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그래서 말인데요. 맨덜랜드의 유령선 사건 기억나시죠?”
“…솔직히 까먹기도 힘든 사건이었어.”
시아는 미라가 된 시체가 서랍 속 물건처럼 차곡차곡 들어차 있는 사진을 떠올리곤 몸서리쳤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괴로운 기억은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유령선의 가멜인들이 모두 미라가 되는데도 어째서 노예 밀무역이 계속 이어지는지에 대해 제가 의문을 가졌던 것도 기억하시고요?”
“기억해. 쓰고 싶지 않은 표현을 빌리자면,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는데도 노예상들이 왜 피해를 감수하며 장사를 강행하는지. 맞지?”
교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시아 켈튼은 확실히 마음에 쏙 드는 우등생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갈리프도흐 출신이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갈리프도흐 학생이 성실한 건 아니었다.
“누님. 노예 거래가 불법인 건 아시죠?”
“알지.”
“그렇다면 배에 탄 가멜인들은 법적으로 어떤 존재가 될까요?”
시아는 입속에서 무겁게 구르던 말을 뱉었다.
“당연히… 사람이지. 우리 같은.”
“그렇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가멜인들을 상품이 아닌 사람 취급을 한다면, 항해 도중 그들이 죽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요. 그것도… 거액의 생명 보험금을요.”
요르문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머리를 돌려 열었다.
“그렇지만 어떤 보험 회사가 척 봐도 노예로 팔려나갈 게 뻔한 가멜인을 보험에 가입시켜 주겠어요? 보험 회사 입장에선 손해 보는 일인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모두 맞는 말이다. 요르문은 상인의 논리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달칵, 하고 서류 가방의 잠금장치가 열렸다. 언제부터 옆에 있었는지 모를 가방에서 빛바랜 종이가 딸려 나왔다.
요르문은 곳곳이 찢어져 잔뜩 헤진 종이를 펼쳐서 시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 딱 여기에서만 조건 없이 생명보험을 가입시켜 줘요. 정말로 조건 없이.”
[풍랑이 두려우십니까? 세이데이 여신의 분노가 두려우십니까?
위대한 제국의 신민 여러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족에게 막대한 빚을 남기고 세이데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는 미신에 불안해하며 수익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남대륙 회사는 위대한 제국의 신민이라면 누구든 선박당 단돈 삼천만 비스크로 보장해 드립니다. 최북단 지르가나의 창백한 광부부터 최남단 가멜의 검은 농부까지. 남대륙 회사는 무자비한 세이데이 여신의 검푸른 품을 가로지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제국의 신민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항해 중 사망한 선원을, 승객들을 추모할 시간도 없이 막대한 배상금을 위해 발로 뛰어다닐 걱정을 하는 선박주 여러분. 단돈 삼천만 비스크로 편안한 항해를 보장받으십시오.
부담은 적게, 주머니는 무겁게. 성공한 무역가의 선택, 남대륙 회사 생명보험.
문의: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
그가 내민 건 3518년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에서 약관을 갱신하여 발행한 보험상품 홍보 전단지였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 설마…….”
시아는 말을 잇다 말고 요르문을 바라보았다. 요르문이 전단지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짐작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데이먼 포드를 만났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대외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는 것에서만 손을 떼고, 지금껏 계속 유령선의 뒤를 밟고 있었더라고요.”
역시. 시아는 괴담이라면 목숨을 거는, 또 다른 괴담 마니아인 루드윅 젤마니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령선에서 내린 선장들이 곧잘 다니는 펍이 있대요. 거기에 드나들면서 펍 벽면에 장식처럼 붙은 전단지를 몰래 떼어왔다고 했어요.”
그나저나 남대륙 회사라니.
시아는 또다시 까마득한 죄책감의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이름까지 거창한 남대륙 회사. 얼핏 들으면 거대한 무역회사 같지만 사실 남대륙 회사는 제국이 식민지 가멜을 합법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이용한 방식이었다.
남대륙 회사는 가멜의 풍부한 면화와 향신료를 갈취하고 공산품을 떠넘기길 반복하다, 어느새 가멜을 비롯한 크고 작은 왕국들을 점령해 아예 회사령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지배하기 시작한다.
남대륙 회사가 가멜을 삼키고 무역을 독점하면서 제국은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마도 시대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역사를 되짚던 시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 그렇지만 여긴 3520년이잖아. 알리나 황제가 재위 중인 시대 아냐?”
“이럴 땐 누님이 정말 저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요르문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말이 빠르게 통하는 상대만큼 대화하기 좋은 사람도 없었다.
“맞아요. 남대륙 회사는 이미 사라졌어요. 그것도 3493년에요. 그런데 이십 년도 더 된 3518년에도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의 이름을 건 보험상품이 나오고 있다는 거죠.”
제아무리 자치령처럼 가멜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남대륙 회사는 기본적으로 무역회사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대륙 회사가 가멜을 통치하게 된 이후부터, 회사는 통치를 위한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던 과거와 달리 가멜 통치로 인해 손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남대륙 회사는 온갖 편법과 불공정거래로 회사를 운영하다 파산 직전에 이르러 와해되고 만다.
의회에서 남대륙 회사에 주었던 독립 외교권과 독점무역권 등 가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정부와 황제에게 반납하는 법이 통과되며, 남대륙 회사는 3493년에 사라지게 되었다.
그게 벌써 알리나 황제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기에 3520년인 지금, 남대륙 회사가 존재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단 건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는 유령회사라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크죠. 맨덜랜드 시청에 등록된 보험 회사 명단을 뒤져봤는데 남대륙의 ‘남’자 조차 없었으니까요.”
시아는 입을 쩍 벌렸다. 그 짧은 하루 동안 요르문은 맨덜랜드 전역의 파장을 측정하고, 전단을 발견한 후 시청까지 들쑤셨다는 거다. 그러니 눈 밑이 저렇게 시커멓지.
“진짜 고생했네…….”
“별말씀을요. 어쩌면 회사 이름만 맨덜랜드 지부로 지어놓고 실제 주소는 맨덜랜드가 아닌 다른 곳으로 해놓았을 수도 있죠.”
요르문은 평범한 민원인처럼 보이느라 애를 먹었다며 투덜거렸다. 자신들을 뒷조사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알면, 이 수상한 보험 회사가 곧바로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까 그랬다는 거다.
“어쨌든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라는 이 수상한 회사가 황혼 국교회의 자금을 관리하는 곳일 수도 있어요.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황혼 국교회에 자금을 대주는 이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을 꾸미고도 남을 만큼의 자본을 꾸준히 얻을 방법이 있거나.”
“맞아요.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가 딱 그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그러니 3518년에 새로 찍어낸 전단지가 있겠죠.”
그것도 수상한 펍 벽면에만 몰래.
요르문이 뒷말을 덧붙이며 테이블에 발을 올렸다. 그의 구두 밑창은 시커먼 습기와 비린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요크 부인이 봤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어쩌면 전단지 자체가 일종의 암호일 수도 있겠어요.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비밀지령 같은 것 말이에요.”
“아직 암호 분석은 안 해봤어요, 시아.”
라크시스는 요르문의 말에 슬쩍 덧붙였다. 그 역시 요르문의 저돌적인 태도가 당황스러운 듯했다.
“어쨌든, 사람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는 법이죠. 선장과 사제는 물론이고 이미 미라가 된 사람들까지 모두요. 유령선이 그렇게나 자주 항구를 드나들었는데, 비단 데이먼 포드만이 유령선의 진실을 알았을까요?”
요르문은 자기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 고취된 듯했다. 흥분이 서린 듯, 입매가 자신만만하게 휘어졌다.
“그래서 뱃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부둣가를 하루 종일 훑고 다녔죠. 뜬소문에 섞여 있는 진실을 알아내기엔 뒷골목의 지저분한 펍이 가장 좋거든요.”
시아는 결국 두손 두발을 모두 들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미래의 양부도 걸핏하면 뒷골목을 누비며 정보를 캐오곤 했는데. 지금이나 나중이나 똑같구나.
시아는 피식 웃었다.
“그뿐이겠어요? 제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다고요. 맨덜랜드 곳곳에 파장 감지기를 설치하고, 계속 데이터를 분석했단 말예요.”
요르문은 어느새 테이블 옆에 세워둔 기계를 이리저리 조작하고 있었다. 가정용 금고 크기의 네모난 기계엔 모눈종이처럼 격자가 빼곡한 표시판이 달려 있었다.
얼핏 칠십 년 후의 텔레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툼한 유리로 덮인 화면이 있고 정체 모를 버튼에 묵직한 뒷판까지.
다만 주기적으로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는데, 기계 위에 전구처럼 매달린 진공관 때문인 듯했다.
오십여 개에 달하는 점이 맨덜랜드 시의 지도처럼 보이는 영역 안에서 반짝였다. 그러나 도드라지는 신호는 없었고, 기계 또한 평화롭게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점들이 아마 파장 감지기의 위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시아와 라크시스가 돌아오자마자 요르문이 퀭한 눈으로 화를 냈던 게 이해가 됐다.
라크시스도 마냥 놀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일터에 덩그러니 남겨져 홀로 일하고 있는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지 시아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난 돕지도 않고 편하게만 있었네.”
“어쩌겠어요. 가족의 부탁인데. 그것도 하나뿐인 누님의 일인데 제가 도와야죠.”
요르문은 사이좋은 동생처럼 시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곤 시아의 시야 밖에서 라크시스에게 보란 듯이 혀를 내밀었다.
메롱. 라크시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애초에 라크시스를 약 올리려고 이끌어낸 대화였다. 누님은 자신을 가엾게 여겨 보듬어 주는 데다가, 세 시간이나 멋대로 사라졌었던 라크시스에겐 소소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나뿐인 누님, 가족. 요르문은 그 두 단어를 재차 강조했다. 시아를 좋아한다면서 고백조차 못 하고 맴돌기만 하는 라크시스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객실 등이 깜빡였다. 스산한 공기가 발밑에 고여 든다. 고요히 분노하기 시작한 고대 마법사의 낯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누님, 누니임.”
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요르문이 등 뒤에 숨어선 하나도 무섭지 않은 목소리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