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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1)화 (211/292)

211화 

시청에 등록도 안 된,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라는 말도 안 되는 회사를 어떻게 찾아내야 하나 했더니. 이렇게 금방 꼬리를 드러낼 줄이야.

“모든 게 확실해졌군.”

잠자코 대화를 듣던 라크시스가 결론을 내렸다.

“황혼 국교회에선 노예 무역선을 통해 마력을 대신할 영혼을 모으고 있는 거야. 이 정도 수의 영혼을 주기적으로 찾는 걸 보니 카얄의 상태도 썩 좋지 않은 모양이지.”

오래전 라크시스는 카얄이 신도를 모으고 사람을 죽이려 하는 이유를 카얄의 상태 악화로 특정한 적이 있었다.

어둠이라는, 태고의 빛과 정반대의 형질을 가진 거대한 힘을 받아들였던 전적이 있는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카얄이 인간의 영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젠 예전처럼 살인을 대놓고 저지를 수가 없잖아요? 법과 수사망을 피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이런 수를 쓴 거예요.”

시아는 침울해졌다. 시간 여행을 하면 할수록 찬란하던 역사의 순간은 빛을 잃어간다.

번성했던 제국의 이면엔 추악한 그늘이 있었고, 그늘을 목격하면 할수록 시아의 심장엔 죄책감의 추가 하나씩 매달렸다.

카얄이 아니었더라도 제국의 노예 밀무역은 성행했을 것이다. 카얄이 벌인 짓도 잔인했지만, 인간이 벌인 짓은 그보다 더했다.

인간이 인간을 사고파는 짓.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으므로.

시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광룡에 희생된 사람들은 광룡을 원망했겠지만, 제국에 희생된 사람들은 무심한 신을 원망했을 것이라고.

불현듯 뇌리에 낯선 대화가 떠올랐다. 시아는 머리를 붙들며 신음을 흘렸다.

라크시스가 놀라 시아를 부축했다.

“시아, 괜찮습니까? 갑자기 왜…….”

“누님!”

걱정스레 외치는 요르문과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멀어져 갔다. 시아는 소파 팔걸이를 붙들듯 라크시스의 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낯선 기억. 황량한 들판 위엔 작고 마른 검은 머리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 내 손을 잡으렴.’

‘난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니.’

그러자 소년이 자신을 노려본다.

‘그 고운 발로 날 계단처럼 밟아 마차에 오르겠지. 보석으로 치장한 가녀린 손으로 내 뺨을 때리며 즐거워할 테고.’

심장을 뿌리째 뒤흔드는 떨림이 느껴졌다.

깨달음. 자신이 알던 세계가 뒤바뀌는 충격.

인간을 절망에 빠트리는 건 다름 아닌 같은 인간이었다.

신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별의 실체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자의 죄책감과 후회가 시아를 해일처럼 덮쳤다.

혼란스럽다.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남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훔쳐보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제멋대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제 감정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하얗게 힘줄이 섰다.

미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스스로를 비웃는 독백이 생생하게 번져나간다. 독백의 음성은 자신의 것과 같았다. 시아 켈튼과 똑같은 목소리.

‘…이건 갈리프의 기억이야.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튜닉과 샌들 차림의 사람들이 시야 가장자리에 흐릿하게 비친다.

저 멀리 실루엣만으로도 위용을 자랑하는 성은 다름 아닌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황금성이었다.

다시금 갈리프의 기억을 따라 광경이 바뀌었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일어날 힘도, 삶에 대한 미련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거적때기를 걸친 꾀죄죄한 몰골로도 소년의 얼굴은 가히 세상 제일의 미모라고 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시아는 소년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라크시스, 옌.’

벼락같은 깨달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갈리프의 기억이 풍선 터지듯 한순간에 사라지며 명화 같은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보기 좋게 살이 붙은 뺨. 깊은 눈매는 가난의 그늘이 아닌,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부러진 흔적 하나 없는 조각 같은 콧날에 넘쳐흐르는 마력을 주체할 수 없어 만월처럼 빛나는 머리카락까지…….

검은 머리 소년을 연상시킬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었으나, 시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라크시스였어.’

라크시스 옌은 갈리프가 창조한 사도가 아니었다. 그의 처음은 들판에서 죽어가던 인간이었다.

“손 이리 줘요. 오늘 꽤 무리한 모양인데… 말을 하지 그랬어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들어 난롯가에 가장 가까운 소파로 옮겼다. 가뿐하게 들어 깃털처럼 내려놓곤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곤 창백해진 그녀의 손마디에 제 손가락을 성급히 얽었다.

평소였다면 부끄러워하며 귀여운 반응을 보였을 그녀가 혼이 나간 것처럼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그러자 더욱 걱정이 됐다. 지금의 시아는 라크시스가 안아 들어도 모를 만큼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

“괜히 티 파티에 보냈군요. 당신이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괜찮아요. 잠시 두통이 왔던 것뿐이니까.”

요르문은 안절부절못하며 시아의 근처를 서성였다. 벨을 눌러 따뜻한 초콜릿을 시키곤, 힘없이 소파에 기대 누운 시아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누님. 얼굴이 창백해요. 몸부터 따뜻하게 녹이세요.”

“…고마워.”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파리해진 탓에,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시아가 감기라도 걸렸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라크는 자신의 과거를 모른다고 했었지.’

가족이 있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의 기억은 고대 마도 시대의 종말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시작되었다. 잿더미 속에서도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은발과 함께, 용을 물리친 사도로 추앙받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시원한 마력이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라크시스의 치유술이었다.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옛날과는 다르게, 마력이 잔잔하게 흘러들어 왔다.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착각해서 그랬는지 그녀가 놀라지 않게 배려하는 듯했다.

“고마워요. 라크.”

“별말씀을.”

라크시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요르문은 그의 미소에서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발견했다.

라크시스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침묵의 의미였다.

【 깨달은 사랑 】

두 마법사의 지극한 간호 덕에 시아는 금방 회복했다. 사실 회복이 필요한 만큼 아픈 것도 아니었다. 갈리프의 기억은 달리는 마차 바퀴에 날아든 돌멩이처럼 덜컹거리며 끼어들었다.

애초에 왜 갑자기 그녀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미묘한 불쾌감과 낙인 같은 죄책감이 가슴이 남아버렸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을 본 후로, 라크시스의 삶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마도 시대에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자신이었는데도.

‘이것도 갈리프의 영향일까.’

시아 켈튼이 갈리프의 또 다른 형태인 이상, 그녀를 자신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갈리프의 흔적이 자신을 침범하는 것이 썩 달갑진 않았다.

이러다간 라크시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자신만의 감정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 기껏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데, 자신이 갈리프이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

차라리 먼저 고백해 버릴까. 내가, 시아 켈튼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3517년에 처음으로 만난, 마도 시대의 마법사인 라크시스 옌을 좋아한다고.

물어볼까……. 당신도 칠십 년을 거슬러 라크시스 옌을 만나러 온 나를 좋아하냐고. 당신이 지금까지 내게 보인 모든 감정이 정말로 나를 향해 있는 게 맞냐고.

그렇게 저질러 버리면 그다음엔?

‘그다음엔…….’

라크시스가 어떤 대답을 내어놓든, 시아와 라크시스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물론 둘의 관계가 달라진 건 오래전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어 형태를 완전히 정의해 버린 관계는 공식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시간 여행의 파트너에서 인생의 파트너로. 피후견인과 후견인의 관계에서 연인 혹은 약혼자의 관계로.

이런 수순은 그가 칠십 년을 기다려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고 고백한 순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시아가 라크시스를 붙잡고 폭포 같은 감정을 쏟아내는 순간, 관계 정의의 시점이 앞당겨질 뿐이다.

한참을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고 굴리다, 시아는 뜻밖의 결론에 도달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해도 결말은 같았다. 그녀가 먼저 고백하든, 라크시스의 고백을 기다리든 두 사람의 종착지가 같다는 것이었다.

라크시스가 자신을 거절하거나 고백하지 않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랑을 깨달은 자의 본능적인 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갈리프로 인해 복잡하던 머릿속이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빨갛게 달구어진 쇠가 마침내 모양을 갖추고 완성되었다.

단단하게 식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불이 다시금 쇠를 녹이면 모를까, 라크시스만큼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뛰도록 만들 불을 평생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도 그랬다.

“이 정도면 두통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마력이지만 당신이 괜찮아졌다고 답하기 전까진 계속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 상태가 어떤지 말해 줘요.”

시아가 멍하니 상념에 잠긴 사이에도 라크시스의 마력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전신을 샅샅이 훑으며 두통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섬세하고 간지러운 마력은 라크시스를 닮아있었다.

“이젠 괜찮아요. 정말로요.”

“못 믿겠어요. 당신은 어지간한 일에도 괜찮다고 하는 편이니까.”

라크시스는 남은 손으로 시아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녀의 이마가 난롯불의 열기로 달아올랐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라크시스는 손을 뗐다.

시아는 피식 웃었다.

“날 못 믿으면 누굴 믿으려고요?”

“글쎄요. 당신을 못 믿으면 시아 켈튼을 믿어야겠죠. 일단 열은 없네요. 마력 흐름도 원활하고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던 라크시스도 결국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요르문은 진이 빠져 그들의 반대편에 앉아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아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무렵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할까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객실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밤늦은 시간에 미혼인 남녀가 단둘이 호텔 복도에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사실 들켜도 좋았다. 이젠 시아가 단순히 라크시스 옌의 피후견인이 아님을 은근슬쩍 소문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하나만 더 물어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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