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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5)화 (215/292)
  • 215화 

    【 실마리의 발견 】

    느긋하게 카페를 떠난 시아와 라크시스는 맨덜랜드 서부 경찰서로 향했다.

    “자, 마지막으로 이걸 껴요.”

    “웬 안경이에요?”

    “당신을 신문팔이 소년에서 보험사정관의 조수로 승급시켜 줄 물건이죠.”

    라크시스가 건넨 건 도수 없는 렌즈가 끼워진 안경이었다. 칠십 년 후의 것에 비하면 투박한 디자인이었는데, 그 탓에 오히려 마도 시대의 물건으로 보였다.

    “언제는 하인처럼 보일 거라면서.”

    “하인처럼 보이기엔 너무 차려입었어요.”

    언뜻 보기에도 키 차이가 제법 나는 두 사람은 이제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보였다. 시아가 슈트를 입은 탓도 있었지만, 거리를 걷는 내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크시스가 놀라운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듯 시아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사실 당신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숨기고 싶었던 거라면… 그 말은 믿어줄 건가요?”

    은근한 웃음이 따라붙는다. 시아는 멈춰서서 홱 고개를 돌렸다. 농담 반, 진담 반. 예전이었다면 그가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됐어요. 얼른 앞장서기나 해요.”

    시아는 새빨개져선 라크시스를 앞질러 갔다. 앞장서라고 했으면서도 몸이 제멋대로 도망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손발이 함께 나가는 어색한 걸음을 지켜보던 라크시스가 모자 밑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분부대로.”

    라크시스의 긴 다리로 시아를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결국 시아는 라크시스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부끄러워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다, 그 길이 아니라는 라크시스의 부름에 멋쩍게 돌아 나오길 서너 번. 덕분에 라크시스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십여 분을 시아와 함께 더 걸을 수 있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항구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맨덜랜드 서부 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근처 골목에서 피어오르는 궐련 연기에, 서에서 쫓겨나 애꿎은 가로등에 발길질하는 기자들까지. 경찰서의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북적였다.

    라크시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벌써부터 시끄러운 것 같군요.”

    “의외네요. 조용할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당신의 추측 중 절반은 틀린 것 같군요. 지금 모여있는 건 기자들이에요.”

    시아는 당황했다. 언론과 경찰이 모두 황혼 국교회에 장악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맨덜랜드 전체가 존 베버의 사건을 조용히 묻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다들 수상한 냄새를 맡고 모인 거죠.”

    온갖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맨덜랜드지만, 이렇게 살인마가 검거되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또 다르다.

    분위기를 보건대 원래 경찰은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만 부둣가의 살인사건을 감추고 싶어 했던 듯했다.

    “젠장할. 대체 데이먼 포드 그놈은 어떻게 경찰과 만난 거야?”

    “‘더 맨덜랜드’만 좋은 일이지. 편집장에게 또 한 소리 듣게 생겼군.”

    갱단 못지않은 살벌한 위협이 이 자리에 없는 데이먼 포드를 향했다. 이런 협박을 듣는다면 분명 제 명에 못 살 거다.

    괴담 수집가 특유의 무모함과 호기심, 추진력으로 무장한 데이먼 포드는 기자로서의 재능 또한 남다른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대체 어떻게 정보를 캐낸 걸까. 그것도 경찰에게서 말이다.

    “데이먼 포드는 당분간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와선 안 되겠네요.”

    “카메라와 타자기에 맞아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경찰서 문이 벌컥 열리고, 거친 수염을 가진 경찰이 당장 꺼지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허탕 친 기자들은 닫힌 문을 향해 저마다 욕을 내뱉곤 하나둘 자리를 떴다.

    시아는 타이 매듭을 제자리로 돌리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렇다면 경찰은 유령선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단 말이겠네요.”

    “옛날부터 경찰은 본인들의 무능함을 숨기고 싶어 했어요.”

    묘하게 빈정대는 뉘앙스였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되물었다.

    “어젠 경찰을 믿는다면서요.”

    “없는 것보단 낫다고 했죠.”

    라크시스는 경찰이 자잘한 치안 문제에 있어선 대체로 만족스러운 행보를 보여주지만, 간혹가다 벌어지는 사건들에 있어서는 방어적으로 군다고 했다.

    예컨대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경찰의 일원인 것으로 밝혀졌던 재키 레이븐 사건처럼 그들의 치부와 허점이 드러날 만한 사건에선 대중의 시선과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든가 하는 것 등 말이다.

    “이들이 계속 기자들의 접촉을 피한다면 얼마 안 가 의심을 사겠죠. 그때가 되면 이 낡은 건물에 숨는 것만으로 성난 기자들을 막을 수 없겠지만요.”

    라크시스가 미간을 잠시 찡그렸다 도로 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모두를 그럴듯하게 속여넘기기엔 보험사정관과 조수만 한 설정이 없겠군요.”

    업무차 조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 방문하게 된 사람처럼 연기하면 그만이란다.

    애초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보험사정관만큼 경찰에게 협조를 구할 만한 직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경찰이 황혼 국교회와 관련이 있어 의심을 하게 되더라도 라크시스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간략한 설명에 시아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라크시스에게선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마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만일을 대비한 퇴로도 있겠고.

    라크시스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시아의 마음을 한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럼 가실까요. 나의 조수님.”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얼마나 달콤하고 낯간지러운지.

    “라크!”

    시아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 *

    라크시스의 예상대로 보험사정관과 그의 조수의 경찰서 진입은 수월했다.

    “무슨 일로 온 거요? 민원이라면 처리하는 데 오래 걸려요. 보시다시피 지금 대거리하는 놈들이 워낙 많아서.”

    “압니다. 저는 미스터 존 베버의 사건을 조사하러 온 보험사정관 알버트 조지 랑케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조수 토머슨 에반스, 의학 박사죠.”

    의학 박사라고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팔에 바짝 붙어 그의 소매를 꼬집어 당겼다. 탐정이나 보험사 직원은 현실성이 없기라도 하지, 의학 박사라니. 시아는 괜히 제풀에 놀라고 말았다.

    라크시스를 상대하게 된 경찰은 아까 기자들을 서 밖으로 쫓아내던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악명높은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제복이 없었다면 갱단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친 인상이었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험조사관과 그 조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 참. 아직 수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오신 겁니까? 하긴 실랑 한 푼이라도 칼같이 계산하는 게 그쪽 일이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명함을 드리지 않았군요.”

    라크시스는 상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달칵, 하며 열린 케이스 안엔 글씨라곤 하나도 적혀 있지 않은 빳빳한 흰 종이가 가득 들어있었다. 명함 크기로 잘려있을 뿐, 알버트니 토머슨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가명조차 적혀 있지 않은 백지에 시아가 당황해 있을 때였다.

    라크시스가 명함을 건네는 순간, 명함의 끄트머리를 쥔 경찰이 그대로 굳었다. 고개는 라크시스를 향해 있으나 눈동자는 안개 낀 밤처럼 흐릿하다.

    백지 명함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라크시스는 잠시 놀랍다는 눈을 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젠 오해가 좀 풀리셨는지.”

    풀려있던 동공이 다시금 선명하게 오므라든다. 정지된 테이프를 재생시킨 것처럼 경찰이 부르르 고개를 떨다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아, 그렇군요. 편지에 대해 답이 오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신실하며 정의로우신 수호자께선 제국을 위해 일하는 자들의 목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계시죠.”

    신실하며 정의로운 수호자란 황제를 달리 부르는 말 중 하나였다.

    시아가 미간을 좁혔다. 보아하니 눈앞의 경찰이 황제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던 모양인데…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소매를 살며시 당겼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우리를 푸른 훈장의 기사라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오로지 황제에게 소속된 비밀정보국이죠. 속된 말로 황제의 개, 라고나 할까요.”

    시아는 라크시스가 벌인 대담한 거짓말에 경악했다.

    푸른 훈장의 기사. 황실이 권력에서 완전히 손을 뗀 칠십 년 후엔 제국의 비밀정보국으로 이용되는 기관이었다. 서대륙과의 전쟁이 한창인 미래에 제국을 감시하고, 서대륙에 첩보원을 보내는 그런 기관 말이다.

    “시아. 푸른 훈장의 기사의 존재를 알고 있군요?”

    “…제가 아는 것과 라크가 아는 건 다르겠지만요.”

    분명 보험사정관과 조수인 척하기로 하지 않았나? 어쩌다 사기의 규모가 이 정도로 커지게 된 걸까.

    그러나 놀랍게도 당장에라도 두 사람을 쫓아낼 것처럼 굴던 경찰은 그들의 정체를 듣자마자 고분고분 안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외부인을 왜 들이냐며 따져 묻던 다른 경찰들도 모두 쫓아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핀리 스미스 경감님.”

    그러고 보니 핀리 스미스라는 사람은 본인의 이름을 알려준 적도 없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뒤를 쫓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앞서가는 라크시스의 등을 쿡 찌르며 따라잡았다.

    시아는 라크시스와 나란히 걸으며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입술을 붙이고 조용히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이죠.”

    살살 눈웃음치며 대답하는 게 얄밉다. 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핀리 스미스가 라크시스의 마법에 걸린 건 마법사가 아닌 자신이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궁금했던 건 대체 어떤 마법을 썼길래 적대적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온순해지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던 정보까지 라크시스에게 전달됐냐는 거였다.

    “남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건데, 그리 유쾌한 마법은 아닙니다. 필요한 기억을 정확히 찾아내고, 특정 부분의 기억만을 왜곡시키는 건 굉장히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죠.”

    묻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술술 분다. 시아는 라크시스가 그녀의 관심을 사로잡아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랑이 섞여 살짝 재수 없는 태도는 덤이다. 마치 그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만약 이런 마법을 즐겨 쓰는 자가 있다면 상당한 실력자인데다가, 굉장한 변태일 겁니다.”

    시아가 피식거렸다.

    “대공처럼요?”

    결국 라크시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주 작고 가벼운데다, 손으로 가리기만 해도 들리지 않을 수준의 웃음이었지만 그건 진심으로 고소하다는 웃음이었다.

    “이 마법이라면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맨틀러 교수도 쫓아낼 수 있을 텐데, 배워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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