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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4)화 (214/292)
  • 214화 

    시아는 물었다.

    “맨덜랜드의 유령선 이야기가 모르간에 있던 제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면… 노예 밀무역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단 뜻 아닐까요?”

    그러니 존 베버가 노예 무역상이란 내용이 기사에서 빠졌을 것이란 뜻이었다. 시아는 경찰이 부패하여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데에 한 표를 던졌다.

    “그렇지만 단순히 기사만 놓고 보면 아직까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죠. 맨덜랜드 경찰이 진상을 단번에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그간 노예 밀무역이 수면 밑에서 이어져 왔을 수도 있단 겁니다.”

    라크시스는 손가락으로 신문 첫 면에서 가장 굵은 제목을 짚었다.

    “헤드라인에 힌트가 나와 있죠. [존 베버는 무엇을 도둑맞았기에 칼을 휘둘렀나.]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아직 경찰도 기자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라크는 경찰을 믿나요?”

    “그들이 없던 때보단 확실히 치안이 좋아졌으니까요. 몸소 느껴본 바로는 믿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공권력에 대한 신뢰도를 따지면 저보다 더 경찰을 믿을 것 같은 시아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라크시스는 그녀를 떠보듯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칠십 년 후엔 다른가 보죠?”

    어쨌든 그녀는 종말이 이미 벌어진 후의 시대에서 왔으니까.

    심지어 시아는 한창 전쟁을 겪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그것도 전투기가 해안가에 폭격을 퍼붓고, 무고한 시민까지 유독가스로 몰살시키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 말이다.

    몰락한 제국이 다시금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에 칠십 년이란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여러 형태의 전쟁과 패망을 지켜봐 왔던 라크시스는 제 물음에 시아가 상처라도 받을까 걱정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시아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미라가 된 가멜인과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는 모두 황혼 국교회와 관련이 있잖아요.”

    “네.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죠.”

    “벤슨 경감님이 그러셨잖아요. 여동생인 미스 달리아 벤슨을 잃은 후 이단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상부에 의해 가로막혔다고요. 게다가 좌천까지 당해 뤼스로 쫓겨나셨죠.”

    시아는 불편한 진실을 고발하는 사람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경찰 내부를, 그것도 고위 간부진을 황혼 국교회가 장악하지 않았다면 경찰청 창설 때부터 일해 온 경찰을 그렇게 내팽개칠 수도 없죠. 달리 말하면 이미 경찰도 이단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거고요.”

    “일리 있는 지적이군요.”

    국교회가 카얄에게 장악되어 버린 것처럼 경찰 조직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거스 벤슨 한 명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하여 나락으로 떨어뜨릴 여력이 있을 정도라면, 경찰 내부에 황혼 국교회의 눈과 귀가 그만큼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를 시작해야겠네요.”

    “조사요?”

    “우선 존 베버라는 남자를 만나봐야죠. 그에게 황혼 국교회와의 접점이 있을 테니까요.”

    경찰서에 가보자는 뜻이었다.

    시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습니까?”

    “아뇨, 그냥. 경찰서에 가자는 말이 이젠 아무렇지 않게 들려서요.”

    마도 시대에 떨어진 이후, 경찰서를 워낙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메이슨 비렌체와 재키 레이븐 때문에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살다시피 한두 번째 시간 여행부터 거스 벤슨에게 연행되다시피 끌려간 뤼스 경찰서까지.

    ‘레이디’ 시아 켈튼의 기이한 행보를 되짚어보던 라크시스도 결국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긴, 무도회보다 경찰서를 더 자주 드나드는 숙녀는 당신 말고 없겠죠.”

    라크시스는 신문을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어느새 찻주전자도 거의 비어 있었다.

    대낮의 맨덜랜드 시내도 아르카나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빼곡한 공장의 굴뚝이 보이지 않고, 주택들의 간격이 살짝 넓어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시간에도 한산한 느낌이 든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소금기를 실은 바람이 테라스까지 밀려드는 것 같다.

    지평선을 따라 파란 선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늘인 줄 알았던 것은 다름 아닌 맨덜랜드의 바다였다.

    시아는 경치를 감상하다 라크시스를 돌아보며 턱을 괴었다.

    “접점이 있다곤 해도… 존 베버가 우리에게 쉽게 입을 열까요?”

    “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라크시스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기지개 켜듯 상체를 쭉 세웠다. 시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라크시스를 흘겨보았다.

    라크시스의 눈매가 덩달아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시아. 이래 봬도 전 준법정신이 철저한 사람이에요.”

    “…….”

    “신뢰를 잃은 기분이 이리도 비참할 줄이야.”

    라크시스는 눈매를 축 늘어뜨리며 서글픈 시늉을 했다.

    시아가 더듬더듬 항변했다.

    “라크를 못 믿는다는 건 아니고요…….”

    워낙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을 들고나오니까 그렇지.

    지하 미궁 자물쇠를 척척 따질 않나 지팡이로 사람도 기절시키고, 공간이동 마법으로 경찰서 장부를 몰래 가져오기도 하고…….

    면책 특권에 특별 수사 허가권? 말 그대로 사기였다.

    솔직히 황제의 직인이 찍힌 이 두 장의 문서만 있다면 제국에서 합법적으로 저지르지 못할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면책 특권과 특별 수사 허가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라크시스 옌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지금까지의 라크시스를 생각해 본다면 황제가 왜 그런 권리를 그에게 주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크시스 옌은 고지식한 귀족의 표본을 보여주면서도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는 것에 생각보다 관대했다. 시아가 그러는 것도, 라크시스 자신이 그러는 것도.

    그러나 그는 절대로 선은 넘지 않았다. 인륜의 문제든 그 밖의 문제든.

    한때 사람의 목숨을 종이보다 가볍게 여겼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가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되었던 것일 뿐, 결코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진 않았다.

    “당신의 믿음을 위해 최대한 절차를 지키고 싶긴 한데, 여기서 절차를 지켰다간 평범한 민원인밖에 되지 못할 것 같고…….”

    라크시스는 어느새 시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썼나. 그가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귓가에서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났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체온과 숨결의 열기에 시아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팔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 싶더니, 그의 손에 그녀의 재킷이 들려 있었다.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 셔츠 너머로 어깨에 부드러운 천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목 끝까지 단추가 잠기고 한결 묵직한 코트가 시아의 등을 감쌌다.

    신사들의 일상복이라 불리는 라운지 슈트였다. 일부러 그녀가 입고 있던 바지와 색깔을 맞춰 준비한 듯했다.

    시아는 제 머리를 더듬다가 모자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멍하니 손을 내렸다.

    한결 봉긋하고 탄탄해진 모양을 둘러싸고 챙이 빙 둘려 있었다. 중절모였다.

    “저와 잠시 어울려 주신다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이게 다 뭐예요?”

    “보험사정관과 그의 조수 설정이죠.”

    시아는 베스트의 단추가 잠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흠칫했다.

    마법으로 잠근 건가. 마법 대신 손가락이 닿았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다 시아는 제풀에 놀라 새빨개졌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이런 옷으로 주지 그랬어요.”

    “아, 신문팔이 소년보단 신사가 낫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겠다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라크가 번거로웠잖아요. 드레스도 아니고, 이 정도는 혼자 입을 수 있는데요.”

    “혹시 내가 당신에게 가까이 가는 게 싫은 거라면…….”

    “…이 정도는 이제 ‘가까이’의 축에도 못 들걸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절대 밀어내지 않는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 만족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시아는 그가 다가가는 걸 기꺼워했다.

    손과 손이 맞닿는 것도,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감기는 것도. 서로의 코끝이 맞닿는 것도, 숨결이 섞이는 것도.

    어젯밤의 열기가 아직까지도 뺨에 남아있는 것 같아 정신이 몽롱하게 들뜨고 있었다.

    “그렇군요.”

    라크시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일부러 번거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고… 뭐랄까, 처음엔 당신이 칠십 년 후에 입고 다니던 자유분방한 차림과 최대한 닮은 걸 골라준 거죠.”

    “자유분방하다니…….”

    “고대엔 남녀 가릴 것 없이 튜닉 한 장으로 옷이 해결되었으니 당신 차림을 자유분방하다고만 할 순 없지만요.”

    라크시스의 말에 의하면 시아가 원래 시대에서 입고 온 옷은 노동계급, 그것도 아주 경박한 노동계급의 차림으로 보인다고 했다.

    형태가 마도 시대의 유행과 다른 건 둘째 치고, 재킷도 베스트도 없이 셔츠 위에 곧바로 카디건을 두르고 코트를 걸친 데다가(이것이 흔히 숙녀들이 입는 복장이 아니라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스타킹도 없이 부츠를 신은 게 이 시대의 의복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거다.

    라크시스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요크 부인도 생각보다 관대한 사람이었네요.”

    “요크 부인이요?”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소리라는 얼굴이다.

    “당신에겐 잔소리를 하지 않았잖아요. 요르문의 말론 그저 웃으며 드레스를 내어주었다 하던데.”

    수상한 사기꾼이자 마류 이상 현상의 원인인 시아 켈튼을 처음 만났던 날. 라크시스는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참석 문제로 시아 켈튼을 지켜보지 못하고 요르문에게 그녀를 맡기고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달받은 바 있었다.

    독신으로 살다 늙어 죽을 주인이 여자를 데려와서 집사 헤이든과 요크 부인이 신이 났다는 것도 생생히 전해 들었다.

    그 깐깐한 요크 부인이 요르문 켈튼의 친척 누님이라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친히 속아 넘어가 주면서 시아를 애지중지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내가 당신처럼 입고 켈튼 저를 활보했다면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라크야…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죠.”

    시아는 라크시스가 칠십 년 후의 옷차림을 한 걸 상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뭘 입어도 옷이 얼굴 덕을 볼 것처럼 생겼으니 어울리지 않을 옷은 딱히 없겠다마는.

    ‘신사가 아닌 라크시스 옌이라니.’

    문득 그가 칠십 년을 기다려 자신을 만나러 온 순간을 상상해 봤다.

    다른 풍경은 모두 세월 속에 모습이 바뀌었는데, 프록코트에 실크햇, 꼭 맞게 묶은 타이와 지팡이가 없는 라크시스는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다.

    “그건 당신이 요크 부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런 겁니다.”

    대신 차별적인 대우에 삐진 어린아이처럼 살짝 입술을 내보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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