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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2)화 (212/292)

212화 

“푹 자고 내일 질문해도 대답해 드릴 수 있어요. 지금은 당신이 쉬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궁금한걸요? 내일이 되면 뭘 물어보려고 했는지 까먹을 것 같단 말이에요.”

갈리프의 기억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진작 질문했을 내용이었다. 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곤 볼을 살짝 부풀리며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라크시스는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한 시아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슬며시 미소 지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건 그나 시아나 똑같았으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와 닮은 구석을 찾으려 들다니. 자신도 꽤나 중증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자, 레이디. 말씀하세요. 무엇이 그리 궁금하신지?”

“아까 요르문이 그랬잖아요. 이 성녀상은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없다고요.”

“그랬죠.”

“그럼 로드 젤마니는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거예요? 설마 하루 만에 황혼 국교회에 잠입하기라도 한 건가요?”

라크시스의 대답 대신 이번엔 요르문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응을 보건대, 루드윅이 성녀상을 손에 넣게 된 경로를 설명하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건 제가 대답해 드릴게요, 누님. 훔쳤다더라고요. 그렇게 취해서 돌아왔으면서 필요한 건 다 가져왔어요. 정보든 단서든 말예요.”

시아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루드윅이 무언가를 도둑질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덩치는 곰처럼 커서 투박하고 순한 인상으로 말이야, 괴담만 들으면 선물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남자가 연기로 정보를 빼내고 손기술까지 발휘했다고?

“전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누님, 그래서 말인데요.”

요르문은 성녀상을 체스 말처럼 미끄러뜨려 테이블 한가운데에 탁 내려놓았다.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하는 거예요. 성녀상을 잃어버린 자는 분명 도둑을 찾으러 다니겠죠. 성녀상이 없으면 항해 중 죽은 가멜인들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잖아요?”

요르문이 덧붙였다.

“우린 바로 그자를 찾는 거예요. 그자의 뒤를 밟으면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의 보험사정관도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루드윅이 가져온 뜻밖의 기회는 상황을 상상 이상으로 수월하게 만들어 냈다.

부둣가에 어스름이 내려앉을 즈음, 요르문과 라크시스가 뒷골목을 기웃거렸지만, 척 봐도 외지인에 귀족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노예상들은 수도에서 내려온 위장 조사관처럼 보이는 요르문과 라크시스를 철저하게 배척했고, 거기다 누군가가 요르문을 낮에 시청을 들쑤신 사람이라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쫓겨나다시피 펍에서 나와야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루드윅을 받아주길 잘한 것 같네요. 처음엔 연락도 없이 맨덜랜드까지 쫓아와서 기겁했는데 말이죠.”

루드윅은 펍에서 쫓겨나는 요르문과 라크시스를 보며 자신에게 맡겨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괴담 수집하던 실력을 톡톡히 보여주겠다면서, 딴 건 몰라도 현지인으로 위장하는 것 하나만큼은 두 대마법사보다 뛰어날 거라고 자신만만했다는 거다.

“어쨌든, 내일 다시 펍에 가보기로 해요. 노예상은 아마도 펍에 다시 찾아올 거예요. 성녀상을 잃어버린 장소니까요.”

뎅―

어렴풋한 밤공기를 타고 자정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은 시계탑과 광장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맨덜랜드 시청 앞에 세워진 오래된 시계탑에서 울림이 번져나간다. 어느새 장작을 거의 다 태운 난롯불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일단 주무시러 가세요, 누님.”

요르문의 말에 시아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애초에 늦게 오셨다니까요. 저만 두고 말이죠.”

요르문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내일도 이 방으로 오시면 돼요. 다 같이 모일 장소로 쓰려고 잡아둔 방이니까요.”

이럴 때마다 이들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머릿수대로 객실을 잡고 객식구처럼 들러붙은 루드윅 젤마니의 숙소도 챙기면서 응접실 용도로 쓸 방까지 따로 잡다니.

라크시스의 그레이트 로얄 호텔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맨덜랜드에서 꽤 고급 호텔에 속할 터다. 이런 호텔에서 다섯 개의 객실을 한 번에 잡는 건 의술사의 월급으론 차마 엄두도 못 낼 짓이었다.

“그럼 전 먼저 갈게요. 편히 주무세요, 누님.”

일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간지러운 분위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에 요르문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젠 시아와 라크시스가 단둘이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사이에 끼는 게 죽어도 싫다는 급한 발걸음이었다.

타닥. 타닥.

불이 튀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장작이 빨간 열기를 품고 재로 변했다. 시계탑의 종소리도 끝이 났다. 요르문도 루드윅도 없는 객실은 고요하니 한기가 돌았다.

라크시스와 단둘이 남겨진 시아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에 구두 코로 애꿎은 카펫만 비비고 있었다. 아까 전 한바탕 요란하게 제 마음을 들여다본 탓이다.

“…우리도 갈까요?”

“데려다줄게요. 시아.”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크시스를 따라나섰다. 라크시스는 별달리 에스코트를 자처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두고 객실 메이드와 풋맨도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이다. 복도는 적막했다. 창밖 풍경도 가로등만 점점이 거리를 수놓을 뿐, 아르카나와는 다르게 어두웠다.

카펫에 묻힌 시아와 라크시스의 발소리만이 자국처럼 고요히 남았다. 반걸음을 뒤서거니 하며 라크시스와 함께 걷는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의식하게 된다. 물론 혼자 의식하고 혼자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시아는 제게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그의 눈꺼풀을 따라 위아래로 왕복한다. 일부러 빚어내지 않고서야 저렇게 완벽하게 조화로울 수 없는 옆선을 따라 혈색 도는 입술에 시선이 머무른다.

시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라크시스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시아는 사탕을 훔쳐먹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움찔 놀라며 그의 눈길로부터 도망쳤다.

어느덧 두 사람은 객실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당신 방이에요. 그 옆방엔 제가 있을 거고요.”

라크시스는 빙글 몸을 돌려 시아를 향했다. 언제나처럼 태연하고 우아하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잘 자요.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고요.”

“이런 고급 호텔에서 별일이야 있겠어요.”

시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라크시스를 가만히 살폈다.

그에 대한 마음으로 초조해하고 가슴 졸이던 건 오직 자신뿐이었나. 라크시스는 담백한 인사로 시아를 배웅했다.

“먼저 들어가요. 전 당신이 들어가는 걸 보고 갈 거니까.”

틈만 나면 낯간지러운 말을 해대며 그녀에게 달라붙으려 하던 남자는 어디 간 걸까. 평소의 라크시스였다면 방금처럼 단둘이 조용한 호텔 복도를 걸을 기회를 그냥 보내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크도 피곤한 거겠지.’

그녀의 하루가 길었던 만큼 라크시스의 하루도 길었을 것이다. 지금도 자신은 하품이 나오는 걸 속으로 삼키고 있는데.

하지만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발이 아교를 바른 것처럼 제자리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버렸다.

‘…미련이 남는다고.’

자신은 이 순간 뭘 하고 싶은 걸까. 라크시스 옌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걸까.

시아가 문 앞에서 머뭇거리자 라크시스가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요.”

“라크.”

“네, 말씀하세요.”

종착지가 같다면, 어차피 같은 곳에서 만날 거라면 내가 먼저 출발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요동치는 심장을 태운 마차는 자신을 이끌어줄 마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삐를 쥐는 건 나일까, 그일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난 종국에 같은 마차를 몰게 될 테니까. 마침내 결실을 맺은 사랑에 함께 도착하게 될 테니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가만히 까치발을 들었다.

“저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라크시스는 조용히 소스라쳤다.

귓바퀴에 입술이 붙을 듯 가깝다. 시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인과의 거리를 좁혀본 적 없는 남자에게 종이 한 장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한 이 거리는 낯설고도 전율적이었다.

조심스러운 마음만큼이나 보드라운 감촉이 뺨에 닿았다. 시아의 입술이었다.

라크시스는 피하지 못했다. 그가 무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첫 키스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시아의 입맞춤에 라크시스의 사고가 처음으로 정지했다. 그의 고개가 삐걱거렸다. 지금껏 자신이 얼간이라고 불렀던 무도회의 수많은 신사들처럼 말이다.

본디 구애란 신사가 하는 것이다. 꽃과 선물을 한아름 들고 찾아가선 숙녀가 마음을 허락할 때까지 절절하게 고백하는 것이 구애란 말이다.

그러나 칠십 년 후에서 찾아온 시간 여행자는 그러한 관습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가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시아는 그를 담장 안으로 끌어들였다. 다가가도 되냐고 묻기도 전에 다가왔다. 지극히 신사다우며, 언제나 관습의 정점에서만 살아왔던 남자에게는 세상이 뒤흔들리는 일이었다.

라크시스는 일 초도 채 되지 않아 떨어져 나가는 입술을 바라보다 열기 어린 자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수천 년을 살아온 고대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빛을 본 순간 그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찰나였지만 시아는 그를 그녀의 내밀한 감정 속에 잠기게 했고, 시아의 진심을 알아버린 순간 라크시스는 이미 분홍빛 해일에 휩쓸려 갔다.

아… 그 누가 이리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의 라크시스는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찰나 맛본 천국이 되새겨볼 여유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축복이 거둬진 대지처럼 뺨이 시렸다.

“해보고 싶었던 건 이거예요. 굿나잇 키스.”

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붙잡고 싶다. 그러나 자신의 계몽가는 얄궂은 진실만을 던져주고 떠나갔다.

사랑. 그 위대하고도 파멸적인 길에 자신이 발을 들였음을.

“잘 자요. 내일 봐요.”

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성급하게 닫힌 문 너머로 비명 아닌 비명 소리가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라크시스는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 분이 흐르고, 라크시스의 객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 라크시스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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