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헉, 허억, 대공 전하께선 이미 떠나셨나요? 물론 떠나셨겠죠? 하아, 참…….”
올가는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잠시의 여흥이라면 진작 끝내고 떠나셨지요.”
“제가 잠시 졸았던 바람에, 전하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아, 진짜 어떡하지.”
제프리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를 돌았다.
평소에도 올가는 저가 모시는 주인이 보좌관으로 영 쓸모없는 남자를 곁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때조차 멍청하게 발이나 구르고 있다니… 진정 대공의 보좌관이라면 해결책부터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 올가는 그의 말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졸으셨다고요.”
“예에, 저도 제가 이렇게 잠들 줄은 몰랐는데. 실수한 걸 들키면 어쩌지요? 깜빡 눈을 감았다 떴는데 제가 비어있는 손님방 침대에 누워있지 뭡니까.”
차탈에게 혼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라 그런지 제프리는 황궁의 다른 이들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해 둔 방에 흙 발자국으로 이불이 엉망이 되어 있다면 분명 범인을 색출하려 들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더러워진 손님방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아까 발자크 로스를 궁 밖까지 배웅하러 갔었는데…….’
제프리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문득 마력막 생성기의 붉은 판이 떠올랐다.
허락되지 않은 마법사를 상징하는 핏빛. 가장 위험한 색. 경고의 상징.
그러고 보니 비공인된 마법사가 숲을 통과하면 곧바로 황궁 전체가 곧바로 비상시로 전환된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살결로 전해지는 위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나 웃음소리 따위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하다못해 황실 친위대라도 움직여야 하는데……?
올가는 의아한 표정을 지워냈다. 지금껏 그녀가 느꼈던 의심이며 의문을 도도한 귀부인의 얼굴로 말끔히 감싸 덮으며, 무능한 보좌관을 질책하는 말투로 이렇게 대꾸했다.
“걱정 마세요, 제프리 경. 로드 로스라면 제가 배웅해 드렸으니까.”
“아이고, 참. 감사합니다. 숙녀분이 배웅을 대신해 주신 상황에 이걸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당신이 무례하게 황궁을 헤집고, 한량처럼 아무 방에나 드러누워 추태를 부린 것 또한 눈감아드리죠. 그러니 전하 앞에선 입을 다물도록 하세요.”
난데없는 힐난에도 제프리는 잠자코 있었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어쨌든 잘못은 그가 한 것이니까. 게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올가 웰링턴 저 여자가 대신해 준 셈이니.
“아무렴요. 입 꾹 닫고 있겠습니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 입장에서 전하의 명예가 종복으로 인해 실추되는 건 제프리 경도 원하지 않으시겠죠. 할 말 끝나셨으면 가보세요.”
제프리에게 축객령을 내려놓곤 올가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보이진 않아도 제프리가 등 뒤에서 어버버거리고 있을 것이 훤히 느껴졌다.
슬슬 알현이 끝날 시간이다.
올가는 회중시계를 탁 닫곤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황제가 자신이 사라졌던 것을 눈치채기 전에 제자리로 복귀해야 했다.
눈 감고도 훤한 지름길을 잰걸음을 쳤다. 그 덕에 마지막 손님이 알현실을 나올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올가는 알현실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시종이 안에서 알현실 문을 열었다. 간단한 인사 소리가 서너 번 들리더니, 손님이 문을 빠져나와 올가가 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다가왔다.
오뚝한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올가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결 좋은 금발에 고귀한 천사를 닮았다던 얼굴. 지나치게 정석대로 갖춰 입은 정장은 오히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잡지에서 오려 붙인 사진처럼 보이는 차림이었다.
스산한 시선이 붉게 빛났다. 올가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남자는 입술을 조용히 끌어 올렸다.
“구면이군요.”
알현실의 마지막 손님은 발자크 로스였다.
구면이라니. 설마 내가 숲에 있던 걸 봤던 걸까.
올가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새까만 코트에 새까만 실크햇. 옅은 금발과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제외하곤, 검은 구두와 검은 가죽 장갑까지 온통 어둠에 뒤덮인 남자.
“레이디 웰링턴. 밖에 있으면 들어와도 좋네.”
올가는 황제가 부르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교로 발을 바닥에 붙여버린 것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자크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새까만 실루엣이 망막에 불길하게 들러붙어 버린 것 같았다.
“올가?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니?”
황제가 한결 친숙하게 올가를 불렀다.
그에, 올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문을 잡고 있는 시종이 올가를 향해 안 들어가고 뭐 하냐는 눈치를 주고 있었다.
올가는 진득진득한 걸음을 겨우 떼었다. 황제는 반색하며 올가를 맞이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말이다. 레이디 켈튼에게 유리온실을 개방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대가 장식에 조예가 깊으니 테넌트를 도와 꽃으로 테이블을 꾸며보는 건 어떻겠나.”
황제 앞에 앉아서도 찜찜한 기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검은 진액으로 이루어진 수렁에 다리가 잠긴 것 같았다.
발자크 로스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다무스에서 온다는 누이동생 때문에 급히 가봐야 한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황제를 알현하고 있는가.
올가는 그제야 제프리가 왜 손님방에서 잠들었는지 깨달았다. 발자크는 제프리를 따돌린 것이다. 그것도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
대공이 황제와 반목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황제와 만나다니. 심지어 차탈에게 거짓말을 하고 대공의 보좌관을 따돌리면서까지 말이다.
‘설마 발자크 로스는 황제의 수하였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납득이 갔다.
차탈이 자신을 황제에게 첩자로 보낸 것처럼 황제도 발자크 로스를 차탈에게 첩자로 보낸 것이다. 황제가 차탈의 위협을 모른 체하고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비공인된 마법사가 황궁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발자크 로스가 황제의 사람이었기 때문인 거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발자크 로스가 진짜로 간자라면 이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려선 안 된다.’
가령 차탈과 제프리를 속이고 황궁에 남아있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황궁엔 눈과 귀가 많았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벽에도, 천장에도 눈과 귀가 있었다. 그 사실은 아마 황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다.
발자크 로스가 귀가하지 않고 황제를 알현했다는 소식이 차탈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뻔한 수작을, 그것도 내 앞에서 부렸단 말인가.
황제의 낯은 여전했다. 살짝 피곤해 보이긴 했으나 주름진 눈꺼풀 밑에 날카로운 판단력과 기민한 사고를 숨기고 부드럽게 웃고 있다.
저 눈은 진실을 어디까지 꿰뚫고 있을까. 황제는 내가 대공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도 곁에 두는 걸까. 경고의 의미로 발자크와의 알현을 보여준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추측이었으니까.
“작약이 아름답게 필 시기이니 작약을 이용한 장식은 어떨까요? 풍성하게 장식하자면 여러 송이가 필요할 텐데 테넌트 경이 과연 애지중지 기른 꽃을 쉽게 내어줄지…….”
“결혼식장처럼 꾸미란 뜻은 아니었단다. 그대 말대로 작약을 이용하면 화사할 것 같구나. 테넌트가 좀 슬퍼하겠지마는 어쩌겠느냐. 온실이 흉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꺾어가야겠지.”
황제는 변함없이 올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끼는 신하의 아내이자, 아끼는 시녀로서. 눈치 빠르고 영민한 어린 귀부인은 곁에 두기 좋으면서도 귀여워하기도 좋았다.
올가는 황제가 왜 자신을 가까이에 두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시선마저 신뢰할 수 없었다. 황제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으므로.
“제가 감히 폐하의 명예를 빌려도 될까요?”
“하하, 그러려무나. 테넌트가 안 된다고 하면 내가 꽃을 내어주라 했다고 말하렴.”
머리와 혀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올가의 특기였다.
그린 듯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황제에게 대답하면서 뇌를 맹렬하게 굴린다.
발자크 로스의 정체를 더 파헤쳐 봐야겠다. 그가 진짜로 황제의 수족인지, 아니면 그보다 위험한 존재인지.
전자든 후자든 심각한 문제였다. 과연 차탈은 발자크 로스의 정체를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의 주인이 받을 배신감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올가는 씁쓸하게 웃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레이디 켈튼과 황궁에 함께 갈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증기를 뿜어내는 마차가 아르카나 시내 한복판을 갈랐다. 레베카는 잔뜩 들떠 손뼉을 쳤다.
이건 데자뷔일까. 시아는 며칠 전과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드레스 차림의 자신과 레베카 그리고 밀레이나까지.
말이 끄는 마차 대신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켈튼의 마차가 한결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불편한 건 여전했다.
불편하다 뿐일까. 지금의 시아는 모르간의 매연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잔뜩 침울해져 있었다.
‘그건 내가 맨덜랜드가 아닌 황궁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지.’
알현식 날 레이디 시아 켈튼이 겪게 된 수모에 대하여 통탄하는바, 황제가 직접 그녀를 위한 티 파티를 열어 귀부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번엔 창밖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는 라크시스와 요르문도 없었다. 두 사람은 여덟 번째 봉인의 소재지가 맨덜랜드라는 것을 알아낸 후 그리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맨덜랜드에 적절한 괴담도 돈다 하니 잘 된 게 아니겠어요? 유령선이래요, 누님.’
시아는 익숙한 듯 루드윅과 통화를 하는 요르문에 살짝 놀랐다. 딱히 루드윅과 요르문이 서로 성격이 맞거나 한 것 같진 않았는데, 그간 꼬박꼬박 서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유령선?’
‘정확히는 승객들이 모두 사라진 배라고 해요. 연쇄 실종사건인 거죠. 그것도 꽤 오랫동안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래요.’
사정을 들어보니, 중세로의 시간 여행 이후 시간 여행자와 봉인에 대해 알게 된 루드윅이 이단이나 마류 이상 현상과 관련된 괴담이 들려올 때마다 요르문에게 줄곧 알려왔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엔 연쇄 실종사건이란다.
인접 도시인 에이즈번과 더불어 항구로 유명한 맨덜랜드는 화물선이 주로 드나드는 탓에 에이즈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스산하고 위험한 느낌이랄까.
갱단의 영역 싸움이라든가, 밀입국자들이 거리를 떠돌며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찰 사이에서도 근무 환경이 열악하기로 소문난 곳이라 하니, 말 다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