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99)화 (199/292)
  • 199화 

    ‘갱단도 함부로 오가지 않는 자정의 부둣가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텅 빈 배의 정체가 궁금했던 거예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의 시선을 피해 유령선에 올랐던 거죠. 유령선 괴담이 사실은 마약상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헛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럴싸하고 맥 빠지는 진실을 상상하면서요.’

    요르문은 어느덧 만담꾼처럼 목소리를 은근하게 낮추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먼 포드가 목격한 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어요.’

    요르문은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곤 입가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속삭이듯 말했다.

    ‘옷만 남겨진 그 자리에 바싹 마른 미라가 있었대요. 마치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처럼요.’

    뒤이은 그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비단 미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랍마다 차곡차곡 들어찬 짐짝처럼, 일어날 공간조차 없는 침대 위에서 죽어버린 수많은 시체 때문이었다.

    세이데이 호는 공식적으론 화물선이랬지.

    그 옛날 제국에선 가멜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노예로, 화물로, 상품으로. 노동력으로, 동물원의 구경거리로.

    제위 초, 알리나 황제는 가멜 합병 이후 총독에게서 어린 가멜인 여자아이를 한 명 선물 받는다. 꾀꼬리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니 곁에 두고 노래를 시켜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이는 겁에 질려 입을 닫고 말았다. 총독은 노래도 못하는 꾀꼬리는 쓸모가 없을 거라며 도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나, 알리나는 울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아이를 가엾게 여겨 거둬들이게 된다.

    노예제 폐지가 선포된 건 그로부터 정확히 일 년 후였다.

    만일 그 소녀가 알리나 황제의 동정을 사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물건이던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라 명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재앙은 광룡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

    흔들린 사진 속, 족쇄에 묶인 채로 앙상하게 말라 버린 발들이 자꾸만 뇌리에 밟혔다.

    시아는 숨을 가다듬고 요르문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데이먼 포드는? 살아 있어?’

    ‘살아 있으니 이 사진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죠? 루드윅이 그러는데 자신이 데이먼 포드와 아주 잘 아는 사이래요. 이 사진도 다른 곳에 유출된 적 없고요.’

    그 말인즉 데이먼 포드는 아직까지 황혼 국교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네 장의 사진을 찍은 이후 데이먼 포드는 더 이상 유령선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의 본능적인 감이 그를 살린 거겠죠. 더 파헤치면 죽는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까요.’

    어찌 됐든 요르문은 맨덜랜드에 가서 유령선 사건을 마저 조사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데이먼 포드와도 만나기로 연락했단다. 황혼 국교회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시아는 요르문의 추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지만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게 봉인이 근처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봉인은 따로 찾아야죠. 다무스 때처럼 고대 사도의 신전에 얌전히 묻혀 있을지, 인어의 눈물이나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모종의 이유로 신전을 떠나 다른 사람 손에 있을 진 모르잖아요?’

    그건 그러네.

    뜻밖의 대답에 시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봉인 대부분을 수도에서 발견했었다. 사도들의 신전이 모르간에만 몰려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누님의 일기장과 프레디 뮐러가 남긴 바람 장미들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적어도 봉인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요르문은 시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녀가 풀 죽어 보였기 때문이다.

    시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노예무역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탓이었는데, 요르문은 봉인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해 시무룩해진 것이라고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누님 일기장엔 여덟 번째 봉인이 알펜하임 궁에서 나타난다고 되어 있었죠. 그렇지만 아직 알펜하임 궁 부근에선 아무런 이상 마류도 감지되지 않으니까요.’

    알펜하임 궁은 제국의 국회의사당이었다.

    케르딕 7세와 이자벨라의 딸인 마거릿 황제가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후대에 의회장으로 이용되면서 상하원을 통틀어 국회를 통칭하는 단어이자 국회의사당을 의미하는 장소로 쓰였다.

    일곱 번째 봉인은 버려진 예배당에서 발견된다고 했는데, 뮐러가의 묘실을 생각하면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예배당으로 착각할 법도 했다.

    여덟 번째 봉인이 발견된 곳은 구체적으로 알펜하임 궁이라고 적혀있진 않았다.

    일기장엔 [거대한 시계탑에서 기이한 울렁거림과 함께 자정에 총성이 들렸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아르카나엔 시계탑이 없었으므로 알펜하임 궁의 시계탑일 것이라 추측한 듯했다.

    ‘누님은 카얄도 찾고 싶어하셨잖아요. 유령선 사건은, 이를테면 황혼 국교회에 파고들 기회인 셈이죠. 봉인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으응…….’

    시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누님,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어떤 부분이?

    아무 생각 없이 요르문의 말을 듣던 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상인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잖아요? 노예 밀무역상도 다를 것이 없단 말이에요.’

    ‘그, 렇지.’

    ‘실어나르던 가멜인이 미라가 되어 죽어 나가는데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 왜 계속 밀무역을 하고 있냐는 거죠. 결국 그들은 노예를 팔아야지만 이익을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생각지 못한 지적이었다.

    그러네. 요르문은 분명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노예 ‘밀무역’이라고.

    무역도 거래의 일종이다. 그 말인즉,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고, 확실한 이득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제아무리 황혼 국교회가 개입되어 있어도 그들이 미라가 된 가멜인들에 대한 보수를 충분히 지급하지 않는다면 밀무역상들이 굳이 항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움직일 리가 없다는 거다.

    ‘황혼 국교회에 자금을 대주는 이가 분명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을 꾸미고도 남을 만큼의 자본을 꾸준히 얻을 방법이 있거나요. 돈이 썩어나는 귀족 하나를 붙잡아 재키 레이븐처럼 정신을 세뇌해 사도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왠지 아닐 것 같단 말이죠?’

    요르문은 라크시스처럼 팔짱을 삐딱하게 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분명해요. 황혼 국교회에겐 밀무역상들로 하여금 손해 보는 장사를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예요.’

    결국 요르문의 설명은, 그래서 맨덜랜드에 가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봉인의 소재든 황혼 국교회의 추적이든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엔 한 점의 논리적 오류도 없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다. 그리하여 요르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아는 맨덜랜드로 갈 채비를 시작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아가씨, 지금 대체 어딜 가신다고요?’

    ‘요, 크 부인.’

    ‘고용인으로서 감히 주인님과 아가씨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잘못된 일인 줄 알지만 어떻게 그 위험한 부둣가에 덜컥 가려고 하시냔 말이어요.’

    시아는 재빨리 요르문에게 구원의 눈짓을 보냈다.

    요크 부인은 노동계급처럼 바지를 주워입은 시아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숙녀가 갈 만한 곳이 아닌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아가씨께선 한술 더 떠 이런 차림으로 맨덜랜드까지 가려고 하셨던 거지요?’

    요르문! 나 이러다간 같이 못 가게 생겼어!

    그러나 시아가 아무리 애타게 바라보아도 요르문은 꼼짝도 않았다.

    ‘요르문, 설마 날 두고 가려고?’

    ‘누님은 황궁에 가셔야죠. 최고의 찬사를 받은 레이디가 황제 폐하의 초대를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열정적으로 맨덜랜드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던 요르문이 돌연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삐졌다. 분명 삐져서 그런 거다. 요르문이 함께 바람 장미 분석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녀가 알현식 준비를 하느라 아무것도 못 해준 것에 마음이 상한 게 분명했다.

    시아는 미래의 양부가 황제의 부름도 무시하고 도망 다니던 걸 떠올렸다. 대부분은 아프다는 핑계였는데, 요르문은 병자는 황제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을 적절하게 이용해먹곤 했다.

    그 말인즉, 요르문은 시아가 황제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굴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와 떨어져 있는 걸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이긴 했지만 요르문과 함께 맨덜랜드로 가는 것을 택했다. 시아의 이번 시간 여행이 닷새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도 시대에 머무를 때 봉인을 최대한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시아가 라크시스에게 호소했다.

    ‘저도 데려가야죠! 애초에 봉인을 찾으러 과거까지 온 건 난데!’

    ‘시아, 제 생각에도 황제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당신 평판에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의 평판을 위해 무리해 가면서까지 강행한 사교계 데뷔 아니었던가. 레이디 시아 켈튼만을 위한 티 파티는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 미스 뮐러를 만나면 로켓 안의 숫자가 무슨 뜻인지 물어봐 줘요.’

    시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레베카 뮐러가 프레디의 유품이라며 건네준 로켓 속에는 의미가 불분명한 숫자들이 적힌 쪽지가 있었다. 요르문과 라크시스는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숫자를 해석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쪽지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레베카가 제게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을까요?’

    ‘그렇지만 미스 뮐러 말고 이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라크시스의 논리는 이러했다.

    프레디가 레베카에게 가문을 지켜달라느니, 미래를 부탁한다느니 하며 직접적으로 남긴 유품은 로켓이 유일하니, 레베카라면 숫자를 해석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놀이를 가장한 암호 해석 방법이라든가… 그녀가 어릴 적 무의식중에 프레디로부터 받은 단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시아는 반문했다.

    ‘딸에게 봉인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레베카는 프레디 같은 학자도 아니니 남겨진 바람 장미만으로는 봉인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을 거 아녜요.’

    그러니 굳이 숫자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 즉 봉인들의 위치를 거의 특정한 지금 시아 일행에게는 쪽지에 숨겨진 내용이 그다지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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