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6)화 (206/292)
  • 206화 

    라크시스는 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 없어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그거 말고요.”

    “어… 로켓에 대해선 못 물어봤어요.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미안해요.”

    시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대답하다 보니 정말로 그냥 놀기만 한 사람 같았다.

    라크시스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사과하란 뜻은 아니었어요.”

    포옥. 두툼한 코트가 시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쌀쌀해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나 보다.

    몸에 훈기가 돌자 진동이 멈췄다.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의 티 파티에 참석하라고 한 것도 나였고, 미스 뮐러에게 로켓에 대해 물어봐 달라고 한 것도 나였어요. 당신은 처음부터 맨덜랜드에 따라가고 싶어 했고요.”

    라크시스는 사교 활동이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겉보기엔 화려한 곳에서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보여도, 말이 독이 되고 비수가 되는 곳에서 내내 버티고 있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시아는 켈튼의 영애이면서도 사교계와 담을 쌓고 살아온 인물이 아닌가. 초심자치곤 잘해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버거웠을 것이다.

    레베카 뮐러와 아르카나 시내로 나온 것도 그녀 나름대로 레베카 뮐러와 대화하기 위해 수를 쓴 거겠지.

    “그렇지만 여기랑 거기가 같나요.”

    “맨덜랜드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에요. 거칠긴 하지만.”

    라크시스는 어느새 다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시아는 한 박자 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어깨 위에 여전히 그의 코트가 얹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마법일 테지. 라크시스가 무언갈 소환하는 장면은 언제나 찰나에 이루어져 목격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맨덜랜드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궁금하진 않나요?”

    조각 같은 얼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럽다. 가로등 불빛에 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이 만월처럼 아름다웠다.

    기대감이 서린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아까 전에 내비친 불퉁함은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그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시아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건진 건 좀 있어요?”

    “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걸 건졌죠.”

    라크시스는 코트 안주머니를 뒤져서 자그마한 기계를 꺼냈다. 딱정벌레를 닮은 자그마한 태엽 장치였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자 황동으로 만든 등껍질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어라, 어디서 많이 봤는데.

    시아는 장치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흙도 좀 묻어있고, 틈새를 보니 녹도 좀 슬어있다. 마치 몇십 년을 방치해 둔 기계처럼 생겼달까.

    라크시스나 요르문이나 기계를 이렇게 관리할 성격은 아닌데…….

    “조심.”

    딱딱한 등껍질을 누르자 여섯 개의 황동 다리가 철컥, 하고 튀어나왔다. 아주 날카롭고 위험했다.

    예컨대 사람 살갗에 대고 누르면 그대로 박혀 버릴 것 같이 생겼달까. 이런 데 찔리면 감염은 피할 수 없다. 시아는 질겁하며 손가락으로 딱정벌레 기계를 대롱대롱 잡았다.

    그나저나 어디서 본 것처럼 생겼는데……?

    “뭔지 알겠어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언뜻 떠오르는 과거의 한 조각에서 이 자그마한 기계가 사람 살을 파고들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힌트 줄까요?”

    시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렇게 묻고선 처음 나타났던 모습 그대로 가로등에 비스듬히 기대곤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밤바람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잔머리가 뒤엉켜 이마에 붙었다. 시아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귀 뒤에 꽂았다. 라크시스는 바람을 무시한 것처럼 홀로 고상하게 서 있었다.

    여전히 입은 꾹 다문 채였다.

    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힌트 준다면서요.”

    “맨입으로 준다곤 안 했어요.”

    “갑자기 치사하게 구는 거예요?”

    이 사람이 말이야. 궁금하게 해놓고선!

    시아가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대체 그가 무엇을 요구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궁금해진다.

    라크시스가 시아의 손을 천천히 잡아 올렸다. 그의 손이 밑에, 시아의 손이 위에.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섬세하고도 은근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움킨다. 그러고는 마치 손등에 키스라도 할 것처럼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시아, 나중에 말입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핀잔을 주듯 툭 내뱉은 것과 다르게 시아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라크시스는 제 손가락을 하나씩 엄지로 쓸고 있었다. 외출을 나간다 하여 요크 부인이 장갑을 끼워뒀는데, 실크의 보드라운 감촉 위로 어렴풋한 열기가 야릇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다시금 소파에서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기다려 달라는 남자와 기다리겠다는 여자.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그날 이후 정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아는 불현듯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파드득 몸을 뒤로 물렸다. 라크시스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제게 한 시간만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한 시간이라니……. 이미 라크랑 시간 여행 내내 붙어있었잖아요.”

    그렇게 말하곤 시아는 제풀에 놀라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돌이켜 보면 시간 여행 내내 그와 함께 있었으니까.

    미혼인 남녀 둘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추문이 되는 시대에, 라크시스와 단둘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가.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남들이 침범할 수 없는, 당신과 둘뿐인 오롯한 시간을 갖고 싶어요. 어려운 일일까요?”

    열기가 눈가에 뜨끈하게 돌았다. 어지럽다. 갑자기 그런 시간은 왜……. 지난번에 하던 일을 마저 이어서 하려고?

    하지만 그날의 일은 충동에 가까웠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예법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정석을 지키는 신사였다. 그런 그가 구애도, 청혼도 없이 충동으로 시작한 일을 재개하자고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라크시스는 정말로 자신과의 시간이 필요해서 저런 말을 한 걸 텐데. 어쩌면 시간 여행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런 걸 거야. 남들에게 들켜선 안 될 대화일 테니 둘만의 시간을 갖자는 거겠지.

    멋대로 그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자신을 애타게 하는 것도 장난일 수 있었다.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그런 반응을 즐기는.

    그러나 그런 것도 관심의 일환이라는 걸 시아는 몰랐다. 라크시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시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렵진 않죠.”

    승낙의 의미를 담은 대답에 라크시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분거리던 손길도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라크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우아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깃에 가려진 피부가 좀 붉긴 했지만, 빛이라곤 노란 가로등이 전부인 아르카나의 밤거리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은 왜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죠. 궁금하면 기대해도 좋아요.”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능글맞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그 한 시간으로 뭘 할진 나중에 알기로 하고. 이 딱정벌레는 뭔데?

    “그래서 답이 뭔데요?”

    “맨덜랜드에 가면 알려줄게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잔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다 귓가에 꽂아주었다. 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저 놀리는 거예요?”

    “진짠데. 여기서 말해 줘봤자 와닿지 않을걸요.”

    뭐야…….

    시아는 결국 답을 듣지 못했다.

    치사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지. 하지만 머리는 이미 라크시스로 가득 차 있어 새로운 사고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멍하니 길바닥의 보도블록을 덧그리는 사이, 시원한 바람이 둥그렇게 불기 시작했다. 포장된 길 틈새에 낀 돌가루며 먼지가 덩달아 발치로 날아오른다.

    시아는 자신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라크시스에게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탓이다.

    공간이동의 시작이었다.

    버슬까지 꼼꼼히 챙겨 넣어 부풀린 치마가 사방으로 나풀대기 시작했다. 치마가 화악 날아올라 높다란 구두와 얇은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가볼래요?”

    “이 차림으로요?”

    “하긴 그 차림으로 맨덜랜드를 돌아다니면 표적이 되긴 쉽겠네요.”

    김이 빠진 것처럼 바람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목적지를 확정하지 못한 탓이다. 라크시스는 눈썹을 까딱이는 사이, 시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켈튼 저에 가면 쉽게 나오지 못할걸요.”

    분명 요크 부인에게 붙잡힐 것이다.

    애초에 로드리치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 것이라고 한 아가씨가 난데없이 늦은 시간에 귀가한 것도 문제인데, 마차도 없이 라크시스에게 안겨 와선 다시 나갈 테니 노동계급 같은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게다가 목적지는 흉흉하기로 소문난 맨덜랜드라고? 이 시간에?

    안 봐도 뻔했다. 모시는 아가씨라 등짝을 때리지 못할 뿐, 요크 부인은 평생 들어도 모자랄 잔소리를 퍼부으며 하녀들에게 방을 지키라 명할 것이다. 아가씨가 따뜻한 초콜릿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까지 확인하라고 당부하며 말이다.

    ‘그렇다고 날이 밝고 나면 허락을 해줄 것이냐…….’

    어림도 없다.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참 골치 아픈 일이다. 물론 주인이 가는 길을 고용인들이 막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요크 부인에게 찍히는 건 사양이었다.

    그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면 되겠네요.”

    “어디로요……?”

    “당신도 아는 곳이에요.”

    “제가 아는 곳이라고요?”

    시아의 등을 덮고 있던 코트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라크시스의 코트 속에 몸을 묻고 있었다.

    발밑이 상쾌하다. 곧 공간이동이 시작될 터였다.

    “꽉 잡아요.”

    라크시스가 늘 씌워주던 모자가 없었다. 딱 한 번, 눈을 뜨고 공간이동을 해본 적이 있었던 시아로선 그 구역질 나는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라크, 혹시 잊은 거 없어요?”

    정수리 위에서 청량함이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청량한 소리만큼이나 시원한 향을 품은 것이 시아의 눈을 가렸다. 라크시스의 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