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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7)화 (217/292)
  • 217화 

    “큭, 뭐 하는 거야, 제기랄! 내 머리에 뭐 하는 짓이냐고!”

    “잠시 실례.”

    라크시스는 노예 무역상에게 자비가 없었다. 푸딩보다 무른 뇌를 파고들어 기억의 자취를 마력으로 더듬어 가는 것.

    더군다나 존 베버는 여생을 보호해 줄 가치도 없는 자였다.

    섬세하던 마력이 별안간 뇌우가 되어 존 베버의 정신을 덮쳤다. 얄팍한 이성의 문이 무너지며 알몸이나 다름없는 자아가 나타났다.

    존 베버의 정신은 침입자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침입자는 거대한 해일처럼 무자비한 속도로 존 베버를 쫓아왔다. 마치 그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을 읽어내려는 듯이.

    마법사의 망령은 주름진 뇌를 따라 번개처럼 뒤따라붙었다.

    “그, 그만! 따라오지 마!”

    “마법을 간파한 것치고는 마력 저항력이 형편없군.”

    무슨 생각을 하든 읽히고 만다. 존 베버는 생각을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춰야겠다는 생각마저 읽히고 있었다.

    이러다 유령선의 비밀마저 들키게 생겼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유령선을 운항해 왔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그리고 머릿속의 침입자는 그 과정마저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가볍게 탄식하며 존 베버의 사고 흐름을 뒤틀었다.

    존 베버는 더 이상 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었다. 저주에 완전히 잠겨 버린 그의 기억에서 진짜 보험사정관의 얼굴과 눈앞의 사기꾼의 얼굴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

    존 베버는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의자에 쿵쿵 박았다. 사기꾼의 얼굴이 물감을 푼 듯 이지러지더니 부둣가 뒷골목에서 만났던 말쑥한 남자로 변했다.

    실크햇 밑으로 드러난 라크시스의 입꼬리가 위험한 호선을 그렸다. 그에 존 베버의 발가락이 본능적인 공포로 움츠러들었다.

    “내가 누구라고 했지?”

    “…D. 그냥 D라고만 했어.”

    “가멜에서 출발해 맨덜랜드 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빠짐없이 털어놔. 사제를 만나 무얼 하는지, 배에 태운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저주를 거는지.”

    라크시스의 명령에 존 베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끄… 흐으…….”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비밀들이 멋대로 새어나오려 하자 존 베버는 수갑 찬 손을 들어 입을 더듬어 막았다.

    그러나 기억을 보관해 둔 서랍들이 흔들리더니, 멋대로 쏟아졌다. 그러나 잠가둔 서랍에 열쇠를 꽂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제 보험사정관 D는 온데간데없고, 창백한 시체의 낯빛을 한 사제가 서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드는 이들.

    한밤중의 부둣가에 배를 이끌어 세우면 어김없이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죽음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인간 행세를 하는 것처럼, 사제들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들이 갑판에 오르면 세이데이 호의 모든 생명은 숨을 거두었다.

    자세한 건 모른다. 가멜인들을 속여서 태우거나 납치하여 배에 싣고, 간혹가다 저항하는 검둥이들을 때려죽이기도 했으나, 존 베버는 자신이 저지르는 짓과 이 정체 모를 사제가 행하는 살인은 차원이 다른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제가 다녀간 배엔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평범한 승객이었던 자들도 모두 바싹 마른 미라가 되어있었다. 다만 돛대와 갑판 여기저기에 남겨진, 피로 그린 붉은 진으로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해 볼 뿐이다.

    “…미라의 수를 세어서 확인증을 주는 거야. 배에서 죽은 놈들의 머릿수와 금액을 적은 확인증 말이지. 그걸 성녀상 안에 말아 넣는 거야. 성녀상은 당신 같은 자들이 아니면 열 수 없잖아.”

    간혹가다 배에 태운 놈들의 수보다 확인증의 머릿수가 더 많을 때가 있었다. 아이를 밴 검둥이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시아는 구석에 서서 숨죽여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대면했을 때의 섬뜩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존 베버는 넋이 나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라크시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내비치면서도 라크시스는 존 베버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크시스는 노예 밀무역상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남의 기억을 엿보고 정신을 장악하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차탈 같은 인물이나 할 법한 변태적이고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라크, 괜찮은 건가.’

    시아는 이마를 덮은 은발 사이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시아는 곧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라크시스 옌이 마법을 쓰면서 고전한다고?

    핀리 스미스를 속여넘기는 것도, 차탈의 보좌관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도, 그 어렵다던 공간이동을 하는 것도 라크시스는 숨 쉬는 것보다 쉽게 해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집중한 그를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먼저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어. 존 베버, 그렇다면 당신은 D를 어떻게 만나는 거지?”

    라크시스는 집요하게 존 베버를 털어댔다. 그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확인증 뒤엔 정해진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어. 사제가 확인증을 성녀상에 봉해 버리기 전에 미리 봐둬야 하지. 그 날짜에 맞춰 약속된 장소로 나가면 D가 있어. 당신 말고 다른 놈이 나올 때도 있지만 언제나 D라고 부르지.”

    존 베버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을 발설해 버린 남자는 숨통을 옥죄어 오는 죽음을 느끼며 눈알을 뒤집기 시작했다.

    시아는 존 베버의 반응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유난히 고전하는 라크시스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구는 노예 무역상의 사이엔 필사적인 밀고 당김이 존재했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라크시스의 마법이 통하긴 했으므로 결국 창이 방패를 뚫은 셈이지만, 라크시스가 고전하는 것은 익숙한 그림이 아니었다.

    “…D가 확인증을 보고 어음을 줘. 그걸 은행에 가지고 가서 돈을 찾아오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끝이지. 가멜로 되돌아가는 바닷길에 시체만 버리면 모든 게 간단하게 끝나는 거라고.”

    “이 일을 알고 있는 자는 얼마나 되지?”

    “…여기 짭새는 거진 다 이단과 한패야. 제기랄, 이제 좀 그만하지, 그래? 날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존 베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침입자를 감지한 기억의 저장소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보험사정관 D의 얼굴로, 창백한 사제의 얼굴로 변하던 남자의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우나, 섬뜩하고 자비 없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황금처럼 빛나는 금발 밑으로 핏빛 시선이 독사의 송곳니처럼 번득였다. 저주의 근원이요, 존 베버의 영혼을 옭아맨 악마. 다름 아닌 카얄이었다.

    이런. 존 베버의 뇌를 제 구역 뒷골목처럼 돌아다니던 라크시스가 재빨리 마력을 갈무리했다. 검붉은 저주가 물밀듯 밀려온 탓이다.

    존 베버의 영혼과 얽힌 카얄의 가느다란 정신이 잠시 눈을 떴다 감았다.

    라크시스는 짧게 한숨을 쉬며 땀 맺힌 이마를 가볍게 훔쳤다. 카얄이 자신을 역으로 감지할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참이었다.

    “후, 무슨 그리 잔인한 말을. 살인자는 당신이겠지. 그래서, 성녀상은 어떻게 받았지?”

    “제기랄, 그만해! 네놈은 D가 아니잖아! 젠장, 내 머리에서 나가! …더 이상은 말 못 해, 나 이러다 진짜 죽는다고. 놈들이 날 죽일 거야, 그 남자가 내 뇌를 태워 버릴 거라고……!”

    존 베버의 말은 결국 맺어지지 못했다. 철제 의자가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노예 무역상의 쓰러졌기 때문이다.

    남자의 낯이 새하얬다. 존 베버는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정적이 찾아왔다. 한 박자 늦게, 바짝 조여든 긴장감이 풀어지며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내내 위압적으로 서 있던 라크시스는 그제야 존 베버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시아는 숨을 들이켜며 라크시스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뗐다. 보험사정관 D니, 성녀상 속 확인증이니, 하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으나 무엇도 눈앞의 남자에게서 우선순위를 빼앗진 못했다.

    지금의 라크시스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칼날 같던 고대 마법사의 마력이 여전히 노예 무역상의 관자놀이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아의 구둣발이 조용한 바닥을 울린 바로 그 순간.

    “시아.”

    설산이 녹아내리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아의 귓전에 닿았다.

    시아는 거침없이 라크시스에게 다가갔다. 그를 둘러싼 마력이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시아의 속도에 맞춰 물러나던 마력은 어느새 바람에 실려 사라진 샤샤리아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왜 그렇게 땀을 흘렸어요.”

    “날 걱정했나요?”

    라크시스는 무방비하고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아는 재킷 속 셔츠의 소매를 잡아빼 쥐고는 라크시스의 모자를 벗겨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당연히 걱정되죠. 라크가 마법을 쓰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이 모든 걸 보고도 내게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거란 말이죠.”

    시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은빛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만족감으로 가늘어지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가만히 떼어내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궁금한 것도 많았을 텐데.”

    “…사람 걱정이 우선 아녜요? 살인마는 기절했고, 당신은 끙끙거리고 있고.”

    끙끙거린다니. 라크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마법사도 아닌 자를 상대로 고전한 건 맞았지만,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저주에 걸린 자는 카얄과 연결되어 있었어.’

    그러나 라크시스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시아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뺨을 저렇게 붉히고선 누굴 걱정한다는 건지.

    “나의 조수님은 사건보단 내게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군요.”

    “…존 베버의 말은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보험사정관 D도, 어음도 모두 다요.”

    그러면서도 중요한 단서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어필을 단단히 한다. 시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파르르 떨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기쁜데요.”

    아, 복숭아 같은 저 뺨에 입 맞추고 싶다. 하지만 멋대로 다가오고 굿나잇 키스를 해도 되는 건 오직 시아뿐이다. 라크시스는 허락 없이 행동해 숙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여긴 삭막하기 그지없는 취조실이다. 냄새나는 살인마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라크시스는 샤샤리아 연기를 날려 보내듯 충동을 지워냈다. 지워지지 않은 열기는 화상처럼 마음에 자국을 남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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