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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3)화 (223/292)
  • 223화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발치에 나뭇잎이 빙그르르 돌다 사라졌다. 시아의 머리카락을 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모자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툭 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모자를 줍지 않았다.

    와인을 닮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쏟아져 내렸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동그란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도 당신에게 친애의 뜻을 보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끓어오르던 푸른 눈동자가 어느새 심연에 잠겨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라크시스의 시선을 마주한 시아는 그것이 방금 전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고 뜨거운 것임을 알아차렸다. 불꽃이 뜨거울수록 파란색을 띠듯, 그의 시선도 뜨거울수록 짙은 파란색을 띠었다.

    시아는 눈꺼풀을 움직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를 떠볼 땐 언제고, 고개를 끄덕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잠복이고 뭐고, 이대로 어디론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잡아먹혀 버릴 것만 같았다.

    라크시스 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시아는 눈을 감았다. 콧날을 따라 내려오던 숨결이 자신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에게서 나는 청량한 체취가 숨결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라크시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코끝이 살짝 스쳤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입술에도 솜털이 자란다면 두 사람의 솜털은 이미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시아는 떨고 있었다. 어찌나 숨을 몰아쉬었는지 폐가 바싹 말라 가루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긴장한 걸 들키기 싫어 속으로 숨을 삼켰다. 오금이 저렸다.

    제 얼굴을 붙든 커다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닿는다. 이젠 진짜 닿는다. 진짜 닿아버리는 거야.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촉.

    불덩이 같은 낙인은 입술이 아닌 이마에 내려앉았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결과에 당황한 시아는 살며시 실눈을 떴다. 그러자 단정하게 묶인 크라바트 위로 침음을 삼키어 울렁거리는 남자의 목울대가 보였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입술에선 여전히 열기가 느껴졌다. 마침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게 되자, 그제야 라크시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남자는 지독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빠듯한 감정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한줄기 신사의 이성이 그의 몸을 붙들어 겨우 멈췄다.

    그는 시아 켈튼을 바라고 있었다.

    라크시스 옌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당황했던 것도 잠시, 시아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제 얼굴을 잡았던 것처럼 두 손을 들어 라크시스의 얼굴을 오목하게 담았다.

    “…라크는 참는 데 자신이 없어 보이는걸요.”

    “사실 참고 싶진 않습니다만.”

    라크시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초라해 보이고 싶지도 않거든요. 당신에게만큼은.”

    중요한 내용은 한참 생략된 대답이었으나 시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두 알아들었다.

    고백. 이 시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애라 불리는 것.

    다른 곳에서만큼은 행동력이 좋은데, 이상하게 라크시스는 항상 이 부분에서 머뭇거렸다.

    라크시스라면 거적때기를 입고 흙바닥에서 고백한대도 상관없는데. 고백 같은 건 자신이 먼저 해도 상관없을 텐데.

    하지만 시아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마도 시대의 신사였으니까.

    그의 자존심이라면 숙녀가 먼저 구애하게 둔 걸 평생 동안 마음속의 짐으로 둘 터였다. 구애란 자고로 신사의 역할이었고, 라크시스 옌은 언제나 모든 방면에서 압도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아는 자신이 라크시스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시아 켈튼을 놓칠까 스프링클러에 흠뻑 젖은 채 제게 무릎 꿇었던 헬릭스의 고백은 거절했으면서, 라크시스 옌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구애하도록 하염없이 기다려주다니.

    알고 지낸 기간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속절없이 빠져들게 됐을까. 첫사랑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라크시스의 끊임없는 표현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버린 걸까. 갈리프에 대한 자격지심을 극복했기 때문인 걸까.

    뭐가 됐든 그런 건 이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젠 그녀도 그도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백 같은 건 형식에 불과했다. 형식이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니까…….

    시아는 라크시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풍경처럼 맑게 웃었다.

    “초라하다는 말 만큼 라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는걸요.”

    “시아 켈튼. 당신은 정말이지…….”

    “전 라크가 여기서 이대로 고백한대도 받을 수 있는걸요.”

    무어라 말하려던 라크시스가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렸다. 시아의 손이 엉겁결에 떨어져 나갔다.

    눈물을 참는 사람처럼 하늘을 봤다가 깊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눈앞에 쏟아진 은발이 그의 숨을 따라 조용히 오르내렸다.

    다시금 고개를 든 라크시스의 얼굴은 저를 유혹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말을 하기로 결심한 겁니까.”

    “글쎄요. 어젯밤부터?”

    “안 되겠어요. 이거라도 다시 쓰고 있어요.”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냅다 안경을 도로 씌웠다.

    그러고 보니 안경을 처음 씌워주면서는 이런 말을 했었지.

    ‘사실 당신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숨기고 싶었던 거라면. 그 말은 믿어줄 건가요?’

    시아는 키득거리면서 삐뚤게 꽂힌 안경을 고쳐 썼다. 도수 없는 안경알 너머로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입술을 앙다문 남자가 보였다.

    시아는 일부러 안경을 콧방울 부근까지 슥 내리고 눈을 깜빡였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요? 어차피 여기서 절 보는 사람은 라크밖에 없는데.”

    “…이리 와요. 머리 다시 해줄게요.”

    결국 라크시스가 졌다. 고고하고 오만하여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남자가 처음으로 진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도 라크시스는 능숙하게 시아의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모자를 씌워주었다.

    시아는 그에게 온전히 머리를 내맡겼다.

    예전 같았으면 갈리프의 머리를 만져주던 실력일까, 하며 불안해했을 텐데. 이젠 그의 손재주가 좋아 이런 것까지 잘하는구나 싶었다.

    얼마 전, 황궁에서의 티 파티가 끝나면 연락하라며 라크시스가 건넸던 신호기가 생각났다. 값비싼 오르골처럼 황동 새 장식을 위에 매단 성냥갑만 한 크기의 섬세한 태엽 장치였다.

    거친 곳 하나 없는 매끄러운 이음새와 진짜 새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황동 새의 눈엔 라크시스의 눈동자를 닮은 파란 사파이어가 장식되어 있었다.

    라크시스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 보석. 시아는 그가 왜 하필 많고 많은 보석 중 사파이어를 골라 새를 장식했는지 깨달았다.

    요르문이 만든 투박한 마도구와 달리 라크시스가 만든 신호기는 제작자를 닮아 고아한 느낌이 났었다.

    결국 그 신호기를 쓸 일은 없었지. 신호기는 지금도 제 가방 속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걸 만드느라 공구를 붙들고 일일이 쇳조각을 맞췄을 라크시스를 생각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어디 불편한가요?”

    “아뇨. 못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싶어서요.”

    맥락 없는 웃음과 맥락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되묻지 않았다. 대신 오뚝한 콧대를 자랑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전 원래 다 잘합니다. 안 하는 것뿐이지.”

    정말이지 라크시스다운 대답이었다.

    영겁 같던 시간이 마침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고작 몇 분 정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서로의 뺨을 어루만졌던 것이 전부였는데.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웨스트스트릿의 168A번지는 여전히 조용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다시금 나란히 앉아 관찰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건 생각보다 수상한 사실들이었다.

    168A번지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평범한, 예컨대 심부름꾼이라든가 굴뚝 닦이라든가 하는 사람이었으나…….

    ‘굴뚝이란 건 아침, 저녁으로 매일같이 청소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대낮부터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들이 집을 드나들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던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그 후에도 변호사나 회계사 혹은 보험사정관처럼 보이는 자들이 168A번지의 문을 두드렸다.

    잠깐 보고 말았다면 수상한 줄 몰랐을 텐데. 두 사람이 발견한 것들은 한자리에서 쭉 지켜보고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창문으로 언뜻 보이던 그림자가 168A번지의 실제 주인일 겁니다.”

    라크시스는 일 층 유리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지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언뜻 보이는 실루엣을 보아하니 드레스 차림의 화려한 여자였다.

    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잠복할 거예요?”

    “얼추 저 집 안의 인원을 셈했으니 큰 무리 없이 진입할 순 있겠습니다만. 힘으로 저들을 제압하고 나면 카얄에게 우리가 맨덜랜드에 왔다는 소식이 들어가겠죠.”

    라크시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고민 중입니다. 감수하고 들어갈 것인지 며칠이 걸리더라도 신분을 위장해 잠입할 것인지 말예요.”

    시아는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번 시간 여행에서 시아에게 남은 시간이 사흘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을 터다.

    그조차 일기장과 다르게 흘러가 최근에는 멋대로 원래 시대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해, 어쩌면 남은 사흘도 채 지내지 못하고 시간 여행을 해버릴 수도 있었다.

    “당신이 돌아가도 봉인은 계속 찾을 겁니다. 유령선 사건이든 봉인이든 처음부터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봉인의 상태도 아직까진 괜찮을 테고, 카얄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요.”

    라크시스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는 잠복과 관찰을 핑계 삼아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벌고 있었다. 맞닿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얽매인 손이 마치 라크시스가 시아를 원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 같았다.

    시아는 처음으로 시간 여행의 목적을 망각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봉인을 찾는 것도 좋지. 급한 건 남은 봉인을 카얄 보다 먼저 손에 넣는 일이기는 한데… 남은 시간 동안 정신없이 봉인만을 찾아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옛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하지만 라크시스 옌을 시간 여행의 파트너로 둔다면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아는 저릿해진 심장을 꾹꾹 누르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나저나 요르문 쪽은 별일 없대요? 파장 감지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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