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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3)화 (203/292)
  • 203화 

    “제, 가요?”

    “갈리프도흐 아카데미생들이 먹던 음식이라고 들었는걸요. 매년 퀸즈토리엄이 끝날 때마다 수천 개의 머랭으로 주방이 가득 찬다고… 메이 부인께 들었어요.”

    메이 부인은 또 누구야.

    레베카는 메이 부인이 로드리치 저택의 주방 실세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갈리프도흐 아카데미의 기숙사 식당에서 오래 일했다고 한다.

    시아는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퀸즈토리엄은 크리켓 경기였다. 애초에 머랭과 딸기, 크림 같은 걸 뒤섞어 그릇에 내놓던 그 디저트엔 이름 같은 게 없었다고 들었다. 맛이 워낙 괜찮아 아카데미생 만찬이나 퀸즈토리엄 같은 대규모 행사 때만 먹을 수 있던 디저트가 어느새 바깥까지 알려져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단다.

    엉망으로 뒤섞여 그릇에 담기다 보니 메스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괜히 아카데미 출신으로 지목받아 이런 설명을 하고 있자니 민망해지고 말았다.

    시아는 눈알을 굴리며 깜빡였다. 설명을 마치고 나자 두 소녀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와, 신기해요. 아카데미생이었던 레이디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마도 시대의 숙녀들은 대부분 교육을 가정교사에게서 받기 때문에 신사들처럼 갈리프도흐 출신인 시아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결국 시아는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며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그렇게 시킨 디저트들은 줄줄이 나와 결국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다 먹지도 못할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에밀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레베카의 얼굴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녀에게서 웃음꽃이 피어오르자, 에밀리가 시아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 맞다! 나 루즈 부인에게 부탁받은 게 있는데! 올 때 찻잎을 좀 사 오라고 하셨거든.”

    거짓말이었다. 시아와 레베카가 단둘이 남겨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에밀리를 붙잡았다.

    “괜찮아. 여기 있어도.”

    “…레베카?”

    에밀리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워. 에밀리 너도, 레이디 켈튼도 말이야. 제 기분을 풀어주시려고 이렇게 하신 걸 알고 있어요. 숙녀답지 못한 행동이었는데, 너그러이 봐주시고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와 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레이디 켈튼.”

    엉거주춤 일어났던 에밀리가 조심스레 도로 앉았다. 레베카는 시아를 향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죠?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아……. 시아는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말았다. 마냥 천진한 소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노련한 숙녀 같다.

    “들켜 버렸네요. 하지만 전 그보다 레베카가 왜 힘들어했는지를 알고 싶은걸요.”

    “안 그래도 궁금해하실 것 같았어요.”

    레베카가 손가방에서 곱게 접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딱 봐도 고급지처럼 보이는 게, 연서에 가까운 편지들인 것 같았다. 그걸 본 에밀리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시아가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황궁에서 나올 때부터요. 사실 레이디 켈튼이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 티 파티에 갈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요.”

    시아는 당황했다. 내가 그렇게나 티가 많이 나는 사람인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황궁으로 향할 땐 맨덜랜드에 따라가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울적해져 있었지.

    레베카가 조용히 키득거렸다.

    “티 파티에 갈 때 레이디 켈튼이 마차에서 지었던 표정이 아까 제 표정과 똑같았거든요.”

    결국 모든 걸 들킨 상태에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레베카가 한결 후련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시아는 레베카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리암 블레어에게서 편지를 받았었다고요?”

    “확실하진 않지만요. 사실 처음엔 대부님이 보내주시는 편지라고 생각했어요.”

    레베카는 가져온 편지 중 하나를 빼내어 시아에게 내밀었다.

    “가장 최근에 받은 편지예요. 로렌시아 호에 타기 직전이었죠.”

    […부리가 마대자루처럼 늘어나는 새가 물고기를 낚아채고, 은빛 물고기 수백이 떼지어 바다 위를 나는 장면은 정말로 장관이라지. 레베카 당신이 하루빨리 쾌차하여 함께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곳 남부는 모르간과 달리 따뜻해서 당신도 충분히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거요. 당신과 뱃놀이를 할 수 있다면 수도에서 남부까지 업고서라도 데려가 줄 텐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들 하지. 레베카, 언제나처럼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소. 답장을 받고 싶지만, 그 답장이 혹시라도 당신의 부고일까 봐 받기 싫은 이 모순적인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보고 싶은 나의 피앙세. 이젠 스쳐 지나가도 당신은 내 얼굴조차 모르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을 알아볼 테니 괜찮소. 난 그대를 단번에 알아볼 자신이 있으니. 다음엔 수만 피트 상공에서 제국을 내려다본 감상을 적어주리다. 그때까지 잘 지내길 바라오.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꼬마 숙녀의 B가.]

    편지를 읽은 시아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레베카 뮐러가 병약한 사람인 줄 알았나 보네요.”

    “선대 블레어 가주께선 아들에게 약혼자를 만나지 못하게 한 이유를 이렇게 둘러대셨나 봐요.”

    레베카는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편지의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피앙세’, 그 한 단어가 잉크를 먹고 편지지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처음엔 어디에 다녀왔고, 무엇을 보았다는 내용이 전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안부를 묻더라고요. 저를 피앙세라 부르고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약혼자를 대하듯 진짜로 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죠.”

    게다가 수만 피트 상공에서 제국을 내려다본 감상을 말해 주겠다니, 이건 로렌시아 호의 이야기가 아닌가.

    ‘정말로 리암 블레어의 편지란 말이야?’

    리암 블레어도 로렌시아 호에 있긴 했으니… 정황이 들어맞기는 했다. 그럼에도 시아는 여전히 이 편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레베카는 애초에 출생조차 세상에 알리지 못한 뮐러가의 아가씨였다.

    남들은 프레디 뮐러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고작 가문과 가문의 약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나본 적도 없는 병약한 약혼자를 이렇게나 챙긴다는 게 말이 되나…….

    무언가 이상했다.

    ‘…리암 블레어는 어떻게 알았을까. 레베카가 헬렌의 삶 뒤에 숨어있었다는 걸.’

    곰곰이 생각한 끝에 시아는 마침내, 그녀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로드리치가의 메이드 헬렌에게 편지가 왔다는 건 리암 역시 처음부터 헬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레베카를 병약한 약혼자 취급을 했다고……?

    가설은 두 가지였다.

    리암이 진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편지를 이런 식으로 썼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리암 대신 레베카에게 편지를 전달해 주던 사람이 있었거나.’

    후자의 경우라면 레베카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늘어나는 셈이다. 어쩌면 그자가 메이드 헬렌의 정체를 카얄에게 알려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아는 일단 의문을 감추고 레베카를 위로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약혼한 상대를 이렇게 그리워하면서 편지를 보냈다는 건… 리암 블레어가 당신을 진짜로 사랑한다는 뜻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았겠지만요…….”

    레베카는 울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뒤이은 그녀의 속사정은 정말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레베카 뮐러라는 게 밝혀진 후에 태도가 돌변했다, 그 말인 거죠?”

    로렌시아 호에서의 일이 끝나자마자 레베카는 정식으로 리암 블레어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답신을 주지 못했으며, 약혼자의 신분으로 언제든 만나러 와도 좋다며 말이다.

    정식으로 약혼을 한 후 편지에 적은 대로 함께 제국 곳곳을 여행하자며, 고급지를 사다가 말린 꽃을 붙이고 향수를 뿌려 정성스레 편지를 보냈으나 리암에게서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에밀리가 길길이 날뛰었다.

    “이거 완전 나쁜 놈이네요! 그래,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래요. 눈앞에 없으니까 감히 이렇게 말하는 거지만, 헬렌이 헬렌일 땐 친절했던 사람이 레베카라는 게 알려지고 나니까 대놓고 피하는 거 있죠?”

    진짜네, 맞아. 그래서 그런 거야.

    에밀리는 최근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며 퍼즐을 맞춰나가고 있었다.

    레베카와 시내로 외출했다가 클럽 로얄에서 나오는 리암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태도가 지나치게 쌀쌀맞았다든가 했던 것 말이다.

    당시엔 에밀리도 레베카의 속사정을 몰라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뒤늦게 그것을 약혼녀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불쑥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 지금껏 어? 이렇게 다정하게 편지를 보내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을 할 수 있냐는 말이야.”

    “에밀리,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구! 네가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말이야!”

    결국 시아가 나서서 진정시키고 나서야 에밀리는 조용해졌다. 에밀리의 소란으로 이목이 집중되자, 시아와 레베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었다.

    시아가 오이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주자 그제야 에밀리의 분노가 한풀 가라앉았다.

    반죽에 가까운 연녹색의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에밀리는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보고 대신 화내준 친구에게 미안한 듯 조용히 말했다.

    “제가 가멜인 혼혈이라 그런 거예요. 다른 숙녀들과 다르게 피부가 검으니까, 가멜인의 피가 섞인 약혼자는 부끄러우니까…….”

    레베카의 고개가 푹 꺾였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 시아는 움찔거리는 레베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새삼 이곳이 칠십 년 전의 마도 시대라는 것을 깨닫는다.

    산업 발전과 마도 공학으로 문명의 발전을 누렸던 제국 최고의 번영 시대. 마도 시대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국의 부에 희생된 피와 목숨이 이 시대에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제국 북부로 불리고 있는 지르가나는 과거 마정석의 가치를 일찍 알아버린 제국에 의해 복속된 공국이었다. 시아가 역사를 바꿔 버린 다무스 역시 바뀌기 전 시간 속에서는 케르딕 7세 시절, 제국이 묵인한 마약상으로 인해 은을 잃고 재정이 약해져 제국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가멜이라고 다를 바가 있으랴.

    제국에게 있어 남대륙은 열대 기후와 너른 땅, 귀한 향신료와 값싸게 부려 먹을 인력이 가득한 보물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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