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일단 여기서 나가요. 나머지는 경찰서 밖에서 이야기하자고요.”
“아, 잠시만요.”
라크시스는 무언가 생각난 듯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무한한 공간의 주머니 속에서 매끄럽게 광이 나는 황동 태엽 장치가 나왔다. 딱정벌레 모양의, 등딱지를 누르면 날카로운 여섯 개의 날이 튀어나오는 마도구였다.
시아는 불현듯 어젯밤 아르카나로 마중 나왔던 라크시스의 손에 들린 기계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제 본 건 엄청 낡은 거였는데?
하지만 지금 라크시스가 들고 있는 건 몇십 년은 훨씬 더 된 것처럼 녹슨 기계가 아니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기계였다.
시아는 취조실 문을 놓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맞아, 라크. 그게 뭔지 알려주기로 했었잖아요. 그런데 그건… 그때 보여줬던 게 아니네요?”
“눈썰미가 좋네요. 어떻게 쓰는지 한번 볼래요?”
라크시스는 날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몇 번 점검한 후에, 존 베버에게로 다가갔다.
“끄흐……! 푸후…….”
라크시스는 지팡이를 들어 존 베버의 뒷목에 끼워 넣고 지팡이를 공중에 띄웠다. 존 베버의 머리가 투명한 베개라도 벤 것처럼 들어 올려졌다.
그 앞에 살짝 쭈그려 앉은 라크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존 베버의 떡진 머리카락에선 며칠은 씻지 않은 듯 고약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라크시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뒷목에 황동 기계를 붙였다. 그러자 딱정벌레처럼 목덜미에 붙은 기계가 철컥 소리를 내며 날을 세웠다.
존 베버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동시에 라크시스는 그의 뒷목을 받친 지팡이를 빼내었다. 쿵, 하고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 충격 탓인지 존 베버는 다시 기절했다.
“으, 이 사람 한동안 못 일어나겠네요. 원래 이렇게 쓰는 거예요?”
라크시스는 어디선가 하얀 손수건을 소환해 와 존 베버의 머리카락과 닿았던 지팡이를 닦고 있었다. 누레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손수건을 허공에서 불살라 버린 마법사는 질겁한 시아의 곁에 다가와 읊조리듯 설명했다.
“다른 곳에 붙여도 좋지만, 뒤통수에 붙이는 게 가장 효과적이거든요.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
“무슨 마법을 쓸 수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맨덜랜드에 오면 답을 주기로 했었잖아요. 저 기계는 대체 뭐예요?”
그때 취조실의 문이 쿵쿵 울렸다.
시아는 움찔 움츠러들며 라크시스와 눈을 마주쳤다가, 문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랑케? 아직 심문 중이십니까? 이젠 슬슬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들을 존 베버에게까지 인도했던 핀리 스미스였다. 노크한 자의 정체를 확인한 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라크시스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핀리 스미스는 알버트 조지 랑케의 얼굴을 보자 반색했다.
“시간을 더 드릴 수 있으면 좋은데 아무래도 총경님이 접견을 금지한 자이다 보니…….”
“괜찮습니다. 시간은 충분했으니까요.”
“제국의 지팡이를 자처한다는 경찰이 되어선 살인마를 싸고돌아야 한다니 착잡하긴 합니다만, 저도 이 일을 그만둘 순 없는지라.”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경을 고쳐 쓴 시아는 과묵한 조수처럼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보아하니 애초에 존 베버는 맨덜랜드 경찰서 안에서 살인마 취급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경찰서장이 이단이었으니까.’
핀리 스미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존 베버는 조만간 조용히 풀려날 겁니다. 사실 유령선의 선장들이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켜 입건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이번엔 기사가 나버려서 어떻게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생겨선 어지간한 일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인상이었던 경찰이 좌절감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마 이번 존 베버의 사건도 흐지부지 묻힐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껏 푸른 훈장의 기사를 불러놓고 말이다.
시아는 그것이 학습된 좌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미라로 발견되었던 끔찍한 사건들을 단 한 번도 해결해 보지 못한 자의 무력함 말이다.
이를 통해 그간 맨덜랜드에서 황혼 국교회가 얼마나 활개를 치고 다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스미스 경감.”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모쪼록 이번 사건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서 밖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
그새 또 다른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어쩐지 취조실 밖에서 계속 소란이 들려오더라니.
핀리 스미스는 서둘러 앞장서며 복도로 나아가려고 했다. 라크시스는 핀리를 불러세웠다.
“아, 그리고.”
라크시스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핀리 스미스의 눈동자가 안개처럼 흐려졌다. 시아는 곧 라크시스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린 핀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난장판이 된 취조실을 확인하곤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총경님께 또 한바탕 깨지겠지만. 허허… 어쨌든 예,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 】
“이번엔 스미스 경감님께 어떤 마법을 걸었어요?”
시아는 경찰서를 빠져나오자마자 모자를 벗었다. 돌돌 말아 묶은 긴 머리가 말 꼬랑지처럼 툭 튀어나왔다.
의도치 않게 남장을 하게 된 탓에 가발도 없이 성급히 숨긴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시아는 잠시 머리카락을 털고, 곧 다시 머리를 묶어 모자를 썼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이마를 따라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서 모자 속에 숨겨주었다.
“존 베버가 혼자 난동을 부리다가 넘어진 것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어요. 그편이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요.”
“서장이 취조실 꼴을 보고도 그 말을 믿을까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거울이 없는 카페에서 라운지 슈트를 걸쳐주면서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처음으로 모자를 씌워준 사람도 라크시스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아도 섬세한 손길로 정돈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아는 경찰서장이 취조실에서 일어난 일을 밝혀내려고 하면 어떡하냐고 했다.
하지만 서장은 절대로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맨덜랜드 서부 경찰서에 외부인은 단 한 명도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으로 처리될 테니까.
두 사람이 핀리 스미스와 함께 서를 활보했던 걸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예정이었다.
모두 라크시스의 마법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카락 한 올을 시아의 귀 뒤로 가지런히 넘겨주며 웃음기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믿지 않으면 별수 있을까요.”
“그래서 존 베버에게 붙인 기계가 뭔데요?”
라크시스가 품속에서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되는 기계를 꺼냈다. 조그마한 버튼이 달려 있고, 채반처럼 생긴 막이 기계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작은 스피커처럼 생겼네. 시아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라크시스는 맨 끝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들어볼래요?”
- 제기랄! 아까 D가 날 찾아왔다고! 그 남자가 보낸 게 틀림없어, 날 죽이려고 했다니까?
치지직― 소리와 함께 웬 남자의 음성이 기계를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걸걸하니 뒷골목 건달 같았지만, 공포에 젖어있었다. 뒤이어 굵고 차가운 목소리가 빈정대듯 남자의 말을 맞받아쳤다.
- …무슨 소리야.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시아는 곧 깨달았다. 이 작은 기계가 맨덜랜드 서 취조실의 실시간 현장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 어서 서장에게 날 풀어달라고 해. 돈 받은 거 잊지 않았겠지? 젠장, 뇌물 먹은 거 기자들에게 불어버리기 전에! 어서!
- 멍청하긴. 존 베버. 당신 지금 처지가 어떤지 모르지? 그렇게 원하면 기자를 불러다 주지. 그렇게 되면 네 잘난 고용주도 널 버리고 말걸.
종이 뭉치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얇은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또다시 치지직거리는 소음을 냈다.
존 베버가 그것을 주워 들었는지 말을 멈췄다. 아마도 오늘 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본인의 기사를 본 것 같았다.
- 넌 이미 버려졌어. 존 베버. 아무래도 네 고용주가 더 이상 너희들과 노예 거래를 할 마음이 없어졌나 보지.
- 젠장, 젠장, 젠장! 그게 얼마짜리 거래인데! 그 육시럴 놈이 내 성녀상을 가져가지만 않았어도, 제기랄! 서장을 불러! 당장 날 풀어달라고!
- 글쎄. 총경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셔서. 돌아오려면 한참 걸리실 텐데, 어쩌나?
존 베버의 고함과 욕설이 한바탕 시끄럽게 울렸다. 핀리 스미스는 얼마 안 가 취조실을 나가 버렸다.
곱게 풀려나갈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존 베버가 수갑에 손이 묶인 채로 의자에서 버둥거리다 또다시 넘어졌다. 타일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기계에서 찢어질 듯한 소음이 나자 라크시스가 재빨리 기계를 껐다.
인상을 쓰며 귀를 막고 있던 시아가 천천히 손을 떼며 물었다.
“…도청기예요?”
“소리를 전송하는 기능을 넣은 건 얼마 안 됐어요. 그 전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러니까 지금은 도청기로도 쓴단 소리다.
시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서 그 딱정벌레 기계의 정체는 무엇이며, 지난번에 보여준 낡은 기계는 또 무어냐고 물으려던 차에 라크시스가 먼저 시아의 낌새를 눈치채고 질문을 던졌다.
“시아. 슈테른베슈테크의 지하 감옥, 기억나나요?”
“당연히 기억하죠. 백삼십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던 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라크시스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딱정벌레 모양의 태엽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이거다.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 이 기계는 이렇게 낡아 있는 걸까?
“그때 당신을 인질로 잡고 위협했던 샤샤리아 상인에게 제가 이걸 붙여뒀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시아의 생각이 잠시 멈췄다. 이윽고 다시금 작동하기 시작한 시아의 사고회로는 그 옛날 라크시스 옌이 백작령의 지하 감옥에서 했던 말을 기어이 기억해 냈다.
‘마약상을 당장 뿌리 뽑는 건 무리입니다. 놈에게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았으니 백작께서 일부러 놓친 듯 놈을 풀어주었으면 좋겠군요. 제국으로 도망친 놈이 명령을 내린 상급자에게 가도록 말입니다.’
자그마한 곤충을 닮은 황동 기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위치 추적기였다.
“…설마 진짜로 마약상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어요?”
“그땐 현자의 별에 진심이었으니까요. 그게 광룡의 봉인인 줄 알았으니… 현자의 별을 얻기 위해서라면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원하는 것쯤은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