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시아는 시선을 피했다.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애초에 자신과 다른 사람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자의 연륜을 자신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스미스 경감은 무모한 경향이 있었다. 황제에게 일을 해결해 달라고 편지를 보내다니. 이걸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한 치 앞을 못 내다본 결정이라고 해야 할지.
‘만약 황제도 이단과 한 패였으면 어떡하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아는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황혼 국교회의 신도일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아는 곧 의심을 거두었다. 어쨌거나 황제는 일국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스쳐 지나간 상상만으로 망상을 펼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근거가 있다면 모를까. 애초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찰나의 생각이었으니까. 차라리 차탈 쪽을 의심하는 게 합리적일 터다. 대공은 발자크 로스와 친구라고 했으니까.
시아는 라크시스가 하는 것처럼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서 푸른 훈장의 기사니, 뭐니 하는 엄청난 거짓말을 한 거예요?”
“거짓말한 적은 없어요. 스미스 경감이 멋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둔 것뿐이죠.”
그것도 마법으로 한 거면서.
시아는 투덜거렸다. 라크시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시아의 투덜거림을 감상하며 대답했다.
“스미스 경감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죠. 황제가 제 요청에 답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이 위험한 일과 관련된 편지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러네요.”
중간에 이단과 관련된 이들에게 편지가 가로채지기라도 했다간 핀리 스미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황혼 국교회는 극도로 정체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집단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데이먼 포드는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겠네요.”
이번 일로 어쨌든 유령선은 더 이상 바다에 뜰 수 없을 것이다. 데이먼 포드가 보란 듯이 기사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서술한 기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존 베버의 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 버렸기 때문에 황혼 국교회의 목표가 되었을 거란 뜻이다.
“간혹 그런 자들이 있죠. 제 목숨보다 호기심을 우선하는 자들 말이에요.”
“라크. 그래서 존 베버를 상대하면서는 왜 그렇게 끙끙거렸던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시아는 재킷 속 소매를 다시 한번 끄집어당겨 손으로 쥐곤 라크시스의 뒷목에 남은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땀에 젖은 채로도 그에게선 은은한 숲 향기가 났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기억에 저주가 걸려 있더군요.”
“저주라뇨?”
“비밀 유지를 위해 꽤나 철저한 수를 썼더군요. 지금처럼 누군가 존 베버의 비밀을 엿보게 될 경우 저주가 발동되도록 해놨어요. 그 저주란 게 다름 아닌 카얄의 감시망을 건드리는 것이었지만요.”
라크시스는 예의 오만한 표정으로 제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물론 전 저주를 발동시키지 않았습니다만.”
요컨대 카얄의 저주를 피해 존 베버의 머리를 헤집느라 애를 썼다는 거다.
시아는 칠십 년 후의 첩보 영화를 상상하며 웃었다. 금고 앞을 지키는 붉은 레이저를 피해 곡예 하듯 잠입하는 요원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존 베버의 뇌를 파고들면서 그런 식으로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니 웃겼다. 생전 몸 한번 안 써봤을 것처럼 생긴 귀족적인 사람인데.
그러나 몸을 안 써본 것 같다고 여기기엔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잡아본 라크시스의 팔은 꽤나 탄탄했다. 품에 안겨 있을 때도 단단했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아는 결국 새빨개진 귀를 부채질하며 물었다.
“만약 저주가 발동되었다면요?”
“카얄은 제 존재를 알아차렸을 테고 존 베버는 저대로 숨이 넘어갔겠죠. 못해도 불구가 됐을 겁니다.”
존 베버는 기절한 이후,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모습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으나, 시아는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라크시스가 사람을 죽일 정도의 마법을 썼을 것 같지도 않았다. 존 베버는 저대로 잠들어 있다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릴 것이다.
“스미스 경감에겐 뭐라고 하려고요?”
“그렇다고 우리에게 뭐라고 할 순 없겠죠. 지금 당신과 나는 푸른 훈장의 기사잖아요? 안됐지만 뒷감당은 스미스 경감이 해야겠네요.”
라크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긁히고 깨진 타일에, 밀려난 테이블과 기절한 살인마. 이 광경을 수습하려면 스미스 경감은 고생깨나 할 터다. 윗선에 감히 푸른 훈장의 기사가 서에 왔었다는 말도 못 하고 말이다.
아랫사람의 설움이 이런 거지.
의술원에 입학한 이후 아이작 맨틀러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던 시절이 떠오르고 말았다. 선배가 친 사고를 수습하고는 자신이 혼난 적도 있었다.
시아는 핀리 스미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짤막한 위로를 미리 보냈다.
시아는 위장용 서류 가방을 열어 성녀상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존 베버가 했던 말에 따르면 이게 열린단 소리잖아요?”
어젯밤 루드윅이 술에 취해 가져왔던 성녀상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에게서 성녀상을 건네받곤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성녀상의 허리를 뚝 끊어 열었다.
“아주 간단하고 하찮은 마법이군요. 그래서 어젠 발견하지 못했던 거였어요.”
김이 샌다는 말투다.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대 마법사라 불리는 자신이 고작 이런 마법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니, 하는 표정이었다.
“성녀상이 열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다들 도자기 인형이구나, 하지.”
시아의 위로에도 라크시스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라크시스는 꼬깃꼬깃 접혀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 들곤 쫙 펼쳤다.
“이걸 미리 열어볼 생각을 했다면 계획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종이엔 존 베버의 말마따나 D를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간, 어음으로 받을 금액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엔 황혼 국교회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틀 후 밤 11시 맨덜랜드 항구 제7항 물류보관소 H7 구역.]
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쪽지에 적힌 금액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혹할 만한 액수다. 인간성을 내다 버리고 사람을 사고팔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을 만한 금액.
한편으론 카얄이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무슨 수로 계속 충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의 정체가 심히 의심스러워졌다.
시아는 상념에 빠진 채 중얼거렸다.
“…미리 열어봤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예요.”
“하긴 그렇네요.”
만약 성녀상을 미리 열어 쪽지를 먼저 발견했다면, 약속 장소에 때맞춰 나가 D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존 베버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라는 수상한 집단에서도 이미 존 베버의 살인과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기사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가 경찰에 붙잡혀 있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성녀상을 미리 열어봤더라도 존 베버가 보험사정관을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D는 나타나지 않을 터다.
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기껏 정보를 알아냈는데, 그 정보는 쓸모가 없어졌고. 이젠 어떡하죠?”
그러나 올려다본 라크시스는 생각보다 홀가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뜻밖의 수확을 했다는 듯 약간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쓸모가 없진 않죠. 이젠 황혼 국교회가 맨덜랜드에서 어떤 식으로 영혼을 구해 왔는지 알게 되었잖아요?”
지금까지 한 대화가 무색하게, 라크시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그렇다면 이제 D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해야겠군요.”
시아는 당황해서 물었다.
“어떻게요? D는 존 베버를 만나러 오지 않을 텐데요?”
“존 베버의 D를 만나자는 게 아닙니다. D의 실체를 만나보자는 거죠.”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D의 실체라면 남대륙 회사를 말하는 걸 테다. 하지만 D를 만날 길조차 요원해졌는데 어떻게 그들의 실체를 밝혀내자는 말인가?
일순 바깥이 소란했다. 방음벽 너머로도 들리는 어렴풋한 고성과 그 뒤로 따라붙는 경찰들의 목청 높은 소리. 차가운 타일 바닥을 뛰어다니는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따라 줄지어 이어졌다.
시아는 순간 취조실에서의 소란을 듣고 경찰들이 몰려든 것인가, 하고 긴장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발소리는 취조실 근처까지 오지도 않았다.
라크시스는 문을 흘긋거리며, 쪽지에 적힌 금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들어 보였다.
“존 베버는 꾸준히 황혼 국교회와 미라를 거래해 왔어요. 하지만 그가 받은 돈은 황혼 국교회에서 직접 나온 게 아니죠.”
“…세탁되었다는 말이잖아요.”
“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라는 터무니없는 유령회사가 중간에 끼어있었죠.”
라크시스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어 보였다. 어린아이에게 간단한 퀴즈를 내고 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시아가 자신의 말뜻에서 정답을 찾아내길 한껏 기대하는 눈치였다.
귀족적인 얼굴과는 거리가 먼 야살스러운 눈웃음이 속을 간질거리게 한다.
시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저게 본능적인 표정이라면, 라크시스는 살아있는 여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대륙 회사는 미라의 대금을 직접적으로 운용하지도 않았어요.”
“노예 밀무역상들에게 어음을 줬다면서요. 회삿돈이 계좌에 있으니 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 거 아녜요?”
“어음을 썼다는 말은 대금을 현금으로 일시지급 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당신도 방금 봤잖아요? 확인증의 금액 말이에요.”
라크시스의 말에 시아는 확인증 가득 적혀 있던 0을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그 많은 액수를 주기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제국에 얼마나 있을까.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얼마 없죠. 아까 보셨다시피 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까.”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중요한 건 다무스 출신 귀족 발자크 로스에겐 그만한 자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건 또 언제 조사한 거예요?”
라크시스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실행력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문명사회에서의 권력은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돈과 지위와 명예였다. 그런 면에 있어서 라크시스 옌은 황제도 따라오지 못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카얄은 제 정보가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