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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2)화 (202/292)
  • 202화 

    와, 살벌하네.

    시아는 티 파티를 빙자한 칼부림에 조용히 물러나 있었다. 차라리 아까처럼 술란에 대해 질문하는 게 백번은 나았다.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걸쳐 있던 실루엣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레베카였다. 소녀는 무엇 때문인지 얼굴이 잔뜩 굳어 침울해져 있었다. 아마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이 낯설고 무서워 그런 거겠지.

    ‘이렇게 되면 뭘 물어보기가 힘든데…….’

    애초에 티 파티에 잠자코 참석한 건 라크시스 때문이었다. 기껏 그녀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시아가 빠지는 것도 그림이 좋지 않을 것이요, 무엇보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로켓 속 쪽지에 대해 알아다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런 레베카에게 밀레이나는 위로 대신 단호한 지적을 했다.

    “레베카. 표정 관리를 하거라.”

    그 말에 레베카가 바싹 졸아들어 억지로 웃는 게 보였다.

    시아는 레베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낯설고 무서운 게 아닌 것 같았다. 무얼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한껏 기대했다가 실망한 눈치다.

    ‘뭔가 있구나.’

    무엇 때문에 그럴까? 티 파티 초반엔 이러지 않았는데…….

    레이디 로젠버그와 샤샤 블레어의 대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침울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둘의 대화 중 레베카의 심경을 건드린 내용이 있다는 뜻이었다.

    밀레이나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레베카가 그저 겁을 먹었다고만 생각한 듯했다.

    “폐하!”

    만일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조지 황자가 아니었더라면 티 파티의 미묘한 신경전도, 레베카의 우울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왈! 왈왈!

    새하얀 푸들이 발발거리면서 요란하게 뛰어 들어오자 마찬가지로 짧은 다리를 종종거리며 황자가 알리나에게로 달려왔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들과 동시에 알리나의 무장이 해제되었다.

    “조지.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해리가 여기로 뛰어 들어왔는걸요.”

    “네가 풀어준 건 아니고?”

    헐레벌떡 쫓아온 시종이 가발이 떨어지도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걱정하지 말거라. 개가 멋대로 뛰어다닌 것으로 그대들을 탓하진 않으니.”

    황제는 조지 황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나 관대해졌다. 알리나는 흐뭇하게 조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지. 손을 깨끗이 해야지.”

    정원을 헤집기라도 했는지 조막만 한 손엔 푸들의 털과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헤헤.”

    조지는 대답 대신 몸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결국 녹아내린 건 알리나였다. 달콤한 쿠키 하나를 집어주자 조지는 두 볼이 터져라 오물오물 잘도 먹었다.

    저 작은 아이가 헬릭스 황자 전하의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시대감에 신기해하며 시아는 레베카를 살폈다.

    레베카는 조지 덕분에 아까보단 기분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레베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좀처럼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아르카나 시내의 경치 좋은 카페들을 떠올려 냈다. 마도 시대에서 시내 구경을 한 건 정말 잠깐뿐이었지만 시아의 눈썰미는 잡다한 풍경을 순식간에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내가 여느 레이디들처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더 수월했을 텐데.

    ‘레베카의 취향은 좀 더 이쪽이려나.’

    시아는 잠시 라크시스를 떠올렸다가 그만두었다. 잠깐이라면 상관없을 것이다. 어차피 맨덜랜드 쪽에는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까, 요르문과 둘이서도 수월하게 목표를 이루고 있겠지.

    애초에 군말 없이 티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던 건 레베카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로켓 속 쪽지가 무언지 물어보기 위해서였으니까.

    레베카의 시 낭송과 미스 로젠버그의 노래까지 마친 후 마침내 길고 긴 티 파티가 끝났다. 유리온실을 나서며 시아는 레베카를 슬쩍 잡아당겼다.

    “레베카, 괜찮아요?”

    “네? …괜찮냐니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지.

    밀레이나에게 주의를 듣고 난 후로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레베카는 정곡을 찔린 듯 손사래를 쳤다.

    “아,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요. 이렇게 수심에 잠겨 있으면서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베카의 등이 움찔거렸다. 시아는 이로써 확신했다. 뭐가 있긴 있구나.

    “털어놓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 그저 레베카가 내내 힘들어하는 것 같기에…….”

    레베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금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로드리치가의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시내를 가로지르는 마차 안은 출발할 때와 달리 고요했다. 밀레이나가 그제야 몸이 안 좋냐며 레베카에게 물어왔지만, 소녀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 대답이 없었다.

    처음엔 그저 쪽지의 숫자에 대해 물어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젠 레베카가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마차가 고택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아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시내로 나가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여볼까. 블레어 스트릿이라도 구경하면 기분이 나아지려나.

    ‘라크에게도 연락해 줘야 하는데.’

    라크시스라면 티 파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서 언제 끝나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을 것이다.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시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로비를 가로질러 이 층으로 올라가려던 때였다.

    소맷자락이 못에 걸린 것처럼 잡아당겨졌다. 시아를 붙잡은 건 가구의 거스러미가 아니라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레베카였다.

    “…레이디.”

    “네. 말씀하세요.”

    레베카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시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렇게 붙잡아 세웠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니까.

    레베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두어 계단 차이를 두고 밑에 선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었는지 조그마한 몸이 잠시 들썩였다가 가라앉는다.

    레베카가 고개를 드는 순간 시아는 잠시 놀랐다.

    근심을 말끔히 지워내고 가만히 미소를 그리는 소녀가 너무나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녜요. 죄송해요.”

    결국 레베카는 고개를 돌리며 계단을 올랐다.

    시아는 다급해졌다. 이대로 레베카가 가 버리면 티 파티에 꾸역꾸역 앉아있었던 시간이 물거품이 된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보이는 사람을 이렇게 보내 버리는 것도 영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레베카가 바람처럼 사라지려던 찰나, 시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베카, 시간 괜찮아요? 바람 좀 쐬러 나갈래요?”

    * * *

    “와아! 저 이 시간에 거리에 나와본 건 처음이에요. 그것도 카페 블랑에서요!”

    어둑해진 밤거리 위로 하나둘 떠 오르는 노란 가스등 불빛에 에밀리가 눈을 빛냈다.

    아르카나 한복판에서, 그것도 입장조차 쉽지 않다는 카페 블랑의 꼭대기에서 야경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한 블록만 잘못 넘어가도 으슥한 뒷골목과 홍등이 펼쳐지는 곳이 수도였다.

    레베카 또래의 여인들은 낮에는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티 타임을 즐길지 몰라도, 저녁이면 만찬과 함께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수도의 밤거리는 여인들에게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부유한 저택에서 일하는 메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시간에 주방 일을 돕고 있었을 텐데. 헬렌, 아니, 레베카의 친구란 이유로 여러 궂은 노동에서 해방된 에밀리는 동경하던 로렌 허슬러가 친히 저녁을 사준다는 말에 냉큼 따라나섰다.

    어차피 숙녀들은 동행 없이 외출하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레베카 일행은 밀레이나의 허락하에 마부와 에밀리를 데리고 아르카나로 나온 참이었다.

    “먹고 싶은 건 마음껏 시켜요.”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어차피 켈튼 앞으로 달아놓을 건데요.”

    로렌 허슬러가 세상 인자하게 웃었다. 에밀리는 사양 않고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럴수록 에밀리는 더 신난 티를 냈다. 로드리치가에서 나올 때 로렌 허슬러에게서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당신은 레베카의 친구죠?’

    ‘그럼요! 제일 친한 친구죠!’

    ‘그렇다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어요? 제가 레베카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전에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말이에요.’

    그거 하난 자신 있지. 에밀리는 우쭐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의 기분을 푸는 법은 간단했다.

    옆에서 끊임없이 활기차고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그러면서 은근슬쩍 가슴 속에 꼭꼭 숨긴 이야기를 풀어내게 하는 것.

    착하고 무르기로는 우유푸딩보다도 더한 헬렌, 아니, 레베카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굉장히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울적했었는지를 툭 털어놓는데, 레베카의 친구로 벌써 십 년을 살아온 에밀리로서는 그렇게 그녀를 달래는 것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뭘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다 먹고 싶게 생겼는걸. 레베카, 넌 어때?”

    “으응. 난 상관없어.”

    에밀리의 공세에도 레베카는 시큰둥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가 본데?

    “아이참. 너도 옛날에 카페 블랑 노래를 불렀잖아. 여기서 느긋하게 티 타임을 갖고 블레어 스트릿에서 쇼핑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면서 말이야. 이러지만 말고 메뉴부터 같이 보자.”

    에밀리는 본격적으로 소맷부리를 말아 올리고 팔짱을 끼며 레베카 앞에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여기 유명한 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알려줬었는데 까먹었다.”

    “…여긴 크라이플과 갈리프도흐 메스가 유명해. 크림 티도 기본에 충실하댔어.”

    시아는 눈썹을 까딱였다. 에밀리를 함께 데려온 효과가 있었다. 황궁에서 나선 이후로 레베카가 처음으로 의사가 담긴 대답을 했다.

    시아의 신호를 알아챈 에밀리가 한결 톤을 높여 레베카에게 집중했다.

    “크림 티 좋다.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 올려서 스콘 먹고 싶기도 하고. 단 것도 당기고 말이야.”

    “…그런 거라면 크라이플이 나을걸. 여기 절인 복숭아가 들어간 크라이플이 나오니까 달콤할 거야.”

    “와, 복숭아 맛있을 것 같아. 그런데 갈리프도흐 메스가 뭐야?”

    “그건 레이디 켈튼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개미만 한 목소리로도 할 말은 꼬박꼬박한다. 얼떨결에 레베카에게 지목받은 시아가 당황하여 한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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