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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4)화 (204/292)

204화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에 의해 구경거리나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강자가 만들어 낸 사회의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레베카 뮐러.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의 가호를 받는 데다가 다이아몬드 광산과 뮐러 사를 물려받은 프레디 뮐러의 유일한 핏줄.

그러나 이 대단한 부와 명예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레베카에게 식민지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레베카의 장점만을 바라봐주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레베카를 만나본 사람은 거의 다 그녀의 때 묻지 않은 사랑스러움에 반했으니까.

로드리치가의 메이드로 일했다는 사실도 레베카가 가진 재력과 매력 앞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여전히 존재했다. 사실 관습과 사회가 만든 편견에 갇힌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니 마도 시대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의 결이 다른 건 아닐 터다.

차별은 자신과 다른데다가 약하기까지 한 존재들을 향한 무례하고 비논리적인 행동이니까.

시아는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를 상기했다.

고아 출신으로 명문 아카데미에 들어온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던 친구들. 시아가 겪은 것은 그녀가 유약한 성격이었더라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만큼의 괴롭힘이었다.

하얀 테이블보에 진한 얼룩이 뚝뚝 생겨났다. 고개 숙인 레베카에게서 울음 섞인 고백이 흘러나왔다.

“사실 정식으로 약혼한 적도 없어요. 저와 리암 모두 어릴 적에 그저 가문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갔을 뿐인 게 전부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는데…….”

안타까웠다.

그렇다. 레베카의 말마따나 그녀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혼 역시 그녀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레베카는 그저 힘들 때 제게 끊임없이 애정을 보내주었던 남자에게 답을 했을 뿐이다. 이젠 그녀도 남부럽지 않은 위치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야 티 파티에서의 모든 일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샤샤 블레어가 제 오라비의 이야기를 한 탓에 레베카의 기분이 엉망이 되기 시작한 것일 테다.

그간 피앙세니, 뭐니 계속 편지를 보내놓곤 막상 레베카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그녀를 무시하더니, 샤샤 블레어의 입을 통해 그가 결혼 상대를 구한다는 걸 알게 되자 감정이 북받친 것이다.

여기서 리암의 편지를 대신 전달해 준 상대가 따로 있는지의 여부는 지금의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리암은 레베카를 외면했고, 그녀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이런 인간한테 레베카를 도와달라고 부추겼었다니… 내가 미쳤지. 레베카, 그런 자식은 쳐다도 보지 마.”

에밀리가 레베카에게 스푼을 쥐여 주며 오이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릇 밑에 얼음 모양 마정석을 깔아둔 탓에 아랫부분에 있던 아이스크림은 제법 얼어있었다.

에밀리는 아예 셔벗처럼 사각거리는 아이스크림을 퍼 올려 레베카에게 직접 떠먹여 주었다. 레베카는 눈물 젖은 얼굴로 헤,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밀레이나가 있었다면 하지 못할 행동이다. 두 소녀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바라보며, 시아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레베카의 정체는 이 편지에게서 새어 나간 거야.’

그동안 내내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실마리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밀레이나는 레베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레베카가 편지를 받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그 내용까진 몰랐겠지.

뮐러가의 반지와 레베카의 정체가 어떻게 들통났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정답을 알게 되었다.

아까의 두 가지 가설 중 하나가 레베카의 이야기로 폐기된 탓이다.

리암 블레어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간 자신에게 대부호의 딸인, 병약한 제국인 약혼자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편지를 써왔으니, 가멜인 혼혈 출신인 레베카를 외면한 것이겠지.

만약 약혼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더라면, 레베카의 정체가 밝혀져도 이렇게 무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레베카는 편지의 발신인이 그때그때 달랐다고 했다. 그 말인즉, 그녀가 익명의 B에게서 편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중간 전달자가 존재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단순히 편지를 전달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편지를 전달하던 사람은 리암과 레베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로드리치가의 메이드 헬렌의 진짜 정체도 말이다.

‘…그자야. 레베카의 정체를 카얄에게 알린 사람이.’

마침내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진척되었다.

편지 전달자를 찾아낸다면 카얄이 지금껏 봉인의 소식을 알아 온 경로를 알아내는 것과도 같았다. 편지 전달자는 분명 황혼 국교회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사람일 터다.

할 일이 명료해졌다. 이젠 리암 블레어에게 접근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포위망을 좁혀서 그의 편지 전달자가 눈치채고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리암 블레어와 만나려면 그가 나타날 법한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알현식에 티 파티까지, 세간의 관심을 한 번에 받으며 요란하게 데뷔한 일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는구나.

라크시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라면 중앙 우편국의 직원 명부를 뒤져서라도 리암의 편지를 실어나른 집배원이 누군지 알아낼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아는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깍지끼곤,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 당신은 리암 블레어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난데없는 질문에 레베카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고마운 사람이었죠.”

그래. 바로 그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마운 사람.

알현식이며 무도회 준비로 내내 들떠있던 아가씨가 왜 리암에게 연락을 했겠는가. 수많은 신사들과 춤을 추며, 시선을 교환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그토록 기다려왔는데 말이다.

리암과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래도 다른 영애들에 비해 춤 신청을 받는 일도, 무도회에서 환영받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레베카는 어디에서도 주눅들 만한 위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무려 황제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은 레이디 아니던가.

제아무리 사랑 없는 결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시대라지만, 레베카 정도의 레이디는 사랑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보호자인 밀레이나조차 아무것도 강압하지 않는데 말이야.

원래 시대의 친구, 마리가 떠올랐다. 가문끼리의 약혼으로 상대가 정해져 버리는 바람에 펑펑 울던 마리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시아는 테이블보처럼 젖어버린 레베카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요. 레베카. 받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돌려줄 의무는 없어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약혼할 필요도 없고요.”

“레이디 켈튼…….”

지금이야 레베카 또래의 여인들이 결혼적령기라고 하지만, 칠십 년 후에는 또 달랐다. 그리고 레베카에겐 그런 관습 따위에 굴하지 않아도 될 힘이 있었다.

“레베카도 황제 폐하께서 최고의 찬사를 보낸 레이디잖아요? 레베카의 매력을 알아봐 주고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신사가 분명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레베카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좋고요.”

진짜 사랑.

사랑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본능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 오지 않겠나. 바로 이 사람이라고. 순간의 감정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개인의 몫이지만 그 감정을 처음 쏘아 올리는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겠지.

그런 순간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함께 할 상대를 구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 시대엔 그렇게 짝을 찾는 사람들이 많고 말이다.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약혼을 할 필요는 없단 뜻이었어요.”

말을 마치고 나니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베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런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다 했담. 결혼은커녕 의술사 공부에 매진하느라 연애 한 번 제대로 안 해봤으면서, 내가 뭐라고!

시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애꿎은 디저트만 마구 헤집었다.

갈리프도흐 메스를 주문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크림을 엉망으로 망가뜨려도 티가 나지 않으니 말이다.

선망과 존경이 뒤섞인 눈빛이 적막을 타고 흘러온다.

누가 보면 결혼 두세 번 한 사람이 조언한 줄 알겠어.

곁에 있는 에밀리도 입을 벌리고 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였다.

“애초에 헬렌, 아니, 레베카 취향도 아니었어요. 목석인지, 돌덩이인지, 구분도 안 가는 낯짝의 싸한 남자보단 막스 블레어같이 잘생기고 화려한 남자가 레베카 취향이었다니까요?”

정신이 돌아온 에밀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졸지에 취향이 밝혀진 레베카가 시뻘게져선 에밀리를 말렸다.

“에밀리!”

“왜, 뭐. 너도 솔직히 말해 봐. 지난번엔 막스 도련님이 좋다고 했었잖아. 차라리 잘됐다니까? 이런 재수 없는 남자 같은 건 잊어버려! 나 원 참, 리암 그 인간은 속이 시커메선 가식덩어리 같으니.”

결국 레베카는 에밀리 말리기를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에밀리가 저 대신 화내준 것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테이블에선 스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레베카가 입을 다물어 버린 탓이다.

그녀가 트라이플 한 그릇을 통째로 비우고 난 후였다.

“그럼 레이디 켈튼은 옌 경을 진심으로 좋아하시나요……?”

뭐?

【 유령선의 진실 】

기습적인 공격에 시아는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입에 물고 있던 스푼을 툭 놓쳐버렸다. 드레스가 크림으로 엉망이 되는 것도 몰랐다.

내가 라크를 진심으로 좋아하냐고?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줄곧 속으로만 되뇌었을 뿐. 그 생각은 뜬구름처럼 머릿속을 맴돌다가 단 한 번도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라크시스는 어느 샌가부터 시아의 삶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에 그가 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에스코트를 자처하며, 어쩌면 그조차도 핑계였을지 모르지만.

고귀한 신사를 자처한 남자는 세상 모든 이를 홀리고도 남을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굴면서, 작정하고 시아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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