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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0)화 (200/292)
  • 200화 

    ‘좌표처럼 분석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던 걸 아시잖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지만 그 또한 모조리 실패했고요.’

    ‘그건 그렇죠.’

    ‘프레디 뮐러는 일지에 이런 말을 남겼죠. 태고의 존재가 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시아는 뜨끔했다.

    태고의 존재, 그건 갈리프이자 시아 켈튼인 그녀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 숫자는 태고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죠. 프레디 뮐러는 자신이 본 미래에서 태고의 존재가 딸에게 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요.’

    라크시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봉인과 관련된 일이니 진지한 게 당연한 일이겠지마는, 시아는 홀로 초조해지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사방에서 증거가 튀어나오는 지금, 그녀의 정체는 조금만 추론하면 알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라크는 태고의 존재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요?’

    ‘불안정한 사도를 좌우할 수 있는 존재라면 아마도…….’

    그러나 라크시스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시아에게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심해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서, 시아는 불에 덴 것처럼 파르르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이 지워낸 듯 사라졌다. 라크시스는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돌아와 여상하게 다리를 꼬았다.

    모른 척해 주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시아는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 주는 라크시스에게 장단을 맞췄다.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정보가 로켓에 담겨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내는 것 또한 어쩌면 프레디가 본 미래에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라크시스가 나긋하게 말했다.

    ‘게다가 미스 뮐러는 당신에게 호의적이잖아요?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걸 거짓으로 알려주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숫자들이 새로운 정보인지 확인해 달라는 거죠?’

    라크시스가 끄덕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간 듯 보였다.

    시아가 다짐하듯 팔짱을 꼈다.

    ‘알겠어요. 티 파티가 아니라 또 다른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버텨볼게요.’

    ‘시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가 붙잡자 시아는 덜컥 멈춰 섰다. 설마 내가 누군지 물어보려고 하나……?

    ‘뭔데요?’

    그러나 라크시스의 질문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혹 알리나 황제가 어떤 이유로 사망하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시아에게서 대답을 들은 라크시스의 낯은 순식간에 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표정으로 뒤덮였다.

    그럴 법도 했다. 알리나 황제는 행차 도중 저격을 당해 죽었으니까.

    황제의 행차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만, 정확히 어느 시기의 어떤 행차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알리나 황제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까.

    활자로만 배운 그녀의 생애를 연도까지 기억하며 살기엔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할 지식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라크시스에게 알리나는 생생한 현재의 사람이겠지.

    행차라는 말에 곧바로 무언가를 떠올린 라크시스는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더는 묻지 않았다.

    ‘라크는 알리나 황제가 어떻게 죽는지는 왜 물어본 걸까?’

    시아의 기억으론 알리나 황제 사망 당시 조지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기에 나이가 한참 어려, 후순위였던 차탈이 황제가 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알리나가 죽었을 때, 그녀와 가장 가까웠다던 차탈이 몇 날 며칠을 그녀의 관 앞에 주저앉아 오열했던 일화는 칠십 년 후까지도 유명했었다.

    그런 일화 때문에 시아는 마도 시대에서 그녀가 겪은 차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대에 알려진 차탈은 적어도 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는데…….

    레베카의 호들갑에 서서히 현실감이 들었다.

    * * *

    상념에서 빠져나오자 마차와 함께 흔들리고 있는 창밖 풍경이 보였다.

    황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베카가 알현식 날을 떠올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땐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어요. 대공 전하가 그런 분이실 줄은…….”

    “레베카, 그날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전 진짜 괜찮으니까.”

    시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까지 대공 전하께서 달려들진 않겠죠.”

    “그렇겠죠?”

    레베카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레이디 켈튼. 제가 곁에 항상 붙어있을 테니까요. 둘이 같이 있는데 설마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겠어요?”

    시아의 말마따나, 차탈이 그녀에게 또다시 달려들 일은 없겠지만, 저렇게 말이라도 해주니 고마웠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소녀가 친구처럼 느껴진다.

    마도 시대엔 칠십 년 후의 원래 시대만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편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고마워요.”

    시아가 침울해 보였는지 레베카는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에 챙겨온 신문을 펼쳐 들어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멀미도 안 나나…….

    통속 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레베카가 신기하다. 시아는 활자 가득한 신문에서 눈길을 떼어내며 신호기를 만지작거렸다.

    ‘시아. 티 파티가 끝나면 나를 불러요.’

    ‘어떻게요?’

    반문하는 시아의 손에 라크시스가 가만히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이걸 돌리면 곧바로 당신 곁으로 갈 테니까.’

    ‘이게 뭔데요?’

    성냥갑만 한 크기의 섬세한 태엽 장치였다. 장식처럼 달린 황동 새에는 투박한 버튼 대신 푸른 사파이어가 달려 있었다.

    요르문이 만든 기계와는 퍽 다른, 남자의 고아한 외모와 꼭 닮은 장치였다.

    ‘마력 좌표 신호기예요. 당신의 마력이 감지되는 좌표를 내게 알려주는 신호기죠.’

    그가 직접 만든 신호기라고 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값비싼 오르골처럼 생겼는데 마도구라니.

    마도 공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얼굴로 사교클럽이나 의회에 가만히 앉아있을 것처럼 보였는데, 손재주가 수준급이었다. 마치 로튼데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태엽을 돌리면 장식된 새가 날갯짓을 했다. 그게 신기해 몇 번을 태엽을 돌려보다 문득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신의 마력이라니? 그녀는 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마력을 감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라크시스는 시아의 반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데리러 갈게요. 당신의 스크롤이 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반칙이잖아.

    시아는 궁금한 것을 묻는 것도 까먹고 멍하니 뺨을 붉혔다.

    자신의 스크롤이 되겠다니……. 정신이 아득했다. 그와 함께 소파에서 숨결을 맞대고 있던 순간이 떠오르고 만다. 별것 아닌 말에도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 소녀의 비밀 】

    나, 단단히 빠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아가 하염없이 새의 부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 에밀리도 이걸 봤어야 하는데!”

    레베카가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신문을 펄럭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가 보고 있던 건 신문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낀 작은 책자였다.

    “레베카. 마차가 들썩이는 것 같구나.”

    “죄송해요, 대모님. 하지만…….”

    “말리지 않으마. 대신 마차 밖에서만 조신하게 행동하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밀레이나도 시선은 책자에 붙박여 있었다. 대체 뭐길래 밀레이나 로드리치마저 사로잡은 거지?

    시아는 로켓에 대해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레베카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에도 이젠 온통 레이디 켈튼과 라크시스 옌의 이야기뿐이에요!”

    “그게 좋은 건가요?”

    밀레이나가 헛기침을 했다.

    “일단은 크게 나쁜 말은 없긴 하다만… 사실, 가십은 적을수록 좋지. 이런 저급한 소식지엔 괜히 이름을 올려서 좋을 게 없어.”

    “그렇지만 더 이상 최고의 신랑감으로 노든 대공이 꼽히지 않는다는 게 우스운걸요.”

    그러니까 신문 크기의 딱 절반 되는 저 작은 책자가 이 시대의 가십지란 소리였다.

    컬러 사진이며 원색의 헤드라인이 가득한 원래 시대의 가십지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필기체 활자로 가득한 저 책자가 말이다.

    “한번 보실래요?”

    “네, 좋아요.”

    별생각 없이 책자를 받아 든 게 화근이었을까.

    ‘이게 다 뭐야……!’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기의 사랑을 하게 된 시아는 그녀가 받아 든 책자가 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가십지라는 말을 듣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 * *

    “두 분 참 보기 좋아요. 전 옌 경이 영원히 혼자 살 줄로만 알았는데.”

    레이디 로젠버그가 차를 음미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없는 라크시스 옌을 레이디 켈튼 옆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눈치다.

    황제가 주최한 티 파티는 산뜻한 봄날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도록 성대하게 열렸다. 황제는 황실의 보물이라는 유리온실을 개방해 진귀한 꽃들을 아낌없이 보여주었고, 그중 가장 탐스럽게 핀 작약 한 송이를 시아에게 친히 선사하기까지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아가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밀레이나가 레이디 로젠버그의 말을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그러자 귀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아에게 쏠렸다.

    풍문으론 라크시스 옌이 홀려 버릴 정도로 천하의 미색이라 들었는데, 실제로 만난 시아 켈튼은 아름다운 숙녀라기보단 라크시스 옌과 동류의, 매력적인 탐구자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일평생을 결혼 시장과 사교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에만 바쳤던 귀부인들은 어떻게든 티 파티가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시아를 귀엽게 보고 있었다.

    황제가 친히 레이디 켈튼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기에 대체 어떤 대단한 여자이길래 황제가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숫기 없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등바등 애를 쓰는 숙녀의 모습에 귀부인들의 경계가 한순간에 풀려 버렸음은 물론이요, 이제 귀부인들은 한창 풋풋한 연애를 하는 중인 여인(물론 시아는 본인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을 놀리는 데 맛 들려 장난스러운 농담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돌아가신 폐하께서도 옌을 신경 쓰셨지. 하마터면 내 옆에 테디가 아닌 라크시스 옌이 있었을 뻔했네.”

    그게 무슨 소리야? 라크가 황제의 남편이 될 뻔했었다고?

    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아는 꽤나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유명한 이야기였다. 전대 황제가 알리나의 짝으로 라크시스를 점찍어 두었던 일화 말이다.

    물론 라크시스는 당시 황녀이던 알리나를 마도구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그런 속사정을 미래에서 온 시아가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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