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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1)화 (201/292)
  • 201화 

    귀부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찻물을 들이켜는 시아를 풋풋한 연애하는 여인을 구경하듯 즐거이 바라보았다. 황제도 그런 시아를 흐뭇하게 여겼다.

    “짝이란 건 다 있는 법이지. 그대를 만나려고 옌 경이 그렇게나 도도하게 굴었던 모양이야.”

    “그나저나 레이디 로드리치께서 계시니 결혼 준비도 문제없겠어요. 암만 재력이 있으시다 해도 중심을 잡아 줄 부인이 계시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이지요.”

    켁. 결혼이라는 말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여기선 못한다고 했는데. 시아가 헛기침을 하거나 말거나, 밀레이나는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레이디 켈튼도 내 대녀나 다름없지. 의지할 곳이라곤 결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신사밖에 없는 여인을 나 몰라라 할 만큼 내가 인정이 없진 않네.”

    “대모님이라면 확실히 믿음이 가는 분이죠! 그러니 고대 마법사께서도 대모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을까요?”

    레베카는 벌써부터 시아의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으로 들뜬 듯, 밀레이나의 말을 거들었다.

    당사자가 결혼을 인정한 적도 없는데, 시아와 라크시스의 결혼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버리고 말았다. 티 파티에 모인 귀부인들은 시아를 진작부터 라크시스의 무언가로 보고 있었다.

    “그래도 로젠버그의 무도회에는 와 줄 거죠? 두 분이 같이 와 준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은데.”

    마치 결혼하고 나서도 무도회에는 와달라는 어투다.

    이 사람들, 멋대로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나 시아는 눈꼬리를 곱게 휘었다.

    “그럼요. 초대해 주신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죠. 부디 부인의 훌륭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자리에 참석하게 해주셔요.”

    어머나! 부인들의 입가에서 부채가 살랑거렸다. 시아는 애매하게 웃는 모양으로 대외용 미소를 만들어 냈다.

    역시 라크시스다. 시아는 그가 하라는 대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어젯밤, 라크시스는 티 파티에서 초대를 받거든 무조건 받아주라고 했다. 어차피 모두 못 가게 될 테니까.

    그녀가 미래로 가 버린 후에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기 위해 댈 핑계도 모두 생각해 둔 상태였다. 고향인 술란에 잠시 내려갔다가 식민지 열병에 걸려 앓아누웠다는 그럴싸한 핑계 말이다.

    ‘걱정 말아요. 당신이 어떻게 대처하든 여기서 곤란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라크시스는 사실 시아가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정 불쾌하면 소리를 치든 욕을 하든 맘대로 하란다.

    라크시스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지만, 시아 역시 마도 시대에 남아있을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시아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응을 보이며 귀부인들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클럽 로얄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티 파티에서 시아는 그저 이제 막 사교계에 뛰어든 햇병아리였다.

    귀부인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다행히도 부인들은 시아를 귀엽게 보고 있었고, 시아가 어떻게든 대답하려 애를 쓰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풋풋한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제는 그 속에서 홀로 지그시 좌중을 관찰하고 있었다. 입가를 둥글게 감싼 찻잔의 곡선 위로 노련한 군주의 심안이 모든 것을 꿰뚫곤 자연스레 모습을 감췄다.

    레이디 피셔가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이제 술란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날씨도 모르간과는 전혀 다르다면서요? 뜨거운 태양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던데. 술란에 가면 뱃놀이를 꼭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헙.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시아의 낯빛이 변했다.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녀 역시 술란에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란 이야기를 기대하는 귀부인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대충 둘러댈 수도 없었다.

    머리야, 제발 굴러라!

    시아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갈리프도흐 교양 수업 내용을 겨우 떠올려 냈다.

    “다 그런 건 아니랄까요. 가멜에 가까운 툼르칸 제도 인근만 그렇답니다. 술란의 바닷가는 사실 무역항에 가깝죠.”

    “툼르칸 제도라니, 처음 들어요.”

    “하얀 모래사장에 투명한 바닷물이 기분 좋게 넘실거리죠. 나무들도 온통 넓적한 이파리에 하얗고 빨간 꽃을 매달고 있고요. 뱃놀이를 하기엔 덥지만, 그늘에서 이국적인 경치를 감상하며 휴양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답니다.”

    주위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교계 시즌이 끝나면 다들 당장에라도 트렁크를 챙길 기세다.

    이러다 툼르칸 제도로 여행가는 게 유행이 되겠는걸.

    “그럼 신기한 무술을 하는 남대륙인이나 집시들은요?”

    무술? 집시?

    “술란 시내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많다면서요! 마법사도 아닌데 하늘로 날아오르는 재주꾼이나 별을 읽는 점술사 같은 이들 말이에요.”

    대체 술란은 어떤 곳이길래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거람.

    시아는 진땀을 흘렸다.

    부인들이 시아에게 기대하는 것은 미지의 땅 남대륙에 대한 제국인의 편협한 사고가 만들어 낸 신비롭고 기묘한 이미지였다. 진짜 술란이 아닌, 쉽사리 수도를 벗어날 수 없는 상류층 여인들이 풍문을 듣고 상상으로 만들어 낸 가멜 말이다.

    “전 주로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지내서요. 항구 근처엔 뱃사람들이 많았죠. 상인이나 선원, 세관 직원들도요.”

    “아아, 작고하신 부친께서 무역 일을 하셨지요.”

    레이디 로젠버그가 탄식했다. 부인들은 딸의 결혼도 보지 못하고 떠난 미스터 켈튼을 안타깝게 여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됐다. 더는 언제 들킬지 모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시아는 그들이 멋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가족이 떠난 빈자리만큼 사람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요.”

    “이젠 괜찮아졌어요. 주신께서 아버지를 돌봐주시겠지요.”

    시아는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황제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그녀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

    황제는 황제라는 걸까.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리나를 마주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알리나의 인상이 온화한 편임에도 그랬다.

    황제는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했었지. 오늘의 티 파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걸까?

    하지만 이 티 파티는 예상치 못한 차탈의 행동 때문에 벌어진 행사였다. 황제가 시아에게 다시 만나자고 한 건 차탈이 돌발행동을 하기 전인 알현식 도중이었다.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연기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알리나씩이나 되는 사람 앞에서 말이다.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시아를 흥미롭게 구경할 뿐이었다. 시아는 눈알을 굴리며 멋쩍게 손수건을 거두었다.

    “자자,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어때요? 미스 블레어. 당신의 첫째 오라버니 이야기를 해봐요. 요즘은 통 무도회에 보이지 않던데.”

    레이디 로젠버그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 마치 짠 것처럼 주변의 부인들이 일제히 웅성이기 시작했다. 죽은 미스터 켈튼의 이야기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탓이다.

    리암 블레어도 장안에서 꽤나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화 주제였다.

    티 파티 내내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올가만이 말없이 움찔거렸다.

    시아는 찰나 올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포착했다. 올가 웰링턴이라는 저 사람, 배불뚝이 노백작의 부인 맞지? 글레이셜 홀에서 내 손등에 침 범벅 키스를 하던 그 백작 말이야.

    옛날에 라크시스에게 듣기론 웰링턴 백작은 황제의 최측근 중 하나라고 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황제 바로 옆에 앉아있는 걸 보니 황제의 시녀인 것 같은데…….

    리암 블레어에 대한 발언에 올가 웰링턴에게서 적대적인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쩌면 황제와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샤샤 블레어가 도도하게 부채질하며 대답했다.

    “이제 막 시즌이 시작되었으니 그렇지요. 오라버니도 이젠 결혼을 하실 때가 되셨으니 앞으로 자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지금까지는 얼굴 보기도 영 힘들었다니까요? 오죽했으면 옌 경이나 다름없는 분이란 말까지 나왔을까.”

    레이디 로젠버그의 너스레에 레이디 피셔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호호거렸다.

    “곧 한가해지시겠지요. 작위를 다시금 받으시고 나면 영지 관리에만 힘쓰실 테고요.”

    사람 좋게 웃고는 있지만 그녀의 말속에는 칼이 숨어있었다.

    제국의 총리는 오직 하원에서 선출된다. 그 말인즉, 귀족은 총리 선거에 나설 수 없다는 뜻이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건만 지금껏 이 오랜 관습이 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리암 블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총리 선거를 위해 블레어 후작위와 보르던 백작위를 포기한 상태였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작위 계승을 포기한 샤샤와 가문에 얽매이기 싫어 작위를 거부한 막스 때문에 졸지에 갈 곳 잃은 작위는 황실로 돌아갔고, 황제는 리암 블레어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금 작위를 수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리암이 재선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지금껏 리암은 보수당이 득세한 의회의 편에 서 있었고, 재위 초 화폐 개혁으로 의회와 충돌한 알리나는 그 후 틈만 나면 황제를 이겨 먹으려고 하는 보수당의 기를 꺾기 위해 리암의 재선을 막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하긴 애초에 나라의 총수가 둘인데, 권력다툼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귀부인들의 공세에 샤샤가 입술을 짓씹었다.

    리암이 총리를 하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었지만 본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 오라비를 깎아내리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그렇게까지 한가한 분이 아니시랍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바쁘실지도 모르겠네요.”

    레이디 로젠버그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공 전하께서 로드 블레어라 하시기에 후작님이 되시는 게 예정된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았던 모양이네요.”

    그 말에 표정이 험악해진 건 뜻밖에도 올가였다.

    로렌시아 호에서 차탈이 리암을 소개하며 로드 블레어라고 말실수를 했던 탓이다. 올가가 급히 미스터 블레어라고 정정했는데도 귀 밝은 부인들은 모두 들었던 모양이었다.

    샤샤 블레어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오라버니와 결혼할 숙녀분은 레이디 블레어라고 불릴 기대를 완전히 접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도 좋다면 부인들이 초대하는 무도회에 오라버니를 기꺼이 동행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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