 위를 또각또각 밟으며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자가 나타났다.

    군더더기 없이 검은 프록코트에 새카만 실크햇. 회의에 찌들어 턱밑까지 내려온 눈 그늘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안광.

    라크시스는 그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도 시대의 인사들을 알 리 없는 시아는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시아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만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라크, 왜 그래요?”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가 본데?

    시아는 괜히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라크시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을 토해냈다.

    “…저자가 바로 리암 블레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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