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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3)화 (213/292)
  • 213화 

    * * *

    아침이 밝았다.

    똑똑.

    어렴풋이 들리는 노크 소리에 정신이 얄팍하게 깨어났다. 거위 털을 풍성하게 집어넣어 푹신한 이불. 시아는 그 속에서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눈을 떴다.

    “객실 청소하겠습니다.”

    벽 너머에서 문고리가 돌아간다. 뒤이어 트롤리가 마루를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팡팡.

    커튼이 젖혀지며 빗자루가 분주히 움직이고, 새 이불이 깔린다.

    밤새 커튼조차 제대로 닫지 않았던 시아의 방엔 정오의 햇살이 쨍하니 비쳐들었다. 시아는 멍하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댄 후 생각에 잠겼다.

    ‘벌써부터 청소를 하나…….’

    안개처럼 흐릿하던 청소 소리가 가까워진다.

    똑똑. 달그락, 슥슥, 팡팡.

    수많은 객실을 거쳐온 트롤리가 마침내 시아의 방 앞에 멈춰 섰다.

    생각 없이 가구와 벽지 무늬를 훑던 시아의 시선이 고풍스러운 괘종시계에 머물렀다. 동시에 정각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분침이 12를 짤깍 가리켰다.

    ‘열두 시잖아!’

    늦잠 잤다. 그것도 엄청.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과 함께 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자신이 맨몸에 가운 하나만 덜렁 걸친 채로 잠들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앞을 여몄다.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 문 열지 말아주세요!”

    시아의 절실한 외침을 들었는지 다행히도 객실 메이드는 문을 열지 않았다. 뜸조차 들이지 않고 시아의 방을 건너뛰어서는 다음 객실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후. 겨우 살았네.

    시아는 대강 세수를 하고 옷을 걸쳤다. 야무지게 멜빵을 메고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뉴지 캡 안에 숨겼다. 완성된 차림의 시아는 영락없는 신문 배달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맨덜랜드의 부둣가를 돌아다니기엔 이런 차림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젯밤 라크시스는 평범한 외출용 드레스를 선물했으나 시아는 이를 거절했다. 여행 가는 귀부인들처럼 하녀를 대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라크시스가 평범하다며 건넨 드레스는 누가 봐도 돈이 남아도는 사람의 사치품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린 위험한 도시에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요. 누군가의 저택에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뒷골목의 조무래기들은 오히려 값비싼 드레스를 피하죠.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큰일 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시아가 이겼다. 애초에 시아 켈튼은 라크시스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선물한 드레스를 나중에 입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놓고도 한참 동안 불만이었던 라크시스는 멜빵 바지 차림의 시아를 보곤 뜻밖에 만족스러운 기분을 내비쳤다.

    ‘의외로 반응이 싱겁네요? 전 라크가 분명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제가 당신에게 어떻게 잔소리를 하겠어요. 그보다… 그런 남장도 귀엽네요.’

    ‘네?’

    ‘잘 어울린다고요. 뭘 입어도.’

    시아는 헐레벌떡 방을 나섰다. 투숙객들은 진작 외출했을 시간이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진작부터 한산했던 복도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아으, 늦었네. 다들 어디 있으려나.”

    “글쎄요. 아침 일찍 일어난 다른 신문팔이에게서 신문을 사서는 각자의 일터로 떠나지 않았을까요?”

    고막을 잡아끄는 미성이 장난스레 대꾸한다.

    시아는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라크!”

    “잘 잤어요? 잠꾸러기 숙녀분.”

    오늘도 어김없이 완벽하게 성장한 신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있다가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시아를 발견하자마자 라크시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깨우지 그랬어요. 아침에 만나자고 했는데, 벌써 정오가 넘어버렸잖아요.”

    라크시스는 차마 시아를 깨우러 몇 번이고 그녀의 방 앞을 서성였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정작 어제의 키스로 한숨도 못 잔 건 이쪽인데,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몰골로 있는 건 시아였다.

    “일찍 일어나봤자 지루한 일뿐이었을 거예요.”

    “요르문은요?”

    “파장 탐지기를 손보러 갔어요. 간밤에 고양이가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몇 개가 꺼졌다더군요.”

    루드윅도 요르문을 따라나섰다고 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맨덜랜드 구경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당신을 기다리는 소식들이 있는데… 우선 식사부터 할까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이끌고 거리로 나왔다. 곧바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달라붙는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척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신사의 맞은편에 앉은 게 약혼녀나 같은 신사가 아닌, 지금 시간이라면 일터에 있어야 할 것 같이 생긴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분장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허술하긴 하죠. 어느 신문팔이가 당신처럼 예쁘겠어요.”

    라크시스는 이제 눈도 깜짝 안 하고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아마 내 하인 정도로 착각하겠죠. 하인을 이런 식당에 데려오는 주인이 없으니 문제겠지만.”

    예약해 둔 음식이 차례대로 나왔다.

    다무스식 수프로 구성된 가벼운 전채부터 이틀을 꼬박 숙성시켜 소스를 발라 구운 송아지 스테이크에 홍차 잎을 이용해 풍미를 낸 푸딩까지.

    식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라크시스와 시아의 테이블에 은쟁반을 나르던 종업원은 어느새 신사 쪽을 남색가인 걸로 결론내렸다.

    조수인지 하인인지 알 길이 없는 소년의 미모가 어지간한 여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쁘장했기 때문이다.

    시아가 마지막으로 한 입 남은 푸딩을 싹 긁어 입에 넣었을 때였다.

    “아쉽네요.”

    “뭐가요?”

    라크시스는 진작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푸딩을 살짝 훔쳐냈다.

    “신문팔이 소년에게 키스하는 신사는 없을 테니까요.”

    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 어제 자신이 저질러 버린 짓 때문이다.

    라크시스는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고지식한 신사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진작 그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몰랐다.

    다시금 거리로 나와 이번엔 한적한 카페로 들어섰다.

    라크시스는 맨덜랜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종업원을 불렀다.

    “레이디 마거릿으로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메뉴판을 치우는 종업원의 시선이 묘한 게, 이번에도 두 사람을 이상한 관계로 오해한 듯했다.

    시아는 차를 홀짝이며 라크시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까부터 이유 모를 위화감이 그녀의 소맷부리를 자꾸만 잡아당기고 있었다.

    카페의 손님들도 시아와 라크시스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을 뿐,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마침내 이유를 깨달았다.

    “라크. 혹시 지금 마법을 쓰고 있어요?”

    “눈썰미가 좋군요. 탐정하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네요.”

    라크시스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맨덜랜드에 온 이래 라크시스를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국 유일의 은발을 보면 단번에 정체를 눈치챌 텐데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고대 마법사를 알아채지 못했다.

    “빛을 왜곡시키는 마법이에요. 얼굴까지 다르게 보이는 건 아니고, 은발을 그저 흔한 머리 색으로 보이게만 하는 정도지만요.”

    “제겐 은발이 그대로 보이는데요?”

    “당신에게 마법을 쓰려면 이젠 이 정도론 어림없어요. 수식을 창조하고 진심으로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 한걸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었다. 라크시스는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의 설명을 거부했다.

    시간 여행자에겐 마법이 잘 안 통하기라도 하나?

    그렇지만 그런 것치곤 시아는 지금까지 라크시스에게 꽤 여러 번 치유술을 받았다. 심지어 효과도 확실했다.

    시아는 캐묻길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저한테 전해 줄 소식이 있다면서요.”

    “아, 그랬죠.”

    라크시스는 잊고 있던 걸 깨달은 사람처럼 새삼스럽게 눈썹을 밀어 올리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당신에게 전해 줄 소식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데이먼 포드가 유령선 사건에 새롭게 알아낸 것이 있다며 우리더러 만나자고 했다는 거고.”

    그놈의 괴담 수집가……. 정말이지 쉬지 않고 유령선의 뒤를 캐낸다. 유령선에 올라탄 이후, 몸을 사린다며 더는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또 이런다고?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다 데이먼 포드가 정말로 황혼 국교회의 표적이 되지 않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요?”

    “여기. 오늘 자 「더 맨덜랜드」예요.”

    라크시스는 품에서 두툼하게 접힌 신문 한 부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만한 부피의 신문이 티도 안 나는 상태로 코트 속에 있을 순 없다. 시아는 새삼스럽게 라크시스의 코트 안주머니에 걸린 마법을 상기했다.

    슈트 케이스보단 주머니에 공간 왜곡 마법을 거는 게 여러모로 유용한 것 같네.

    살짝 탐이 났다.

    “한번 읽어볼래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라크시스가 가리킨 건 신문 첫 면에 등장한 헤드라인이었다.

    [사상 최악의 흉기 난동 사건 - 존 베버는 무엇을 도둑맞았기에 칼을 휘둘렀나?]

    헤드라인 밑에는 조그맣게 ‘데이먼 포드’라는 기사 작성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아가 멍하니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이것도요?”

    “이것도요.”

    라크시스가 조용히 긍정의 대답을 했다.

    간밤에 부둣가 근처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져 여덟 명이 다치고 총 다섯 명이 죽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범인은 가멜과 맨덜랜드를 오가는 무역선의 선장인 존 베버였고, 그는 귀중한 물건을 도둑맞아 홧김에 칼을 휘둘렀다고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피해자는 모두 존 베버처럼 가멜과 맨덜랜드를 오가며 무역선을 몰던 선장들이었다.

    “아…….”

    “죄책감 갖지 말아요. 존 베버에게 죽은 자들은 모두 그처럼 황혼 국교회의 범죄에 동참했던 노예 밀무역상이었어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속내를 읽어낸 듯 단칼에 정적을 끊어냈다.

    시아는 움찔 놀랐다. 자신들이 황혼 국교회를 조사한다고 맨덜랜드를 들쑤시는 바람에 애먼 사람들이 죽었던 걸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시간 여행을 해오면서 시아는 나비의 자그마한 날갯짓이 거대한 폭풍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그녀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할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 목숨을 함부로 사고판 죗값을 치른 거라 생각해요. 그러면 덜 괴로울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결 낫긴 하네요.”

    신문엔 죽은 사람과 존 베버가 노예 밀무역상이란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노예밀매가 워낙 성행해 왔던 탓에 경찰과 신문사까지 부패하여 한마음으로 노예밀매를 쉬쉬하고 있거나, 아니면 맨덜랜드 경찰이 정말로 무능하고 정직한 집단이라 지금껏 노예밀매 현장을 검거하지 못했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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