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황제의 티 파티 】
“무슨 말씀을 그리 재미나게 나누시길래 엉덩이가 소파에 붙어버리신 건가요? 아가씨, 제 말을 듣고 계시긴 한 거죠?”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인.”
시아는 멍하니 요크 부인에게 대답했다.
참는 건 자신 있다, 라. 그는 무엇을 참고 있었을까. 상관없었는데. 참지 않아도.
“소파에 누워계셨어요? 아침에 머리를 다듬어서 올려드렸는데 다 흐트러졌네.”
“죄송해요, 부인.”
요크 부인에게 이끌려 일어나면서도 시아는 라크시스만을 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뒷모습이 뜨거운 용암처럼 망막에 자국을 남겼다. 그의 뒷모습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덧그린 적이 또 있었을까.
“사용인에게는 말씀을 낮추시라니까요, 아가씨. 다음번에 피곤하시면 이 요크 부인을 불러 주셔요. 제가 아가씨 방에 금방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까.”
하지만 요크 부인은 시아의 시선이 어딜 향해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궁내관들이 신경 쓰여 손을 놀리는 데 집중했다.
“옷은 또 왜 이런담.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네요. 어머, 아가씨.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지셨어요?”
“…제 얼굴이, 빨개요?”
“네에! 열이라도 있으신 건가? 어머, 어머어머. 진짜로 열이 나네요. 이럴 때 잘못하면 금방 감기에 걸리고 말지요. 제가 금방 숄을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셔요!”
요크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재를 나가 버렸다. 감기에 걸려 아플 아가씨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병에 걸린 사람은 황제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티 파티에 초대되는 영광을 감기 따위로 무산시킬 순 없었다.
요크 부인이 사라지고, 시아는 부인이 매만져준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단추가 떨어진 이유. 그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발뺌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었다. 시아는 결 좋은 은발이 움찔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에라도 뒤를 돌아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참는 데에 자신 있다더니 거짓말이다. 태연하려고 해도 저리 티가 나니, 지금의 그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산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라크시스가 다가오길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던 그 순간부터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던 무형의 벽이 허물어졌음을 깨달았다.
착각과 외면과 부정으로 점철된 얄팍한 이성에 금이 간 순간, 그와는 절대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흘린 우유를 주워 담을 수 없고, 깨진 잔을 도로 붙일 수 없듯, 한 번 밀려오기 시작한 마음을 어찌 막으랴.
자각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맥동하는 심장이 데일 것처럼 뜨겁다. 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쿵쿵. 깨달은 진심이 아우성을 쳤다.
이토록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감정을 어떻게 외면할까.
“요크 부인도 참. 그렇게 호들갑 떨 것도 없다니까.”
요르문이 어기적거리며 연구실에서 기어 나왔다. 요크 부인이 서재에 찾아왔을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역시나 또 잔소리를 들을까 봐 피해 있었던 모양이다.
서재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이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는 라크시스와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옷깃만 자꾸 매만지는 시아까지.
이럴 거면 그냥 교제를 하라니까.
요르문은 흐음, 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차라리 대놓고 염장을 지른다면 피하기라도 할 텐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두 사람의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끼어드는 것도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누님도 분명 라크 녀석에게 마음이 있는데.’
요르문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에게 툭 말을 걸었다.
“안 그래요, 누님?”
* * *
황궁 동관. 노든 대공의 서재.
“…주제넘으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경솔하셨습니다, 대공 전하.”
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올가는 눈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었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재떨이 조각이 그녀의 발치로 굴러왔다. 붉은 카펫이 담뱃재가 쏟아져 시커멓게 엉망이 됐다.
“젠장!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분을 못 이겨 고성을 지르던 차탈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털썩 앉았다.
눈알이 아려왔다. 의자 등받이에 목을 걸치곤 천장의 화려한 무늬를 억지로 덧그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알현식 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가 자꾸만 떠오를 것 같았다.
“무엇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알 거 없어. 피곤했나 보지. 예민한 것도 그 때문이고.”
퉁명스레 대꾸했는데, 부드러운 천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걸 보니 뜨거운 물에 적셔온 수건 같았다.
문간에서 어렴풋이 보좌관 제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는 올가를 들킬까 은 대야와 물수건을 가져온 하녀들을 멀리 쫓아내는 것 같았다.
눈가에 번지는 온기에 한결 머리가 진정되는 기분이다. 차탈은 폐 깊숙이 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천천히 내뱉었다.
대체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것도 소문이 퍼질 것이 뻔한 알현식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어.’
홀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깃털을 머리에 매단 시아 켈튼이 알현식의 첫 번째 순서로 걸어오는 걸 본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자신의 미술원 초대장을 거절하고 대체 어떻게 사교계에 데뷔를 하려고 하나 싶었는데, 라크시스 옌이 단단히 수를 써놓은 것이다.
알현식 참석자 명단에 시아 켈튼의 이름이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자신을 방심하게 해놓고 보기 좋게 한 방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 여자가 첫 번째로 입장하는 걸 보고 분노했던 건 맞다. 상대에게 당하고 나서도 속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까지 욱하면서 나설 일은 아니었다.
시아 켈튼이 홀에서 퇴장할 땐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갔다. 속마음이 음형을 갖추곤 마치 누군가가 속삭이듯 귓가에서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텐가? 패배자처럼?]
‘패배자라니. 아직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차탈은 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에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아직 패배자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난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사람인가? 내가 나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하, 괜찮으십니까.”
차탈은 움찔 놀랐다. 정신이 들자 올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등이 축축했다. 그 짧은 시간에 식은땀이 흘러 두피부터 옷까지 서늘하게 적신 탓이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아졌다. 악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시야가 좁아진 채로 자신도 모르게 일을 벌이기도 했다. 시아 켈튼을 뒤쫓아 갤러리까지 들이닥쳤던 그 날처럼.
“…머리가 아프군.”
올가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차탈을 보며 숨을 죽였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은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단순히 무위라든가 체력을 가지고 약하다고 한 건 아니었다. 정신력 하나만큼은 질기고 단단한 차탈이 요즘 들어 사소한 일에 자꾸만 흔들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프리의 노크에 차탈은 눈을 뒤덮었던 손을 떼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발자크인가.”
“전하. 또 그자입니까.”
반색하며 문간으로 향하는 차탈을 막아선 올가가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썼다.
언제부터 주인이 발자크 로스와 어울리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그 시작점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올가는 발자크 로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신원이 불분명한 다무스 출신 귀족.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신사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차탈이 발자크와 친분을 갖게 된 후 제국을 헤집고 다니던 정체불명의 마법사를 더는 쫓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비록 황위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움직이는 성정이라 해도 차탈은 자신이 나고 자란 제국을 아꼈다. 오래전, 올가가 차탈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실에 피바람이 불지언정 제국만큼은 온전히 보호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차탈이 라크시스 옌을 경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몇 년 전, 차탈은 황궁에 숨어든 불길한 마력을 감지했다. 올가야 마법사가 아니니 몰랐지만, 대마법사인 차탈은 그것이 저주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 후로 차탈은 황궁에 드나들던 저주의 마법사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검은 코트를 입었으며, 수도 전역을 횡보하며 신사 행세를 하는 인물인 것도 알게 되었다.
차탈은 한때 검은 코트의 마법사로 라크시스 옌과 요르문 켈튼을 지목했다. 제국엔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마법사가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탈은 일부러 라크시스 옌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도, 글레이셜 홀에도. 켈튼 저에 감시역을 보내는 걸로도 모자라 아르카나 뒷골목의 음침한 술집에도 저 대신 라크시스 옌을 감시해 줄 대역을 세워두었다.
‘그때쯤이었지. 발자크 로스라는 작자를 만났던 게.’
이렇게만 들으면 차탈이 라크시스 옌을 경계하다 못해 병적으로 집착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맞았다. 올가는 정치적으로만 라크시스 옌을 견제하던 주인이 어느새 고대 마법사를 지나치게 배척하게 된 것을 보고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녀가 알던 차탈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또라니.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신사들 사이에서 말이지.”
“전하. 발자크 로스도 신분이 불확실한 자입니다. 레이디 시아 켈튼과 다를 바가 없어요. 차라리 리암 블레어 쪽에 조금 더 신경 쓰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만.”
올가의 말에 차탈이 이죽였다.
“언제는 발자크 로스와 친분을 쌓아두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나? 다무스 출신의 세력가가 어디 흔하냐며 말이야.”
올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탈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그의 손엔 책상에서 집어 든 잉크병이 있었다.
던진다. 분명 던지고 말 거야.
“어차피 그날 이후로 리암 블레어에게서 연락이 오질 않아. 그놈도 머지않아 고대 마법사에게 붙겠지. 라크시스 옌이 정치를 한다면 노동당의 편을 들까? 노동이라곤 전혀 해본 적도 없는 것처럼 번지르르하고 오만한 그 낯짝으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