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2)화 (222/292)

222화 

마약 거래 조직의 상부를 찾아내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에게 대령하겠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시아는 그보다 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는 경악하며 라크시스의 손에 들린 기계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 최소 백 삼십 년은 더 된 마도구란 뜻이네요. 이걸 어디서…….”

“맨덜랜드에 도착해서 요르문과 같이 파장 감지기를 설치하러 다녔죠. 당신 동생이 워낙 깐깐하게 굴어서 장단을 맞춰주느라 애를 좀 먹었습니다만.”

라크시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어제 낮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론상으론 이렇게 촘촘하게 파장 감지기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 라크시스와 달리 요르문은 혹시 모르니 가져온 파장 감지기는 모조리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그 깐깐함 덕분에 이걸 발견했어요. 어느 한적한 거리를 지나갈 때쯤에 이 기계가 제 발치에 와서 달라붙더군요.”

시청 정문을 따라 쭉 뻗은 대로를 걸으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그늘진 곳에 파장 감지기를 붙이던 도중, 길고양이가 다리에 달라붙듯 라크시스의 구두 코끝에 녹슨 태엽 기계가 톡톡 다가왔다.

처음엔 라크시스도 발끝에 다가와 붙은 기계의 정체를 몰랐다. 잠시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라크시스가 기계를 주워 들자, 기름칠이 전혀 안 된 태엽의 소리를 내며 녹슨 발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그때, 라크시스는 오래전, 중세로의 시간 여행을 불현듯 기억해 냈다.

“제 마력을 감지하고 다시 작동된 겁니다. 애초에 이건 사용자의 마력과 반응하는 위치 추적기였으니까요.”

다무스에서의 시간 여행이 무사히 끝난 탓에 아예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주인을 찾아 돌아온 자그마한 기계는 라크시스로 하여금 그가 방문한 도시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라크시스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맨덜랜드의 기묘함을 알아차렸다.

하얗던 햇살이 회색 구름에 가려지고, 쨍하니 빛나던 건물들이 우중충한 그늘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그 풍경을 눈에 담던 라크시스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첨탑과 함께 교회의 지붕에 붙어있는 성녀상은 기묘한 무늬가 찍힌 옷을 입고 있었다. 밟고 선 자리에서 발을 치우자, 기울어진 태양과 달의 모양으로 주조된 맨홀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장 감지기를 설치했던 뒷골목으로 달려가 보니 오래되어 거의 지워진, 태양과 달 그림의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저 봉인이 숨어있을 것으로 추측했던 도시가 한순간에 다르게 보였다.

라크시스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재키 레이븐에겐 붉은 옷을 입은 레이디 켈튼의 환각을 보여주었고요.”

시아는 그제야 깨달음의 탄식을 토해냈다.

어디에서 봤나 했더니, 헨리 던로의 집에 숨어들던 날 사용했던 기계였구나.

그러고 보니 붉은 드레스의 오토마톤을 시아 켈튼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마도구와 생김새가 똑같았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서 딱정벌레 모양의 마도구를 받아 들었다.

이게 여기서 발견되었다는 건 백삼십 년 전의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가 샤샤리아 상인을 풀어줬다는 뜻이고, 도망친 마약상이 맨덜랜드로 향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때의 마약상도 이단의 신자였잖아. 존 베버가 가지고 있던 성녀상과 똑같은 성녀상을 목에 걸곤 가짜 사제 행세를 하면서.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알싸하다.

바람이 거리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방금 전까진 보이지 않았던 맨덜랜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낯이라 꺼져 있는 가로등 조명 밑의, 장식처럼 달린 철제 구조물. 주택가를 따라 낮게 설치된 울타리마다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모양.

신경 써서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아챌 수 없는 상징들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이곳은 그저 유령선의 도시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부터 황혼 국교회가 장악하고 있었던, 이단의 도시였다.

시아는 더듬거릴 뻔한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거리에 황혼 국교회의 본거지가 있었을 수도 있단 소리네요. …설마, 펍이에요?”

“이단의 거점은 어젯밤의 펍뿐 아니라 맨덜랜드 곳곳에 있을 겁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크시스는 들고 있던 낡은 태엽 기계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제가 이걸 발견한 거리가 바로 웨스트스트릿이었죠.”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

“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라고 적혀 있던 장소죠.”

침묵이 오갔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길을 막고선 대체 뭐하냐는 눈으로 핀잔을 주었으나 두 사람은 비켜설 겨를도 없었다.

시아의 눈동자에서 묘한 탈력감이 비쳤다. 그들이 방금 전 하고 온 일이 다름 아닌 맨덜랜드의 경찰도 이단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권력이 힘을 잃었으니, 사실상 맨덜랜드에선 이단에 저항할 수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노예 무역선이 항구를 드나들어도 유령선 따위의 괴담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수백 년 전에 국교회를 사칭한 이단이 다무스에 마약을 팔아대던 걸 아무도 막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일 터다.

시아는 한순간에 풀이 죽어버렸다. 라크시스는 그런 시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맨덜랜드는 오래전부터 황혼 국교회에 점령된 도시였어요. 그들이 자금을 모으고 세탁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던 거죠.”

* * *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는 맨덜랜드 경찰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집처럼 생겼는데요?”

웨스트스트릿은 맨덜랜드 내에서 고급 주택가가 위치한 거리였다. 바닷가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나란히 펼쳐진 수십 채의 케르디안 하우스는 귀족들의 별장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를 지켜보기 좋은, 맞은편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회사 간판이야 당연히 없겠지마는, 그렇다고 상업적인 용도로 쓰일 만큼 규모가 큰 건물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고요.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웨스트스트릿에 들어서며, 두 사람은 냅다 168A번지에 쳐들어 갈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상대의 동태를 파악한 후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안에 누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냅다 남의 사유지에 들어갔다가 들키면 도리어 이쪽이 범법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아와 라크시스는 졸지에 잠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68A번지에 도착한 지 어느덧 한 시간 째. 실직한 회계사처럼 공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시아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누가 보면 진짜로 평범한 가정집인 줄 알겠어요. 지금껏 드나든 사람들이 전부 심부름 다녀온 하녀나 저녁거리를 가져온 푸줏간 직원 같은 사람이 전부잖아요.”

보통의 경우보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 뿐이지, 이상한 점은 없었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움직이려 했는데, 이래선 계획 실패였다.

168A번지는 정말로 평범한 주택처럼 보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 쳐다보면 굴뚝 닦이가 서 있다든가, 자전거 가득 생선을 실은 상인이 있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이젠 아까부터 계속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부인의 얼굴을 외울 지경이었다.

잠복 수사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범인을 잡기 위해 사흘 밤낮을 내리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시아는 문득 추리 소설에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한 자리에 머물던 사설탐정들을 떠올리곤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 로렌 허슬러가 된 것 같네요.”

“그럼 전 로렌 허슬러의 연인인 라크시스 옌이겠군요.”

평소처럼 농담 반 진담 반, 사심을 담아 라크시스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소설가 어셔의 연작에 등장하는 로렌 허슬러가 누구를 모티브로 삼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법한 농담이었다.

라크시스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시아는 언제나 할 말을 잃곤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한 라크시스는 지루한 잠복 수사 중의 행복이요, 부끄러워할 시아를 기대하며 벤치 옆자리에 앉은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시아는 표정에 한점 변화도 없이, 살짝 꼰 다리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곤, 시선은 168A번지에 고정한 채 무심하리만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겠네요. 로렌 허슬러의 연인, 라크시스 옌.”

그러곤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버린 라크시스를 돌아보더니 능청스럽고도 얄궂게 키득거렸다.

“맞는 말인데, 안 그래요?”

이윽고 가느다란 금속이 움직였다.

달그락.

시아 켈튼을 보험사정관의 조수이자 의학 박사인 토머슨 에반스로 완벽 위장시킨(물론 라크시스의 뻔뻔스러운 주장이었다) 안경이 벗겨지는 소리였다.

시아는 당황했다. 라크시스에게 그가 하던 방식대로 제 진심을 표현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는데… 그의 반응은 시아가 예상했던 수 가지의 반응 중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희고 아름다운 손이 시아의 귓바퀴를 따라 걸린 안경다리를 거침없이 떼어냈다. 집요하게 달라붙은 라크시스의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라크, 안경은 왜…….”

조각 같은 얼굴이 또 다른 의미로 조각처럼 변해 있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우나 긴장하여 굳어버린, 그러나 안경을 벗겨낸 손짓이며 시아의 양 귓가를 단단히 붙들어 주변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시야를 차단해 버리는 행동만큼은 거침이 없는, 모순적인 남자의 모습이 시아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했다.

살짝 벌어진 남자의 입술 새로 아득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크시스는 시를 읊조리듯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이 어젯밤, 제게 친애의 표시를 했었죠.”

친애의 표시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호텔 방문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했던 굿나잇 키스. 시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라크시스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정적이 흘렀다.

솨아아.

바람이 불며 공원을 가득 메운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시아는 나뭇잎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한여름 밤의 빗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라크시스 옌과 함께 고립된 숲. 비를 피하기 위해 급히 들어간 숲 지기의 오두막에서 모닥불에 젖은 몸을 말리곤, 미묘한 정적 속에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그와 나란히 창가에 앉아 감상하고 있는, 그런 한여름 밤의 빗소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