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탁, 소리가 났다.
올가는 실눈을 떴다. 다행히도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잉크병은 벽에 부딪혀 깨지는 대신 얌전히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리암은 그저 보수당에 도움이 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지. 난 그들에게 신뢰를 잃었고. 그대가 날 못 믿는 것처럼 말이야.”
“전하를 못 믿는다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차탈은 조소했다. 올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항변해 봤자다.
차탈은 방금 내던질 요량으로 잉크병을 들었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한심하다. 어쩌다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인간이 되어버렸나.
“그대도 나가서 할 일이나 해. 황제가 레이디 켈튼을 위한 티 파티를 연다는데, 시녀인 그대가 빠져서 쓰나.”
차탈은 그렇게 말하며 시침과 분침이 매달린 괘종시계의 중심을 눌렀다. 그러자 좌우로 운동하던 추가 우뚝 멈춰서더니, 괘종시계 전체가 옆으로 천천히 밀려났다.
괘종시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황궁의 대피 통로가 있었다.
차탈은 올가를 통로로 안내했다. 황제의 시녀 신분인 올가가 대공의 사람이라는 걸 들키면, 황제는 분명 올가를 내칠 터였다.
올가 웰링턴은 황제의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전령 새였다. 그녀만큼 황제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대공 전하. 저는 죽는 날까지 당신의 종입니다.”
“…알았으니까 가 봐.”
침울해진 올가를 억지로 통로로 밀어 넣은 차탈은 다시금 추를 잡아당겨 괘종시계를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마루를 긁는 소리가 잠깐 나더니, 그의 서재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통로의 끝엔 매수해 둔 시종이 올가를 맞아줄 것이다. 마구간을 돌아 마차를 타고 황궁의 넓은 뜰로 나가면, 그녀는 이제 막 황궁에 도착한 사람처럼 보이리라.
“제프리, 거기 있나?”
“예, 전하.”
지금까지 모든 일이 잘 풀려왔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모든 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라크시스 옌. 그자가 처음부터 날 지지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사냥이 하고 싶어졌다.
광활한 숲을 가로지르며, 어미, 새끼 가릴 것 없이 제 앞을 가로막는 짐승이라면 뭐든. 살아있는 것이 발치에 고꾸라져 제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보고 싶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냥 시즌이 되려면 한 달은 더 남았다.
자고로 사냥꾼이란 잔짐승 여러 마리 보단 거대한 맹수 한 마리에 더 열광하는 법. 한동안 자숙하며, 알현식과는 비교도 안 될 사건을 터트리면 제 허물도 자연스럽게 잊힐 것이다.
노크에도 대답 없는 주인에, 제프리가 어느새 서재 안으로 들어와 차탈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탈은 성마르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격장을 열라고 해. 오랜만에 뭐라도 쏘고 싶군.”
* * *
총성이 사격장을 한바탕 뒤흔든 후였다.
“역시 자네를 부르길 잘했어.”
차탈은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사격장에서 나왔다. 화약 냄새를 두르고 총 손잡이를 억세게 쥐어 잡은 흔적을 손바닥에 역력히 드러낸 채였다.
황실 소유의 사냥터이자, 사격장으로도 쓰이는 하버마일 숲. 오래된 떡갈나무 뒤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후드에 얼굴을 숨긴 인영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대공 전하.”
“아, 물론 자네의 사격 실력도 대단했지. 그보단, 간만에 거리낄 것 없이 총질을 해대니 속이 시원하군.”
베스트까지 벗어던진 푹 젖은 셔츠 바람의, 황제가 보았다면 질책할 차림인 차탈과 달리 발자크 로스는 사격장에 들어갈 때와 똑같이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정황으로 보건대 분명 두 사람이 함께 사격을 즐긴 듯한데… 차탈은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이다.
기묘한 위화감에 나무 뒤 그림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전하께서 허락하시는 이상 저는 영원히 당신의 친구로 남을 겁니다.”
“하하하! 다무스 출신은 원래 다 그런가? 그 억양으로 입 발린 소리를 들으니 구애받는 숙녀라도 된 기분이군.”
“입 발린 소리라 하시면 서운합니다만.”
“그건 내가 실언했네. 자네가 워낙에 편하다 보니 그만.”
숲의 초입에 다다른 지 얼마 안 되어 황궁의 후원이 나타났다. 늑대 따위의 맹수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거친 녹음을 벗어나자마자 국가 원수의 거처가 있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사냥광이었던 케드릭 7세가 과거 별궁으로 쓰던, 숲과 맞닿아 있던 궁을 본궁으로 바꾸어 버린 이래 황궁은 쭉 하버마일 숲과 함께했다.
두 사람이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철컥, 소리가 나며 숲의 경계를 가르던 투명한 막이 일렁였다. 길 잃은 짐승이나 암살자 등이 숲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숲 초입에 설치해둔 마력막이었다.
우체통처럼 생겨선 편지함 대신 계기판을 머리에 단 기계가 네 가지 바탕색 위에서 바늘을 움직였다.
[공인된 마법사, 공인된 비마법사, 비공인된 마법사, 비공인된 비마법사.]
발자크와 차탈은 거의 동시에 경계를 통과했다.
그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목적지를 잃고 빙그르르 돌던 바늘이 안정을 되찾은 듯 공인된 마법사를 뜻하는 파란 바탕에 우뚝 멈췄다.
“들어가게. 제프리가 궁 밖까지 배웅해 줄 걸세. 뭐, 이젠 발자크 자네도 눈 감고도 궁을 돌아다닐 경지가 되었겠지만.”
차탈은 멀찍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프리를 손짓하여 불렀다. 보좌관이라고는 하나, 요즘은 시종처럼 부려지고 있는 그였다.
제프리는 익숙한 듯 뛰어와 발자크 앞에 섰다.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로드 로스.”
“감사합니다. 제프리 경.”
발자크는 제프리에게서 모자를 받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먼저 물러가는 실례를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차탈은 퍽 아쉬운 눈치였다.
제국 귀족이 아닌 그와 친구가 된 건 최근 몇 년간 그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발자크 로스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고, 신의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제국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내비치고 나면 황위 계승을 위해 아등바등하던 삶에서 잠시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니 예정보다 일찍 자리를 뜨는 발자크가 아쉬울 따름이다.
“먼 곳에서 누이가 왔다 하니 어떻게 붙잡겠는가. 다음엔 자네 누이도 황궁에 초대해 주지.”
“영광입니다, 전하.”
“미스 스칼렛 로스. 맞는가?”
“예, 맞습니다.”
다무스에 산다던 발자크의 누이가 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편지 한 장 없이 급작스럽게 오라비를 찾아온 누이동생 때문에 발자크는 퍽 곤란스러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발자크를 붙잡을 순 없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사냥 시즌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말을 타고 너른 하버마일 숲을 누비며 그와 함께 짐승을 원 없이 사냥하리라.
‘곱상하게 생겨선 명중률은 높단 말이지.’
“제프리? 어서 신사분을 모셔가게.”
“가실까요, 로드 로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
발자크가 제프리를 따라 사라졌다. 차탈까지 자리를 뜬 후, 숲 속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검은 로브가 이끼 낀 흙길 위를 느릿하게 걸었다.
철컥.
정체 모를 인영이 숲의 경계를 지나자 바늘이 빙그르르 돌다 초록색 바탕에 멈춰 섰다.
[공인된 비마법사.]
황궁 출입이 자유로이 허가된 비마법사라는 의미였다.
검은 로브의 마지막 끝자락이 일렁이는 마력막을 통과하는 순간, 그림자는 서서히 후드를 벗었다.
앳된 외양과 달리 예리한 관찰자의 얼굴을 한 귀부인이었다. 당장 황제를 알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이 로브 밑에 숨어있었다.
올가 웰링턴이었다.
“…수상해.”
올가는 마력막 생성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숲을 통과하기 전, 분명 바늘은 두 사람 모두를 공인된 마법사라고 인식한 듯 보였다.
그러나 숲에 숨어 내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올가는 분명 보았다. 발자크 로스라는 작자가 마력막을 통과하던 순간, 바늘이 붉은 바탕에 멈춰 선 것을.
붉은 바탕은 다름 아닌 비공인된 마법사, 즉, 살수나 다름없는 자를 의미하는 뜻이었다.
황제의 신변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황궁에서 비공인된 마법사를 이토록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마력막 생성기는 오차 범위가 지극히 낮은 물건이었다.
‘라크시스 옌이 만든 마도구니까.’
차탈에게 축객령을 받았으나, 올가는 괘종시계 뒤 비밀통로로 빠져나간 후 황제에게 가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황제는 찾아오기로 약속한 손님들 때문에 티 파티 준비는커녕 알현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바쁠 것이다.
사실 올가는 오래전부터 발자크 로스가 영 탐탁지 않았다. 차탈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시점도 발자크 로스를 만난 시점과 얼추 비슷했다. 라크시스 옌에게 맹목적이 된 것도, 이젠 황위보다 오로지 라크시스 옌을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겉보기에 차탈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올가는 차탈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증뿐이었지만 발자크 로스가 그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발자크가 차탈을 만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막상 황제 폐하께선 대공 전하의 위협조차 모르고 계신데.’
황제는 왜인지 조지 황자를 순산한 이후로 더 무방비하게 굴었다.
제아무리 입헌군주제의 상징으로 전락한 황제라지만 알리나는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무슨 일이든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제국의 관습을 교묘하게 이용해 제 뜻대로 제국을 움직이는 진정한 실세였다.
하나뿐인 남매에게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하고도 남아야 할 위인이 어째서 물 위의 백조처럼 저리도 평화로울 수 있는지.
올가는 황궁의 후원을 가로질러 작은 화단 밑에 로브를 둘둘 말아 감추었다. 그러곤 드레스 자락이며 구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마치 정원 구경을 나온 황제의 시녀처럼 우아하고도 도도하게 후원을 활보하다가 웬 부름에 우뚝 멈춰 섰다.
“레이디 웰링턴,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올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에게 다가온 건 헉헉거리며 뛰어온 제프리였다.
“여쭈시는 건 상관없지마는, 경께서 왜 여기에 계신 건가요?”
분명 발자크를 배웅하라며 차탈이 불렀던 것을 보았는데? 평범한 걸음 속도론 이 넓은 황궁을 벌써 빠져나갔을 리가 없다. 제프리가 중간에 발자크를 어디 내다 버리지 않고서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