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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7)화 (207/292)

207화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남자의 손이 오목하게 모여 시선만을 가린다. 눈은 가려도 그 밑의, 작고 오뚝한 콧망울이며, 당돌하고도 사랑스러운 입술은 보고 싶은 건지…….

한쪽 팔은 시아의 허리에, 남은 한 손은 시아의 눈에 내어준 마법사는 꽤 만족스러워했다. 제 코트 소매가 구겨지도록 꽉 잡은 모습이, 시야를 가려주길 원하는 간절한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모든 것을 오롯이 의지한 것만 같아서.

오직 자신만을 원하는 것 같아서.

라크시스는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안 잊었어요. 나의 레이디.”

* * *

시아와 라크시스가 맨덜랜드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꼬박 한 시간 후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어둑해진 호텔 방 안에 둥그렇게 바람이 불었다. 난롯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요르문이 마력을 느끼고 깨어났다.

눈 밑으로 시커멓게 그늘이 내려온 것이, 하루 종일 혹사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간이동 마법으로 나타난 시아와 라크시스는 멀끔했다. 멀끔해도 이렇게 멀끔할 수가 없었다.

누님은 또 언제 옷까지 갈아입은 거람. 아침에 헤어질 땐 황궁에 방문하기 위한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지금의 시아는 신문 배달부나 입을 법한 멜빵 바지 차림에 재킷까지 챙겨 입곤 머리카락을 숨겨 뉴지 캡을 쓰고 있었다.

물론 저 고급진 옷감을 생각하면 아무도 누님을 신문 배달부라 착각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요크 부인이라면 절대 누님을 저런 꼴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밀레이나 로드리치도 마찬가지다. 숙녀에게 바지를 입히느니 차라리 죽지.

그 말인즉, 시아는 로드리치 저택이나 켈튼 저택에 들렀다 온 게 아니란 소리였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시아의 눈빛이 영 이상했다. 라크시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가 고개를 돌리면 덩달아 피한다.

둘이 같이 있었구나. 그것도 라크시스의 저택에서.

요르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가 누님에게 구애를 허락한 적 없다고 했는데.”

“난 자네 허락이 필요하지 않지. 나 또한 레이디 시아 켈튼의 피후견인이니 말이야.”

요르문은 뒷목을 잡았다. 저런 뻔뻔한 녀석 같으니. 그러나 논리 싸움으로 라크시스 옌을 이기는 건 바위에 머리를 들이박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대신 요르문은 시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지금이 몇 시인진 알아? 스크롤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누님을 데려오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

“내가 분명 다른 볼일이 있었다고 말했을 텐데.”

“퍽이나. 그렇다면 오래 걸릴 거라고 말이라도 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세 시간? 시아는 움찔거렸다. 자신이 라크시스의 저택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렀던가?

하지만 라크시스의 저택에서 한 일이라곤 정령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그의 침실에서 단둘이, 물론 정령 수십 마리도 함께였지만… 어쨌든, 사람의 머릿수만 헤아려 본다면 단둘이서, 그것도 자신의 옷을 갈아입는 일을 했다니.

한 시간이 넘도록 실랑이를 벌인 건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는 정령들 때문이었다.

‘얘들아, 리본을 그쪽 방향으로 풀면 어떡하니.’

등 뒤를 조인 끈 장식을 풀랬더니 리본을 가지고 장난치는 데 신이 난 정령들이 이리저리 리본을 꼬아버리곤 깔깔 웃는 게 아닌가.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나, 요크 부인에게 붙들려 지체되었을 시간이나 비슷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시아. 문제라도 있나요?’

‘이 녀석들, 제 말을 안 듣는데요.’

등 뒤에 자꾸만 새로운 매듭이 생긴다. 다른 건 혼자 할 수 있어도 얼기설기 엮은 코르셋의 끈은 시아 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오랜만의 손님이라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군요.’

‘정령들더러 일 좀 제대로 해달라고 말해 줄 순 없을까요?’

그러나 해결사라 믿었던 남자는 그녀의 기대를 처참히 배신했다.

‘안 됐지만… 정령은 그리 고등한 존재가 아니라서요. 쫓아내 줄 순 있겠지만 저렇게 장난칠 땐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시아의 허리가 실시간으로 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라크시스는 가벼이 대답할 뿐이다.

‘꺄르르!’

보석 같은 웃음소리를 내던 정령들이 이젠 줄다리기를 하듯 양 끈을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시아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떻게 좀 안될까요? 저 곧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시간 여행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라크시스가 원망스러워졌다.

돈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고용인을 한 명도 안 둘 수가 있어? 이러니 저택에 동물 시체가 있느니 귀신이 나온다니 하는 소문이 돌지!

그렇다고 정령을 모두 쫓아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도 시대엔 코르셋 정도는 혼자 입고 벗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새삼 칠십 년 후가 그리워졌다. 적어도 옷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실랑이를 벌인 적은 없었는데.

그때였다.

‘…도와줄까요?’

‘네? 라크가요?’

믿을 수 없어 반문했다. 시아는 문 너머로 들려온 소리가 제정신으로 한 소리인가 진지하게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 의심을 부수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등 뒤의 조임만 풀면 될 것 같은데… 나머지는 당신 혼자서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숙녀의 의복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눈감고도 훤히 보인다는 태도다. 하기야, 그는 마도 시대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신사이니, 기본 상식 정도야 갖추고 있을 터다.

서로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 숙녀의 몸을 봐선 안 된다는 상식까지 포함해서.

‘…그럼 등만 좀 풀어줘요. 대신 절대 보기 없기에요.’

‘당신 등은 오래전에 본걸요?’

언제……?

시아는 곧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 냈다.

원래 시대의 아르카나 시내에서 테러가 벌어졌을 때, 온 등에 파편을 매달고 칠십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었다. 씨즐턴(지금은 다무스지만) 행 열차 안에서 라크시스가 등을 치료했었지.

그때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당시의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시간 여행의 파트너였기에. 지금 같은 감정이 채 싹도 트지 않았고, 아마 라크시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담백하게 치료만 했을 리 없으니까.

시아는 재깍 반문했다.

‘하지만, 그땐 서로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다른가요?’

덜컥, 말문이 막혔다. 무게 있는 물음에 대답할 도리는 없었다.

지금은 다르냐고?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예전은 어땠길래 지금과 다르다는 걸까. 정말로 다른 걸까. 라크시스와 자신은 언제나 돈독한 파트너였는데. 지금도 자신과 그는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하는 관계인데…….

이 관계가 달라진 건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달라졌다.

빗방울에 소맷자락이 천천히 젖어가듯, 새하얀 종이에 잉크를 툭 떨어트리듯, 짙은 찻물 속으로 구름 같은 우유가 번져나가듯.

알아채려면 알아챌 수 있으나, 일부러 신경 쓰진 않았던 순간들. 그것들이 켜켜이 모여 일으킨 거대한 해일에 시아는 저항 없이 휩쓸려 갔다.

그대로 몸을 뉘고 싶은 따스한 물살과 라크시스로 젖어버린 머리는 그녀로 하여금 이 순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설렌다. 두근거린다. 심장에 정령이라도 들어간 듯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금이 저리고 피부 위로 불꽃이 튀었다. 먼발치에서도 그의 체취를 알아차릴 것만 같다.

라크시스와 처음 만났을 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시아는 차마 입을 열어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다르냐고?

다르다.

그러나 이 말을 어떻게 감히 혀끝에서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가벼운 웃음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시아가 부러 대답을 하지 않음을 알아챈 남자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은 날 정말 상종 못 할 인간으로 만드는군요.’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이 정말……!’

‘저도 나름 신사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적어도 숙녀를 곤란하게 하진 않아요.’

여긴 고용인이 없어 시아와 라크시스가 단둘이 있었다는 걸 증명할 사람이 없다느니, 그래서 레이디 켈튼의 명예가 훼손될 일이 없다느니 하는 거창한 설명이 덧붙었다.

문 하나를 두고 오가는 대화가 사뭇 진지하다.

시아는 어느새 부끄러움도 잊었다.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이 드러나기까지 그녀가 벗었던 수많은 겹옷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정령들이 이 상황을 구경하기 위해 그녀의 곁을 떠나간 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대신 허튼 생각 말고요.’

‘날 믿잖아요?’

‘믿죠. 믿는데…….’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아주 작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구두 굽이 마루를 밟는 소리다.

라크시스가 배회하고 있었다. 얕은 한숨. 시아는 라크시스가 이토록 고민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저 등 뒤의 끈만 풀어준다면서… 이미 오래전에 내 등을 보았다면서.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제 와서 대체 왜 그런담…….

엄밀히 따지면 환부를 보이느라 맨살을 훤히 드러낸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슈미즈니, 페티코트니 하는 천으로 몸을 둘둘 감고 있었다.

즉, 아예 맨살을 보일 일도 없단 소리다.

라크시스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한편, 그가 문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린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숙녀는 남편을 제외하곤 가족에게조차 맨살을 보여선 안 된다곤 하지만, 그런 격식을 따지기엔 자신과 라크시스는 이미 서로의 민낯을 지나치게 가까이서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발걸음이 이어지다 멈추고는 나직한 물음이 들려왔다.

‘만일 허튼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날 싫어할 건가요?’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그의 뒷말에 허튼 생각이니, 하는 말은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라크시스를 싫어할 수 있냐고?

‘농담이에요.’

그가 산들바람처럼 작게 웃었다. 마치 아까의 말이 모두 진심이 아니었던 사람처럼, 라크시스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시아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약속했다.

그 약속에 열기가 확 올랐다.

시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혼자 부끄러워하고, 혼자 놀라고. 그의 말 몇 마디에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제 감정이 낯설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쉬이 멈출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시아는 끓는 주전자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 열려 있어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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