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시아는 곧 라크시스가 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다.
“…카얄과 손잡고 이번 일의 자금을 대주던 사람을 찾으려는 거군요.”
라크시스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낮게 속삭였다.
“그자는 아마 황혼 국교회 전체의 자금줄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비단 이번 맨덜랜드에서의 유령선 사건뿐만이 아니라요.”
그는 유령선 사건의 해결 그 이상을 노리고 있었다. 여덟 번째 봉인을 찾고 황혼 국교회를 통해 카얄에게 접근하여 그를 처리한다, 라는 이번 시간 여행에서의 두 가지 목적 중 후자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황혼 국교회의 자금줄을 틀어쥐어 카얄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금줄의 출처를 발견하게 된 건 정말이지 뜻밖의 수확이었다.
“유령선 사건이 단순히 이단 사제의 저주로 인한 일이었으면 이렇게 일이 풀리진 않았을 겁니다. 위장을 위해 내세운 유령회사가 제멋대로 단서를 흘렸으리라곤 카얄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존 베버의 머리를 헤집은 후부터 라크시스는 묘하게 기분 좋아 보였다. 하지만 시아는 그의 계획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내려고요? 존 베버의 성녀상으론 D를 만날 수도 없잖아요. 우리가 알게 된 건 노예상이 어떻게 가멜인을 판 대가를 얻는 것인지 뿐이지, 그가 얻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는 아니란 말예요.”
“좋은 지적인데요. 하지만 제가 방법도 없는 계획을 말씀드렸을 린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대답에 시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라크시스는 영특한 제자에게서 사고를 이끌어내는 교수처럼 시아에게 은근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도 답을 유추할 수 있어요. 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황혼 국교회의 든든한 돈주머니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하아…….
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바람 장미 때도 그러더니, 갈리프도흐의 두 교수(요르문과 라크시스였다)는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순순히 정답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크시스의 눈동자가 기대와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을 본 시아는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물어본 걸 보니 막무가내로 부둣가를 뒤져 D를 찾아 나서자는 건 아니겠고, 그렇다고 시청에 남대륙 회사라는 보험회사가 따로 등록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혹시 어젯밤의 펍에 가보자는 건가요?”
“그것도 괜찮겠지만 저와 요르문은 펍에 출입 금지를 당한 상태라서요. 로드 젤마니도 이미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 버렸고요. 하긴, 펍에서 나오는 노예상에게서 성녀상을 빼앗는 방법도 있겠군요.”
라크시스는 말을 덧붙이며 눈썹을 까닥였다.
“하지만 펍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무엇보다 단번에 카얄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방법이죠.”
“아으, 모르겠어요.”
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벌써 포기하는 거예요?”
달콤한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간지럽게 맴돌았다. 누가 보면 연인끼리 카드놀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평소였다면 라크시스의 나긋한 음성에 간지러워진 손끝을 뜯고 있었겠지만, 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답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라크시스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이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힌트를 줄게요.”
“맨입으론 안 알려줄 거잖아요?”
“물론이죠.”
치. 순 날강도잖아.
시아가 툴툴거리는 사이, 라크시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선,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 대가는 받았고. 힌트를 줄 테니 좀 더 가까이 와볼래요?”
대가가 손등 키스라고……?
시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시아가 움직이지 않자 라크시스가 먼저 다가갔다. 그러곤 하얗고 길쭉한 손을 들어 올려 시아의 관자놀이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을 타고 하얀 마력이 피어올랐다.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던 마력이 시아의 관자놀이를 타고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시아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향했다. 홀로 다른 장면을 보는 것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시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음이잖아요. 이건 존 베버가 받았던 어음이네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기억을 엿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존 베버의 머릿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필름을 돌려 상영된 영화를 보듯 관람하고 있었다.
어둑한 부둣가의 골목 사이에서 코트의 목깃을 잔뜩 세워 얼굴을 가린 남자가 존 베버의 확인증을 보곤, 수취인을 휘갈긴 빳빳한 어음을 내밀었다. D에게서 받은 어음의 내용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마침내 존 베버가 부둣가를 떠나 가로등이 켜진 거리로 돌아 나왔을 때…….
“지급처는 맨덜랜드 중앙은행에… 잠깐만요. 발행처가 보여요. 그 밑에 발행인이……!”
[약속 어음
존 베버 귀하
금 452,000,000 비스크 정
- 위의 금액을 귀하 또는 귀하의 지시인에게 이 약속 어음과 상환하여 지급하겠습니다.
지급기일 : 3520년 5월 11일
발행일 : 3520년 4월 12일
지급지 : 맨덜랜드 중앙은행
발행지 :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 맨덜랜드 시.
발행인 : 대표 리암 블레어]
라크시스가 손을 떼자, 시아는 멈췄던 숨을 토해내듯 헉헉거렸다. 몸을 휘청거리자 라크시스가 재빨리 시아를 부축해 주었다.
“시아, 괜찮아요?”
“이게 말이 되나요? 발행인이 리암 블레어예요! 카얄을 대신해 유령선의 미라를 샀던 건 리암 블레어였다고요!”
시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폭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리암 블레어라니. 제국의 총리가 이단과 손을 잡고 사람을 사고파는 데 협력했다니. 그것도 사람을 노예 삼아 거금을 들여가며 사지로 몰아넣었다니……!
충격적인 사실에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지금까지 제게 정답을 맞혀보라고 했던 라크시스의 태도였다.
“이래서 그렇게 자신 있었던 거였어요? 라크, 이런 마법은 반칙 아니에요? 전 마법사가 아니라고요!”
시아는 뒤늦게 라크시스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툴툴거렸다.
존 베버의 머릿속에서 어음의 내용을 본 건 라크시스뿐이었다. 그 내용이 결정적인 단서이자 답이었는데, 시아로서는 어음의 내용을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래놓고 저더러 맞혀보라니, 불공평하다고요. 힌트가 없었으면 애초에 맞히지 못할 답이었는데, 제가 무슨 수로 어음의 내용을 알아낼 수 있었겠어요?”
“미안해요, 시아. 이렇게까지 당신이 흥분할 줄은 몰랐는데. 난 그저 당신에게…….”
“손등 키스를 하고 싶었다고요?”
쩔쩔매던 라크시스가 움찔 굳었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손등 키스야, 무도회에서 신사가 숙녀에게 인사치레로 하는 일이건만, 시아에겐 그조차 함부로 하고 싶지 않은 라크시스로서는 이런 핑계를 대서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시아에게는 그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시아는 손을 번쩍 치켜들어 라크시스의 눈앞에 내밀곤 발을 동동 굴렀다.
“자, 마음껏 하세요. 으, 마법사가 아니라서 억울한 적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부러울 줄이야.”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부여잡고, 손마디에 살짝 입술을 맞붙였다 뗀다.
그에,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예전엔 에스코트 받는 것도 어색해하던 시아였는데. 어젯밤의 굿나잇 키스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불안감이 들고 만다. 그녀가 아무에게나 접촉을 허락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그 ‘아무나’가 된 건 아닌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
라크시스는 불필요한 걱정을 억지로 눌러 가슴 속에 숨겼다. 그러곤 괜히 한 번 더 시아의 손등에 낙인처럼 제 입술을 눌러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는데, 그리 유쾌한 마법은 아니에요. 만능도 아니고요.”
그의 말에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마법만큼 사기적인 게 어디 있다고?
게다가 존 베버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취조실에 들어올 때 형형하게 치뜨고 있던 눈이 무색하게, 지금의 살인마는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지 않나.
“차라리 카얄을 만나서 그자의 머릿속을 헤집는 게 빠르겠어요. 카얄을 존 베버처럼 저렇게 쓰러트리면 힘들이지 않고 종말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아. 이건 아무에게나 쓰지 못하는 마법이에요. 시전자의 정신도 함께 노출되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함부로 써선 안 되고요.”
시아는 뒤늦게 그가 존 베버의 정신을 읽으며 고전했던 것을 상기했다. 고대 마법사씩이나 되는 그가 땀을 흘리며 끙끙거렸던 건, 카얄이 존 베버의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랬지.
그녀의 재잘거림이 일순 멈추자, 라크시스는 괜히 미안해져서 시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남의 머릿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상대가 떠올리는 것들만 볼 수 있죠.”
“그래서 아까 존 베버에게 계속 질문을 했었던 거군요?”
“그런 셈이죠.”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능이 아니라곤 하지만 어쨌든 그의 마법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단서를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쩌면 여덟 번째 봉인을 찾는 것보다 카얄을 붙잡는 게 먼저가 될지도 모른다. 카얄이 다무스 출신 귀족 행세를 하며 양지에 나온 이상, 자금이 없으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힘들 테니까.
“그렇다면 이젠 리암 블레어 쪽을 압박해 봐야겠네요.”
“그런 쪽에 있어선 나름 만능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다만.”
와, 사악해. 시아는 키득거렸다. 하긴, 눈앞의 남자는 돈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가진 사람이었다. 그뿐일까. 자산과 지위를 기반으로 한 그의 명예는 황제가 와도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럼 전 라크만 믿어야겠네요.”
“여부가 있을까요, 레이디 켈튼.”
라크시스가 과장되게 몸을 숙여 숙녀를 맞이하는 신사를 흉내 냈다. 그러나 어색함 없이 움직이는 몸은 마치 인사라는 게 원래 그런 동작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우아한 인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인마가 그의 뒤쪽 바닥에 누워 그르렁대고 있었다.
숨소리를 들으니 존 베버가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시아는 취조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새로 소란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