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0)화 (210/292)
  • 210화 

    “저 누님만 믿을게요. 지켜주실 거죠?”

    “지켜달라니……. 잠깐, 라크. 지금 이 전등, 라크가 이런 거예요?”

    얇디얇은 창이 부르르 떨렸다. 바람이 부는 날씨도 아닌데 창이 왜 흔들린담.

    요르문이 날름 혀를 내밀었던 걸 보지 못했던 시아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켈튼!”

    호텔 방 문이 벌컥 열리며 거대한 덩치가 나타났다. 지저분한 셔츠에 칙칙한 헌팅 캡까지. 뒷골목 건달 같은 남자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채였다.

    누, 누구야.

    시아는 얼어붙었다.

    취한 듯 꼬부랑거리는 목소리가 동굴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저 왔습니다아! 제가 뭘 듣고, 뭘 보고, 뭘 가져왔는지 한번 보십쇼!”

    “로드, 젤마니? 왜 여기에 있어요……?”

    덩치의 정체를 알아차린 시아는 까무러칠 뻔했다.

    갑자기 루드윅 젤마니가 왜 나타나는 거야? 그것도 저런 건달 같은 차림으로!

    “요르문 님이 도움을 요청하시…인 건 아니고 왠지 여기서 흥미로운 괴담을 발견할 것 같아서요.”

    오랜만에 만난 루드윅은 여전했다. 덩치에 안 맞게 몸을 배배 꼬며, 괴담 이야기를 하자마자 흥분하는 게 아닌가.

    요컨대 시아 일행이 맨덜랜드로 올 것 같아서 눈치껏 따라왔다는 거다. 그간 루드윅이 물어다 준 제국 각지의 괴담 중 요르문이 유독 맨덜랜드의 유령선 사건에 관심 보이기에, 이게 봉인과 관련된 사건이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것도 시아 일행과 일정이 겹칠지 안 겹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맨덜랜드 행 열차를 탔다는 게 아닌가.

    그래놓고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척하면서 지금껏 요르문과 함께 다녔다는 거다.

    “괴담 좋아하시는 건 여전하네요, 로드 젤마니.”

    “레이디도 아름다우신 건 여전하고요. 씨즐턴, 아니, 이젠 다무스지. 아무튼 그때도 정말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요르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술에 취해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게 된 루드윅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라크시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것을 봐버린 탓이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객실 등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소년 같은 외양의 요르문에게 맥없이 질질 끌려갔다. 목덜미를 잡힌 전직 군인이 소파에 냅다 메다 꽂혔다.

    “내가 오늘 자네 목숨 구한 줄 알게.”

    “요르문 님이요? 저를요?”

    루드윅은 눈치 없이 손가락으로 저 자신을 가리키며 헤실거렸다. 요르문은 이를 악물고 복화술 하듯 언성을 높였다.

    “염탐하겠다고 나간 사람이 인사불성이 되어서 오면 어떡하나!”

    “제가요오? 취했다고요?”

    “하, 내가 말을 말지.”

    “하지만 의심을 피하려면 그자들이랑 어울려야만 했는걸요. 푸흐으, 그래도 성꽈가 있었습니다?”

    “성과라고?”

    “예에……. 이걸 보시라고요오…….”

    루드윅이 품에서 꺼낸 건 자그마한 성녀상이었다. 요르문은 인상을 쓰며 성녀상을 받아 들었다. 루드윅의 손에 들려있을 땐 작아 보였는데, 막상 쥐어보니 한 손에 꽉 차는 크기였다.

    성녀상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요르문이 멈칫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본 바닥의 감촉이 매끈했다.

    성녀상은 오로지 국교회에서만 생산한다. 국교회의 신자만이 성녀상을 가질 수 있었고, 사제들은 축복의 의미로 바닥에 국교회의 십자가를 새긴 성녀상을 신도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나 요르문은 오래전, 이것처럼 바닥이 매끈한 성녀상을 본 적이 있었다.

    대주교의 인장이 없는 성녀상.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 지하 감옥에서 사제인 척 열연하던 샤샤리아 밀무역상이 걸고 있던 바로 그 성녀상이었다.

    “데이먼 녀석이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해요.”

    “뭐가. 데이먼 포드가 뭐라고 했는데.”

    꼬부라지는 혀로 루드윅이 한참을 중얼거렸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푸흐, 이 성녀상을 가지고 있으면 말이에요오. 항해 중에 노예가 죽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지 뭐예요? 그런데 아무나 이 성녀상을 가질 순 없다고 하더라고요.”

    “…자넨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말해 뭐해요. 당연히 훔쳤죠. 이게 없으면 보험금이 안 나온다는데, 그치들이 순순히 주겠어요?”

    요르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라이던힐 출신 군인이요, 남작의 작위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금 도둑질을 했다고 당당하게 말한 건가.

    그러나 같은 상황이었다면 요르문도 성녀상을 훔쳤을지 모른다. 게다가 보험금이라니. 정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가.

    그래서 루드윅도 이렇게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자리를 지켰겠지. 그 역시 요르문과 함께 데이먼 포드를 만나 남대륙 회사 홍보 전단지를 보았으니까.

    “절 같은 노예상으로 착각했는지 술술 불더라고요. 가멜인을 실어나르는 유령선은 한두 대가 아닌 것 같았어요.”

    괴담을 찾아 가멜 식민전쟁까지 참전했던 경험이 루드윅을 그럴싸한 노예상으로 둔갑시켰다. 펍의 선원들은 루드윅이 수도의 귀족이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주절거렸다.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자주 유령선이 항구에 나타났겠지. 가멜에서 맨덜랜드까지는 암초를 피해 순풍만 받아도 꼬박 한 달이 걸리는 거리인데, 배 한두 척 가지곤 이 주에 한 번씩 맨덜랜드에 오는 건 어림도 없었을걸.”

    “투자금 삼천만 비스크만 내면 항해에서 발생한 손해를 모두 보장받을 수 있대요. 미라가 된 시체 하나당 삼십만 비스크. 백 명만 태워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세이데이 호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노예를 실으면 못해도 사백 명을 태울 수 있대요.”

    유령선의 이름은 왜 하필 세이데이 호였을까.

    불편한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항해시대의 세이데이 호는 노예를 많이 실어나를 수 있도록 설계된 배로도 유명했다.

    “당장 내일 보험사정관을 만날 거라고 얼마나 으스대는지……. 맨덜랜드에선 노예 시체가 육두구나 후추보다 더 값비싸게 팔린다면서, 시체 장사가 이렇게 짭짤하다는 걸 다른 놈들이 알아선 안 된다면서.”

    루드윅이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며 방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조금씩 섞여들었다.

    “이번엔 노예를 배에 태우는 데 고생을 좀 했다더라고요. 보통은 약을 먹여 납치를 한다는데, 이번엔, 이번엔…….”

    루드윅의 고개가 펍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설명하다 홱 넘어갔다. 요르문은 소파와 함께 그대로 뒤로 자빠질 뻔한 덩치를 얼른 붙잡았다.

    “이봐, 정신 차려!”

    “아흐흐흐…….”

    등 뒤가 따가웠다. 시아가 이쪽을 계속 기웃거리고 있었다. 라크시스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루드윅, 당분간 몸조심해야겠어. 자네에게 성녀상을 도둑맞은 녀석 말이야, 자네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걸.”

    “제가 푸후, 훔친 것도 모를걸요.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사고팔 수 있어요? 다 같은 제국인이라 할 땐 언제고. 가멜에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 착하고, 친절하고, 저더러 친구라 했는데, 아, 머리 아프다하…….”

    “알았어, 알았으니까. 수고했고 일단 잠이나 자게.”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덩치가 일인용 소파에 대각선으로 늘어져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요르문은 루드윅의 머리에서 떨어지려는 헌팅 캡을 붙잡아 테이블에 올려주곤, 자리로 돌아왔다.

    점점 커지던 코골이가 뚝 끊겼다. 그에, 요르문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루드윅이 기절한 소파가 텅 비어있다.

    어둑한 실내에서 잔잔히 타오르는 난롯불이 그가 사라진 자리를 주홍빛으로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루드윅이 누워있던 곳 반대편엔 라크시스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조용히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아마도 루드윅은 지금쯤 제 객실 어딘가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라크시스가 마법으로 그를 보내 버렸으니 말이다.

    “로드 젤마니가 뭐라고 하던가?”

    “다 들렸잖아.”

    “워낙 혀가 꼬여 있어서 말이야.”

    라크시스가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시아를 향해 턱짓하며 그녀에게도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생각보다 단서가 금방 발견되었다고 해야 할지…….”

    요르문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루드윅이 건넸던 성녀상을 테이블에 탁 올려두었다.

    “이거, 자네도 알지?”

    성녀상을 받아 들어 관찰하던 라크시스에게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시아는 성녀상을 구경하다 불현듯, 이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요르문. 이건 예전에 슈테른베슈테크에서 본…….”

    “맞아요. 지하 감옥에서 가짜 사제가 목에 걸고 있던 것과 똑같아요. 갱단 흰토끼발인지 뭔지 했던 샤샤리아 밀무역상이요.”

    “그 사제도 황혼 국교회 신자였지.”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그때 제가 그놈이 가짜 사제란 걸 알아챈 이유도 바로 이 성녀상 때문이었어요. 서품받은 사제는 국교회 대주교의 인장이 찍힌 성녀상을 받거든요.”

    요르문은 시아에게서 성녀상을 받아 뒤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건 바닥이 매끄럽죠. 제국에서 국교회 이외의 곳에서 성녀상을 만들어 내는 건 불법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신앙의 수호자이신 게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런 성물 생산을 독점하는 것이 국교회의 수입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가짜 성녀상이 유통된다는 걸 국교회에서 알았다면, 국교회는 틀림없이 대대적으로 이단과의 성전을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국교회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잠잠했다.

    칠십 년 후의 미래까지 알고 있는 시아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단의 세력이 너무 비밀리에 움직여서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국교회가 이미 카얄의 손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가짜 성녀상이 묵인되어 왔거나. 둘 중 하나겠네.”

    “후자라면 상황이 골치 아파지긴 하겠군요.”

    라크시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요르문은 손뼉을 가볍게 맞부딪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무튼 루드윅이 그러는데, 이 성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보험금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나 이 성녀상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항해 중 죽은 가멜인들에 대한 보험금이라면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해 온 것이 있지 않은가.

    3493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

    “이래서 생각보다 단서가 금방 발견됐다고 한 거구나.”

    “노예상들이 이 성녀상을 어디에서 받았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황혼 국교회의 꼬리를 밟을 수 있으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