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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5)화 (205/292)
  • 205화 

    문득 아까의 티 파티가 떠올랐다.

    라크시스가 알리나 황제의 남편이 될 뻔했다니.

    중후한 분위기의 황제 곁에 라크시스가 서 있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황제에게 이미 남편이 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라크시스가 수천 년을 고독하게 살아온 마법사이기 때문인 걸까.

    알리나가 노년을 맞아도 라크시스는 세월을 비껴간 모습 그대로 지금처럼 있을 터다.

    라크시스가 누군가의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신경이 곤두섰으나, 이젠 시아 자신이 늙어도 홀로 지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라크시스가 떠오르고 만다.

    만일 광룡의 부활을 막고 그가 무사히 살아남아 칠십 년을 기다려 자신을 만나러 온다면…….

    그 후에 나는…….

    그럼에도 나는 그와 함께하고 싶은 걸까.

    폭 늙어버린 자신 옆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장난스레 미소 지을 라크시스를 생각하니 퍽 웃기긴 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때까지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 진짜로 라크를 좋아하는 걸까.’

    그도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감히 그를 좋아한다는 말을 멋대로 입에 담아도 되는 걸까……?

    ‘다음은 당신에게 허락받은 후에 할 겁니다.’

    라크시스의 말이 지나간 자리가 데일 듯이 뜨겁다.

    스치는 코끝, 떨리던 숨결. 터질듯한 심장. 간질거리는 공기와 따뜻한 햇볕 요동치는 시선과 일렁이는 열기.

    고지식하게 절차와 예법을 지키던 그 남자가 그렇게나 흐트러진 건 처음 봤었다. 그는 자신의 눈동자를 덧그리듯 한참이나 눈에 담고 있었다. 그건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레베카는 시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당황하고 말았다. 시아가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삐걱거리더니 애꿎은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괴롭혔기 때문이다.

    눈밭처럼 하얗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미간이 찡그려지고, 코까지 움찔거린다.

    시아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오해했는지 레베카가 다급히 사과했다.

    “아녜요. 제가 실언했죠. 두 분이 서로에게 진심인 건 온 제국이 아는데.”

    “레베카, 그건…….”

    “대모님은 옌 경이 부탁하면 언제든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마치셨다고 했지만, 막상 레이디께선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그거야 난…….

    시아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한 말을 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시아가 이 시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칠십 년 후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 옌이 달갑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만약 내가 마도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가 청혼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승낙하려 했을까.

    해일처럼 밀려드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시아는 멋대로 회전하는 사고를 멈출 수 없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내달리는 감정은 이미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래서 첫사랑이라는 게 힘든 것이다. 처음 맛본 달콤한 감정에 중독되어 무엇을 해도 설레고, 까마득한 미래까지 홀로 상상해 버리고 마니까. 시아는 본인이 그런 상태라는 것도 몰랐다.

    “레이디 켈튼, 괜찮으세요?”

    “…그럼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카페가 한산해졌다. 그새 시간이 꽤 흘렀는지 테이블마다 가득했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없었다.

    ‘결국 로켓 속 숫자에 대해선 못 물어봤네.’

    목표했던 건 달성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도리어 속을 내보이게 된 건 이쪽이었다. 레베카는 의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빈틈을 파고든 공격에 시아의 정신은 너덜거리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에는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자리 잡은 후였다. 도드라진 가스등 밑으로 환락이 교차한다. 한층 농밀해진 골목마다 붉은빛이 내비쳤다.

    숙녀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한량 행색을 한 신사들과 퇴근한 노동자, 뒷골목 패거리, 소매치기 등 어둠이 몰고 온 아찔한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자들만이 남았다.

    외출이 길어진 주인을 기다리는 마부들만이 대로변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로드리치가의 마부도 시아와 레베카가 내려오길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더 나누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시아야 상관없었지만 레베카에겐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레이디 켈튼. 덕분에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솔직히 레이디가 아니었다면 이런 얘길 털어놓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레베카의 마음이 편해졌다면 전 그걸로 됐어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레베카는 즐거웠다 하니,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베카, 나는? 나한테는 왜 비밀로 했냐구우!”

    옆에서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 에밀리도 귀엽고 말이야.

    ‘라크는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맨덜랜드는 아르카나와는 아예 다른 분위기라고 했지.

    스산한 부둣가를 누비고 다니는 두 마법사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겨가지고선 말이야.

    두 사람이라면 슈테른베슈테크의 지하 감옥에서 했던 것처럼 맨덜랜드를 진작 장악했을 것만 같았다.

    봉인의 실마리는 찾았을까. 그보다 끼니는 챙겼을까 모르겠다. 요르문은 무언가에 빠지면 식사를 거르곤 했는데, 라크시스는 대부분 같이 있는 사람에게 맞춰주는 편이었으니까.

    시아는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말아쥐며 고민했다. 이 차림으로 맨덜랜드에 가긴 무리였다. 저택에 돌아가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켈튼 저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면 한참 늦겠네.’

    스크롤을 자처한다곤 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라크시스를 부르기엔 미안했다.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물론 라크시스가 밤잠 없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차라리 내일 아침에 연락할까.

    시아는 손가방 속에 얌전히 들어있는 신호기를 만지작거렸다. 만든 사람을 닮아 섬세하고 유려한 황동 새 장식이 그녀의 손에 맞춘 듯 알맞게 들어왔다.

    결국 시아는 새를 돌리지 않았다. 신호기를 도로 가방에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갈까요?”

    로비에서도 느껴지는 쌀쌀한 바람에 절로 숄을 여미게 되었다. 블랑 사장 부부의 인사를 받으며 시아는 카페를 나섰다.

    켈튼 앞으로 값을 달아놓는 사이, 레베카와 에밀리는 점원의 귀띔을 받고 먼저 나간 상태였다. 마부가 부르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런데 보통 마부가 주인을 따로 불러내기도 하던가?

    조그만 종이 짤랑, 문을 울리며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희미한 궐련 연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라…….

    “레베카? 에밀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소녀가 온데간데없었다.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진땀을 흘렸다. 설마 날 먼저 두고 갔으리라고……. 하지만 그런 의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엔진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머리가 백지장처럼 멍했다. 화가 난다기보다 그저 당황스러웠다.

    레베카와 에밀리는 이유 없이 일행을 버리고 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페에선 분위기도 좋았잖아.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시아는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마를 쓸고 지나가는 밤바람에 기이한 마력이 묻어나왔다.

    깜빡, 깜빡.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로등 불빛이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숲 내음이 난다. 쌉싸름한 궐련 연기를 밀어내고 청량한 숲 향기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익숙한 체취였다.

    시아의 몸이 우뚝 멈췄다. 경험과 본능이 무언가를 감지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 신호를 보냈다.

    쿵. 쿵쿵.

    기묘한 고양감이 발끝에서부터 내달렸다.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에 고여 든 설렘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만든다.

    익숙한 낯섦. 낯선 익숙함. 여기서 이렇게 맞닥뜨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시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노란 가스등 밑, 은발의 마법사가 그녀를 바라보며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시아.”

    아…….

    라크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뒤로 그를 닮은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돌아본 모습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짝 토라진 듯한 그의 표정이 마치 그녀를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르카나 구경은 즐거웠나요?”

    “아, 그게…….”

    불퉁한 듯 장난스럽게 되묻는 말조차 달콤하게 들리는 걸 어떡하면 좋을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말이죠.”

    라크시스는 제대로 토라진 듯했다. 하긴, 티 파티가 끝나고 연락을 주기로 하긴 했었지. 사실 시아도 레베카와의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게다가 해가 넘어가도록 레베카와 함께 있었으면서 쪽지의 숫자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했고 말이다.

    뒤늦게 미안함이 몰려왔다.

    “날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어요. 그게 아니면 내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적 없어요, 진짜로요.”

    시아가 파드득 부정하자 라크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시아는 안절부절못했지만, 라크시스는 그녀의 반응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불 꺼진 카페를 훑어보았다.

    “이런 곳이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제 취향이라기보단… 레베카의 취향일 것 같은 곳을 골랐던 것뿐이에요.”

    “그런가요.”

    라크시스는 뜬금없이 레베카의 이름이 튀어나온 사정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일 뿐이었다.

    시아는 민망해져서 물었다.

    “식사는 했어요?”

    “제국인들의 하루는 차로 시작해 차로 끝나죠.”

    그 말인즉, 차 한 잔으로 저녁을 보냈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라크시스가 차를 마실 때 티 푸드를 즐기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우유와 각설탕 두 개. 그가 티 타임에 필요로 하는 건 그것이 전부였다.

    라크시스도 은근 잘 먹는 편이었는데. 식사 예절을 워낙 칼같이 지켜서 안 그래 보이는 것뿐이지.

    먹은 게 없다는 말이 왜인지 식사할 시간도 없이 고생했다는 말로 들려서 괜스레 미안해졌다.

    라크시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새삼스러운 질문이네요. 그러는 당신은 뭘 좀 먹었고요?”

    “보시다시피요. 한 번에 단 음식을 이렇게 많이 먹은 적도 처음이에요.”

    시아는 카페 블랑을 눈짓하다 멈칫했다. 평소 같았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봉인을 찾으러 맨덜랜드까지 갔는데, 이쪽은 그저 수도에 남아 편하게 하하 호호 놀았다는 걸 고백한 꼴이 됐다.

    실제론 놀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시아는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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