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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6)화 (216/292)

216화 

“사양할게요. 애초에 전 마법사도 아닌걸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대답했다.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이라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마법사도 아닌데 마법을 어떻게 배우냐고! 대전제부터 틀려먹은 사람한테 이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다. 자신을 놀리는 데에 재미라도 들렸는지 이젠 마법을 배워보란다.

시아는 빈정거리며 라크시스의 팔을 툭 쳤다.

“이왕 알려줄 거라면 공간이동마법이나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지각했을 때 써먹게.”

마도 시대로 시간 여행을 와 고대 마법사와 함께 다니면서도 막상 마법을 제대로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시아는 자신이 아는 마법 중 하나를 골라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러나 오늘의 라크시스는 영 이상했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기로 작정한 건지 뜻밖에 진지한 반응이 돌아왔다.

“제가 쉽게 한다고 해서 공간이동이 쉬울 거라 생각하는 건 오산입니다, 시아.”

“아니, 제 말은…….”

사교계의 비밀언어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이 왜 이런담? 분명 시아가 무슨 뜻으로 질문했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라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이러는 게 아닌가.

“제국 전역의 좌표를 외울 게 아닌 이상 스크롤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예요. 오차 없이 거리를 계산하는 것보단 걸어가는 게 빠른 경우도 있으니까요.”

진지한 반응을 보니 저건 진심인데.

시아는 라크시스의 대답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만약 진짜로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다 해도 저런 마법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시아는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알버트 조지 랑케는 대체 또 누구예요?”

“이상해요? 나름 공들여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공들여 짓긴. 딱 봐도 무엇을 조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역대 황제 이름으로 가장 자주 쓰였던, 그래서 제국민이 아들의 이름으로 가장 자주 선택하던 두 이름 아닌가.

케드릭과 헨리가 이 조합에서 빠진 건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시아가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자 라크시스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당신의 작명 실력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나 봐요. 미스 로렌 허슬러.”

“그러게요. 미스터 알버트 조지 랑케.”

시아는 결국 라크시스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말았다.

“그나저나 아깐 보험사정관과 조수 연기를 하기로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그게 말입니다.”

그때 핀리 스미스가 우뚝 멈춰 섰다. 오래된 조명이 깜빡이는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곳은 창고처럼 으슥한 방이었다.

마도 시대 대부분의 경찰서는 과거 민병대가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하여 이용 중이었다. 법이 제국 구석구석에 관여하기 이전의 세월도 기억하는 라크시스는 복도의 구조와 방의 위치만으로 핀리가 멈춰 선 곳의 쓰임새를 알아차렸다.

취조실이었다.

“이쪽입니다. 미스터 랑케.”

연식만큼이나 오래된 문 안엔 철창으로 유리를 가로막은 관찰실이 있었다. 그 너머 서늘한 풍경 속에 존 베버가 수갑을 찬 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관찰실에 달린 작은 문을 열기 직전, 핀리가 라크시스를 멈춰 세웠다.

“저어, 들어가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시죠.”

핀리 스미스는 머뭇거렸다. 뺨에 길게 난 상처와 뱃사람처럼 울퉁불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라크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존 베버는… 그러니까, 보통 살인범들과는 다릅니다.”

“다르다는 건?”

핀리 스미스는 창 너머의 살인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위험한 자예요. 오랜 경찰의 감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고 남을 놈입니다.”

대체 얼마나 흉악한 범죄자이길래 핀리 스미스 같은 경찰까지 두려워하는 건가.

시아는 두피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해부된 시신을 보는 덴 두려움이 없어도, 사람을 죽이는 자를 만나는 덴 면역이 없었다.

그녀는 어쩌다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의술사에 불과했으니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흘긋거렸다. 고대 마법사의 여유란 저런 것일까. 라크시스의 얼굴에는 고요한 수면처럼 파문 한 점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시죠.”

핀리가 문을 열었다.

“시아, 어떻게 된 상황인진 끝나고 말해 줄게요.”

문을 넘어가기 직전, 라크시스가 속삭였다. 그러나 시아는 그의 속삭임에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노예 밀무역상의 시선이 마치…….

‘…닮았어. 헨리 던로와.’

섬뜩한 시선은 사람을 죽인 자의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아는 얼어붙은 발을 천천히 움직였다. 핏발선 흰자의 중심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묘한 눈동자가 카메라의 렌즈처럼 시아를 따라 움직였다.

관찰당한다. 시아는 이런 기분을 오래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죽은 연인의 향을 풍기며 나타난 붉은 드레스 차림의 로렌 허슬러를 관찰하는 재키 레이븐에게서.

덫을 놓고 사냥감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자의 집요한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남자는 마치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며, 욕망을 위해서라면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존 베버는 돈에 눈이 멀어 성녀상을 훔쳤으리라 의심된 자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으니까.

카얄이 만들어 내는 괴물은 언제나 이랬다.

사람의 욕망 중 가장 강렬하고 음습한 것을 꺼내어, 도덕적 가치와 타인의 목숨을 저버리면서까지 집착하게 한다.

그 집착의 대상은 재키 레이븐에겐 순결이었고, 케르딕 7세에겐 권력이었으며 이자벨라에겐 복수였고, 존 베버에겐 돈이었다.

“라크, 저 사람 목에…….”

“당신도 발견했군요.”

시아와 라크시스는 잠시 시선을 교차하다 존 베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저주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풀어헤친 목깃 사이로 기울어진 해와 달의 문신이 보였다.

라크시스는 마도 시대와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철제 의자를 끌어왔다. 존 베버가 흰자위의 실핏줄이 터져라 노려보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이 상황에서 우위에 있는 게 누구인지 보여주려는 듯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미스터 베버.”

“꺼져. 할 말 없으니까.”

“아, 제 소개를 먼저 하죠. 전 이런 사람입니다.”

라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핀리 스미스에게 했던 것처럼 빳빳한 백지를 내밀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냈다.

그러나 존 베버는 수갑 찬 손으로 명함을 거칠게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장난하나? 사기를 치려거든 제대로 해야지.”

하얀 종이가 펄럭 날다가 바닥에 힘없이 가라앉았다.

이런. 라크시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명함 케이스를 탁 닫았다. 조수처럼 내내 라크시스 곁에 서 있던 시아는 존 베버의 행동에 움찔 놀랐다.

존 베버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았나? 하지만 노예 밀무역상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건대, 마법은 제대로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얼굴로 존 베버는 백지장 같던 낯을 구기며 빈정거렸다.

“그 녀석들은 우리가 찾아가기 전까지 절대로 먼저 나타나지 않아. 제기랄, 어쩐지 계속 풀어주지 않더라니. 어떤 새끼가 배신하고 마법사를 부른 거야.”

존 베버는 시뻘건 눈알을 연신 굴리며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애초에 맨덜랜드 경찰에선 유령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유령선의 실체를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황혼 국교회가 줄곧 해온 ‘거래’에 대해선 알고 있었고 심지어 지금껏 눈감아주기까지 했다.

살인을 저지른 자의 입에서 ‘왠지 계속 풀어주지 않더라니’와 같은 말이 나왔다는 건, 맨덜랜드 경찰이 노예 밀무역상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약속했단 뜻과도 같았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침묵 속에서 시선을 교차했다. 이윽고 라크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흐음, 하고 한숨을 쉬었다.

“미스터 존 베버, 눈치가 빠르군요. 하긴, 우리가 허술하긴 했죠.”

“다시 말하지만, 꺼져. 난 여기서 뒤진대도 할 말 없으니까.”

험악한 욕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그에, 라크시스의 입매가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제 소개를 다시 해야겠네요.”

라크시스는 철제 의자를 뒤로 밀며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 위에 달린 조명 탓에 라크시스의 그림자가 존 베버의 위로 검게 늘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백지 명함에서 불꽃이 화악― 일었다.

라크시스는 잿가루만 남은 명함을 구둣발로 천천히 밟아 건너며, 테이블을 밀어내곤 존 베버 앞에 멈춰 섰다.

존 베버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기를 부리듯, 사납게 되물었다.

“뭐, 뭐야?”

뒤이어 의미 없는 욕설이 또 한 번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크시스는 평온했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라도 들은 듯, 미동 없던 눈썹이 살짝 밀려 올라간 것뿐이었다.

“나는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의 보험사정관…입니다. 미스터 존 베버.”

이름을 대는 부분에서 라크시스는 말을 흐렸다. 그러곤 시아를 잠시 돌아보았다.

‘잠시 피해 있어요.’

라크시스의 속삭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큭!”

순식간이었다. 존 베버가 앉아있던 철제 간이의자가 뒤로 주욱 밀려난 건.

라크시스가 지팡이를 소환해 존 베버의 가슴을 짓눌러 민 탓이었다.

바닥의 타일이 긁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존 베버는 수갑으로 묶인 의자와 함께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이 자식이! 감히 날 쳐? 뒤지려고 작정했나!”

발악하는 존 베버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라크시스의 지팡이가 창처럼 다리 사이에 내리꽂혔다. 타일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지팡이는 철퇴라도 되는 것처럼 취조실 바닥을 으스러뜨리고 그곳에 박혀 우뚝 섰다.

‘제기랄, 저거에 잘못 맞았으면…….’

존 베버는 종이 한 장도 채 들어가지 않을 틈을 두고 제 가랑이 사이에 꽂힌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오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가 곧 다리가 미끄러졌다. 고간의 힘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바지가 축축해졌다.

존 베버는 딸꾹질을 하며, 지팡이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광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전신을 지배한다. 오싹했다. 인간이 감히 들여다봐선 안 되는 힘을 가진, 상식을 초월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똑같다. 아니, 그 녀석들보다 더하다.

노예 밀무역을 해보지 않겠냐며 제게 접근했던 보험사 놈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무서운 놈이다.

이 남자는 분명 사기꾼인데… 백지를 내밀며 자신을 보험사정관이라고 소개한 이 남자는 사기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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