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맨덜랜드에선 사람 없어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르문은 루드윅이 알려준 맨덜랜드 연쇄 실종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맨덜랜드가 여덟 번째 봉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길면 한 달. 짧으면 이 주에 한 번꼴로 유령선이 맨덜랜드 항구에 들어온다더군요. 빛조차 밝히지 않고 조용히 정박해선 선장과 선원 몇만이 내려온다고 해요.’
요르문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승객은 없대요. 화물선인데 내리는 짐들도 전혀 없다고 하고요. 그리고 그들이 내려오면 부둣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제가 배 안을 수색하고요.’
‘사제라니…….’
사제라는 말에 벌써부터 뒷골이 서늘하게 당겼다.
시아는 뒷말을 흐렸다. 실종과 사제. 왜인지 저주에 걸린 사람들이 떠오르고 만다.
‘놀라운 건 이 일이 수십 년째 이어져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이 배의 이름은 세이데이 호거든요.’
‘세이데이 호라면…….’
‘맞아요. 이 배는 3498년부터 운항이 금지된 노예 무역선이에요.’
세이데이 호. 대항해시대에 제국에서 가장 많은 가멜인 노예를 실어나른 것으로 유명한 배였다.
평균 백 명에서 이백 명 남짓의 노예를 실어날랐던 노예 무역선과 달리,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설계해 두 배에 가까운 수의 노예를 태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최악의 배이기도 했다.
‘그렇단 건…….’
‘가멜인을 노예로 사고파는 놈들이 아직도 있다는 뜻이죠.’
노예 밀무역이라니.
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했다. 시간 여행을 한 게 벌써 여러 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잠시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 여긴 식민지가 존재하던 칠십 년 전의 마도 시대였지.
‘물론 노예제가 황제 폐하의 명으로 불법이 된진 오래지만요. 여전히 값싼 인력과 진귀한 구경거리를 원하는 서대륙의 부호들이 많으니까요.’
노예 거래가 금지된 건 가멜이 제국에 합병된 후 제국의 신민이요, 이제는 제국의 일원으로 불리게 된 식민지인을 가엾게 여긴 황제 때문이라고 했다. 가멜에서 벌어지는 폭동을 막기 위함이 진짜 이유이긴 하지만.
표면상의 조치를 내린 게 전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황제는 가멜인을 동정하긴 했다. 실제로 가멜 출신 시종들을 황궁에 두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그뿐. 법적으로 노예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된 건 아니었다.
시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짓이 이어져 왔다는 건 다들 알면서 눈감아 줬다는 거네.’
‘음,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시아, 힘들면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라크시스가 시아를 돌려세웠다. 그의 손짓에 몸이 빙그르르 돌며, 만질만질한 기계의 외관에 제 얼굴이 비쳤다. 시아는 그제야 자신의 낯빛이 그리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식민지 시대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봉인 찾기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작해야 단신으로 마도 시대에서 노예밀매를 막을 수도 없었다.
자신은 과거에 떨어진 이방인에 불과했으니까.
그녀가 지나가는 길엔 언제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비의 날갯짓조차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는데, 사나흘 남짓 남은 시간 동안 그런 엄청난 일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아녜요. 제국민으로 살아온 이상 이런 이야기도 감수해야 하긴 하는걸요.’
자신이 광룡의 부활을 막으려는 이유 중 하나는 예상치 못한 재앙에 희생되고 말 제국의 사람들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으로 인해 그간 목숨을 잃어온 사람들이 그보다 많다면…….
원래 시대의 아르카나 광장엔 광룡에 희생된 무고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새하얀 시계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침략에 희생당한 가멜인을 위로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잔혹한 역사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이상, 누구도 결백할 수 없다. 세월을 따라 이어진 책임과 죗값을 갚아나가는 건 아마도 그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부 위에서 태어나는 자들의 숙명일 것이다.
시아는 고개를 부르르 떨치며 똑바로 일어섰다. 심란한 마음은 가슴 깊숙이 새겨 묻었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에 놓인 사건에 집중할 때였다.
‘그래서 이 사건이 봉인이랑 무슨 상관인 건데요? 맨덜랜드는 원래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라면서요.’
대답은 라크시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요르문이었다.
‘누님. 제가 아까 유령선 사건을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나세요?’
‘…노예밀매 사건이지.’
‘그런 거 말고요.’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시아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수렁 같은 죄책감이 시아를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르문은 시아를 늪에서 단번에 건져냈다.
‘괴담이요. 제가 괴담이라고 그랬잖아요?’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지만 여전히 요르문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아직 제대로 드러난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증명된 적이 없는 사건이니까 괴담이라 불리는 거라고요!’
뭐?
동시에 서랍이 열렸다.
요르문은 서랍을 그리 오래 뒤적이지도 않았다. 최근에 넣은 건지, 아니면 중요한 정보라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한 건지. 그는 두툼한 황색 서류 봉투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한번 읽어보실래요?’
요르문이 내민 건 낱장을 얼기설기 묶어 만든 책자였다. 가만 보니 손글씨가 아니다. 대부분 주간지나 신문을 잘라 모은 것이었다. 아마도 루드윅 젤마니가 여기저기서 수집한 정보를 모아 요르문에게 보내준 것 같았다.
요르문은 그중 한 곳을 펼쳐 보여주었다.
[유령선의 실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맨덜랜드의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직 유령만을 승객으로 받는다는 배의 불길함이 행여 옮겨붙을세라, 유령선에 대해 물을 때마다 모두들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다.
세이데이 호. 남대륙 회사 와해의 소식과 함께 3498년 마지막 항해를 끝으로, 너른 바다에서 사라져 버린 죽음의 배. 십 년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던 배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필히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세이데이 여신의 품에서 마냥 안식을 기다리기엔 풀지 못한 한이 너무도 많아, 죽은 가멜인들이 배를 다시 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간 미스터리를 읽는 당신이여. 자정의 맨덜랜드 항구에서 유령선을 마주치거든 그대로 발길을 돌려 도망치라. 호기심보다 귀중한 것은 당신의 목숨이니!
- 작성한 이: 데이먼 포드]
기사를 재빨리 훑어내린 시아가 약간의 안도와 함께 입을 열었다.
‘주간 미스터리라니. 그렇다면 정말로 괴담인 거네.’
꾸며낸 이야기라 믿으니 양심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살짝 덜어진 것 같다.
시아는 가면처럼 미소를 덮어쓰며 아무렇지 않은 듯 책자의 뒷부분을 훑어내리다 굳어버리고 말았다. 루드윅이 수집한 이야기들은 노예 무역선과는 다른 의미로 섬뜩한 괴담들이었기 때문이다.
위저 보드로 악령을 불러내 사후세계를 체험했다든가, 붉은 옷의 여인이 나타난 지역에선 사람들이 사라진다든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으스스한 이야기라 치부했겠지만…….
‘…이거,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구나.’
‘네, 맞아요. 그것도 황혼 국교회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들이죠.’
붉은 옷의 여인 이야기는 거스 벤슨 경감의 불행한 과거와도 맞아떨어졌다.
여인이 피리를 불며 마을을 떠나자 피리 소리에 홀린 마을 주민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그대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괴담 특유의 기이함과 약간의 과장이 곁들여져 있을 뿐, 사건의 진실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걸 로드 젤마니가 직접 수집한 거라고?’
‘슈테른베슈테크에 다녀온 후부터 계속 이래요. 꼭 본인이 시간 여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봉인을 찾아다니려고 한다니까요.’
괴담에 대한 루드윅 젤마니의 열정을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괴담 때문에 참전까지 했던 사람인데…….
시아를 처음 만났을 땐 그녀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서 무려 고대 마법사 앞에서, 그것도 겁을 상실한 채로 미래 화폐 이야기까지 꺼내지 않았는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더라고요.’
‘로드 루드윅 젤마니는 괴담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을 인물이지.’
루드윅이 시아를 바라보던 눈빛을 기억해 낸 라크시스가 빈정거렸다. 요르문은 손바닥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대화를 환기시켰다.
‘어쨌든, 이 유령선 기사만 보면 이 사건이 진짜인지 아닌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황색 봉투가 뒤집혀 탈탈 털린다. 요르문은 봉투 모서리에 끼어 잘 나오지 않던 사진을 힘으로 잡아빼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러곤 시아가 보기 편한 방향으로 사진을 돌려 쭉 내밀었다.
‘이렇게 증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사진은 총 네 장이었다. 몰래 숨어 찍은 모양인지 초점이 다 조금씩 흔들려 있었다.
멀리서 선장과 사제가 만나는 모습. 페인트가 벗겨져 형체를 잃어가는 [세이데이 호]라는 글자. 유령선에 잠입해 선실과 화물칸을 찍은 사진.
삯을 받고 태운 승객들이 갑판과 선실 곳곳에 있다.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도 있고, 선실에 누워 쉬는 가족도 있다.
화물칸에는 몸을 일으킬 공간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침대가 서랍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침대의 끄트머리에서 보이는 건 넝마가 된 옷가지와 발목에 채운 족쇄뿐.
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형상이 지나치게 왜소하다. 혹은 옷가지만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 부피감도 없었다. 얄팍한 실루엣 밑엔 어렴풋한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발견한 건 바로 미라였다.
‘뱃사람들이 원래 미신을 많이 믿잖아요? 그래서 다들 유령선을 불길하게 여겨 입에도 담지 않았죠. 그런데 겁을 상실한 기자 하나가 진실의 불구덩이에 뛰어든 거예요.’
요르문은 그렇게 말하며 사진을 뒤집었다.
‘데이먼 포드. ‘더 맨덜랜드’ 소속 기자이자 주간 미스터리에 유령선 이야기를 실은 기자죠.’
하얀 뒷면에는 모두 [찍은 이: 데이먼 포드]라는 서명이 습기로 번진 잉크와 함께 지저분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