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8)화 (208/292)
  • 208화 

    요르문의 바락거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시아는 그 후의 일들을 떠올리다, 자신이 줄곧 라크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함께 살면 닮는다더니. 요크 부인이나 자네나 잔소리하는 건 똑같군그래.”

    “말 돌리기는. 됐어. 무엇 때문에 누님을 데려오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렸는지 설명할 게 아니라면 됐다고.”

    실제로 라크시스의 저택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라크시스의 대답에서 전말을 눈치챈 시아는 움찔 놀랐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녀가 레베카와 카페에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동안 내내.

    시아가 어쩔 줄 모르고 라크시스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라크시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침 수도에 볼일이 있어 간 것뿐이니까.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요.”

    그러나 시아는 믿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빨리 나오라고 말하지 그랬어요. 그 추운 거리에서 대체 왜…….”

    라크시스는 잠시 연극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시아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만족스러운 일이었지만, 괜한 생각에 힘을 들이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제가 바람맞은 사람처럼 궁상맞게 서 있었을까 봐요? 그런 걱정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겁니다. 정말로 수도에 볼일이 있어 들렀던 것뿐이니까.”

    이렇게까지 대답하는데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아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나요.”

    “어차피 사실대로 대답 안 해줄 거잖아요. 그러니 그냥 미안해할래요.”

    “정말로 미안해요?”

    어라, 정말로 미안하냐고? 시아는 울컥 대답했다.

    “거 봐. 저 기다린 거 맞네요. 그것도 두 시간 넘게.”

    동시에 시아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드레스를 벗으며 장갑도 함께 벗어버려, 이젠 맨손 그대로인 기다란 손가락에 말랑한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기를 두어 번.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손가락 끝이 아릿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놀라 버린 탓이다.

    그러나 시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초승달 같은 남자의 시선이 둥글게 휘며, 그의 입술과 함께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사과는 이걸로 충분히 받았어요. 그러니 더는 제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라크시스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 동생 좀 달래줄래요?”

    아, 맞다. 또 요르문을 잊을 뻔했다. 지난번 켈튼 저에서도 그랬는데. 라크시스가 편해진 건지 요르문이 편해진 건지… 아니면 요르문에겐 이런 모습을 보여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건지.

    무슨 이유가 됐든 간에 요르문은 서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아는 동그랗게 등을 말고 있는 요르문에게 살며시 다가섰다.

    “요르문.”

    시아가 톡 건드리자, 요르문은 새우가 펴지듯 곧바로 돌아보곤 볼멘소리를 했다.

    “누님도 너무하세요. 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기다렸단 말예요.”

    물론 저 녀석이 말을 안 했겠지만요.

    제국에서 고대 마법사를 녀석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라크시스를 지목하며 투덜거렸다.

    칠십 년 후의 양부에 비해 몇 년은 어려 보이는 외양 탓에 정말로 친척 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속엔 서른도 넘은 남자가 들어있겠지만.

    요르문이 이렇게 응석 부리는 사람도 오직 시아뿐이었다.

    일찍이 가족을 잃은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요르문은 난데없이 본인을 친척 누님이라 주장하며 나타난 여자에게 자꾸만 의지하게 되었다.

    요크 부인이나 헤이든처럼 오래 알고 지낸 고용인들도 가족 같았지만, 시아는 달랐다. 누님,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 낸 기묘한 관계였다.

    “배는 안 고프세요?”

    시아는 차마 카페 블랑에서 디저트를 배불리 먹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누님 드리려고 싸 왔어요. 맨덜랜드 시내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건데, 보기보다 맛이 괜찮아요.”

    요르문은 여전히 토라져 있으면서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봉투를 주섬주섬 가져왔다. 아직까지도 따끈한 열기가 남아있다. 대체 뭘까? 시아가 궁금해서 봉투를 열어보았다.

    고소한 기름내가 나는 샌드위치였다. 자세히 보니 생선튀김과 매콤한 소스를 빵 사이에 끼워두었다.

    한입 베어 물자 비린내 없는 뽀얀 생선 살이 그대로 입 안에 뛰어든다. 얼핏 봤을 땐 발견하지 못했던 하얗고 부드러운 소스가 고소한 튀김 맛을 극대화시키며 알싸한 맛을 감싸 안았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의 생선 요리는 괴식으로 유명했다. 맛이야 그럭저럭 먹을 만한 경우도 있지만, 정어리 대가리를 파이에 꽂는다든지 하는 괴상한 장식으로 먹기도 전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건 칠십 년 후에도 없는 건데! 순식간에 절반을 먹어 치운 시아가 볼이 불룩해진 채로 물었다.

    “와, 이거 뭐야?”

    “맨덜랜드요.”

    “이름이 맨덜랜드라고?”

    거참, 이름 한번 특이하네.

    “맨덜랜디쉬 샌드위치, 통칭 맨덜랜드라 불리는 음식이죠. 이 지역 전통 음식이래요.”

    맨덜랜드 시가 과거 독립된 맨덜랜드 공국이었던 수백 년 전, 배 위에서 불을 다룰 수 없는 탓에 과거 선원들은 항구에서 내리면 한풀이라도 하듯 무조건 기름과 불로 익힌 고기를 먹곤 했다.

    갓 튀겨 뜨거운 생선튀김을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문화는 그때 생겨났는데, 지금처럼 매콤한 소스와 부드러운 소스를 곁들이게 된 건 대항해시대에 가멜과 서대륙의 식문화를 접하게 된 후라고 한다.

    “누님은 가멜식 향신료 좋아하시잖아요. 잘 드시기도 하고요.”

    “…내가?”

    “미도리 셰프 식당의 가재찜을 드시던 게 떠올랐을 뿐이에요. 보아하니 제 예상이 맞은 것 같지만요.”

    요르문은 그렇게 말하며 봉투에 남은 샌드위치를 모두 시아 앞으로 내밀었다. 사양하려고 했으나, 시아는 뒤늦게 제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다 먹어버린 것이다.

    시아는 결국 입맛을 다시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미래의 양부도 걸핏하면 동대륙 요리니, 가멜식 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했었지.

    아무래도 요르문은 자신의 식성을 파악하는 눈썰미가 뛰어난 모양이었다.

    시아는 끼니를 굶은 사람처럼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요르문의 표정도 어느새 뿌듯하게 풀어졌다.

    “요르문. 미안해.”

    “괜찮아요. 저 이제 화 다 풀렸어요.”

    그래, 누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라크시스 녀석이 늦장 부린 탓이겠지.

    “누님, 천천히 드세요. 물 좀 드릴까요?”

    요르문이 물 주전자를 듦과 동시에 허공에서 맺힌 물이 빈 유리잔 안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요르문은 시아의 어깨 너머를 노려보았다.

    라크시스가 선수를 친 것이다. 라크시스가 보란 듯이 으쓱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 자식이…….”

    “모두 고마워요. 요르문도, 라크도 말예요. 샌드위치도 마저 잘 먹을게요. 물도 고마워요!”

    시아는 속사포처럼 내뱉은 말로 두 사람의 묘한 기싸움을 단번에 일축시켰다.

    그에, 라크시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일인용 소파를 끌어다 시아 옆에 앉았다. 요르문은 잠시 동안 그를 더 노려보다가 이내 시아가 식사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봉투가 거의 비어갈 때쯤이었다.

    “요르문. 그나저나… 봉인은 좀 어때? 진척은 있었어?”

    시아의 질문에 드디어 본론이 시작됐다. 애초에 한밤중에 세 사람이 맨덜랜드에 모이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여덟 번째 봉인의 소재 때문이었다.

    “프레디의 바람 장미로 맨덜랜드라는 장소를 특정하긴 했지만 봉인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맨덜랜드 전역에서 파장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거든요. 누님이 칠십 년 후로 돌아갈 때까지 못 찾을 가능성이 크죠.”

    제국 전체를 일일이 뒤져야 할 수고를 덜었을 뿐, 맨덜랜드라는 단서만으론 봉인의 위치를 금방 알아낼 수 없단 뜻이었다.

    “하지만 종말까진 아직 이 년가량 남았으니까요. 그전에만 찾아도 선방하는 거죠.”

    요르문은 급할 게 없다고 했다. 일기장 속의 여덟 번째 봉인이 자연적으로 파괴된 건지, 카얄에 의해 파괴된 건지 특정할 순 없으나 어쨌든 일기장에 적힌 봉인 파괴 시점까진 상당한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해를 넘기진 않을 거예요. 봉인이 맨덜랜드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요.”

    해야 할 일은 명료하고 간단했다.

    우선 맨덜랜드 전역의 마력 파장을 측정해 사도의 신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특정한다. 이를테면 다무스 신전의 지하 미궁처럼, 실제 사도가 어둠의 힘을 품고 잠든 장소 말이다.

    해당 장소를 찾고 나면 그다음으로 봉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아의 다음 시간 여행 장소가 수도의 의회장인 알펜하임 궁 시계탑이라곤 하지만, 다음 시간 여행까지 일 년 가까이 남은 지금 시점엔 시계탑에서 봉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신전에서 봉인이 발견된다면 그걸로 봉인 찾기는 끝나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시금 봉인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그땐 신전 주변에서 소문을 수집하면 돼요. 가령 인어의 눈물처럼 소유자를 미치게 만드는 보석이라든가 하는 소문 말이죠.”

    요르문의 계획은 꽤 타당했다. 수고를 최소화하면서 헛걸음을 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다.

    시아가 덧붙였다.

    “봉인이 원인일 거라 추정되는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말이지?”

    “바로 그거예요. 슈테른베슈테크의 백작 유령 괴담처럼 기이한 소문이 들려온다면 소문을 따라 봉인의 뒤를 쫓아가면 되겠죠.”

    요르문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더니 여유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도중에 카얄이 직접 움직이거나, 예상보다 봉인의 불안정화가 일찍 시작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긴 해요. 마류 이상 현상을 측정하는 거야… 팔 년 전부터 해온 연구였고, 카얄이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황혼 국교회도 덩달아 움직일 테니까요.”

    만일 봉인이 세상에 노출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쪽이 알 수 있단 뜻이었다. 황혼 국교회의 수상한 움직임으로든, 요르문과 라크시스가 오랫동안 이어온 이상 마류 관측 연구로든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황혼 국교회의 뒤를 조사하는 건 타당하긴 해요. 이단에 희생될 사람들을 미리 구해 보자는 누님의 뜻도 물론 좋지만요.”

    요르문은 깍지 낀 두 손을 종아리 높이의 테이블 대신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살짝 턱을 괴고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것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직전의 탐정 같은 표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