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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91)화 (191/292)
  • 191화 

    “으아아악!”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는 요르문에 이번엔 시아가 낄낄거렸다. 결국 이 대결의 승자는 시아로 끝이 났다. 나이 같은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게 생겨선 예민하게 반응하니, 당연히 요르문이 질 수밖에 없는 대결이었다.

    “오라버니. 첫 만남에서 제가 누나라고 거짓말을 해버렸지 뭐예요? 이제라도 정정할 테니 화 푸세요, 오라버니.”

    “누님, 제발!”

    “오라버니.”

    “누니임,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제가 누님으로 부르게 해주세요, 제바알…….”

    이 촌극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던 라크시스는 그저 고개를 가만히 저을 뿐이었다.

    떨어트린 종이를 대충 모아 집어 들곤 요르문이 연구실로 줄행랑을 쳤다. 그가 사라지자 서재가 한결 조용해졌다.

    웃음을 멈춘 시아는 민망하여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수북이 쌓인 신문과 초대장을 보자 서서히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한 차례 정적이 흐르고 나서 시아는 조심스레 화두를 꺼냈다.

    “라크. 그나저나 그날 갤러리에서 본 대공이 좀 이상했어요.”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굴던 차탈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에게 당해서 화가 났던 것과는 별개로 대외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능숙하다던 차탈이 보는 눈도 많은 황궁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라크시스도 같은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속이 시커멓다 한들 겉으로는 절대 그 속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차탈에게 일방적으로 감시와 견제를 당하며 살아왔음에도 라크시스가 그를 내버려 두었던 이유였다. 어차피 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고 죽을 사람인데, 황위에 목숨을 건 자를 괜히 자극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던 것이다.

    “알현식 날엔 유독 이상하게 굴었죠. 마치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시아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말했다.

    “그런데 제가 배운 역사 속 차탈 황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연구실로 도망쳐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르문이 멀리서 끼어들었다.

    “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기록해서 그런 거 아녜요? 그런 왕들 많았다면서요.”

    “그런가? 글쎄…….”

    시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욕망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사람은 사람이니 차탈도 황위를 욕심냈을 순 있었다. 그러나 역사서 속의 차탈은 이렇게 치졸하고 비겁하게 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간 마도 시대에서 만나왔던 차탈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군 적이 없었다.

    알리나의 뒤를 이어 그가 재위 기간 안에 벌였던 이런저런 국가사업들을 생각하면 차탈은 큰 잘못을 저질러 대중 앞에 무릎을 꿇고 돌을 맞을지언정, 저런 식으로 추하게 무너질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눈빛이 이상하긴 했어.’

    시아는 부르르 떨며 갤러리에서 마주한 차탈을 떠올렸다. 그런 광인의 눈은 재키 레이븐에게서 본 이래 두 번째였다. 문자 그대로 무언가에 미쳐있는 눈빛.

    핏발 선 흰자가 자꾸만 헨리 던로와 겹쳐 보인다.

    에이, 아닐 거야. 시아는 불현듯 떠오른 끔찍한 가정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차탈이 이단의 신도일 리가 없다. 그랬다면 그는 성군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폭군으로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 라크시스에 따르면 카얄이 저주의 제물로 썼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마법사였다고 했다. 마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저주를 걸 때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었다.

    황혼 국교회의 수법이 기존의 국교회 신자들을 교묘하게 속여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 교리에 물들게 하는 거라고 하던데. 라크시스는 마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저주에서 풍기는 이상함을 감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게 저주인 줄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껴 도망치거나 하는 등 말이다.

    라크시스는 차탈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저주의 기운 정도는 금방 알아챌 거라 말했다. 황족이자 마법사로 태어난 차탈은 나고 자란 환경 때문에 애초에 저주가 고대에 사멸된 위험한 마법이라는 사실을 배웠으리라고 말이다.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자니까요. 욕망에 휘둘리긴 해도 제국을 등질 사람은 아닙니다.”

    라크시스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차탈을 이성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그래, 대공은 원래 이런 느낌이었는데. 시아는 자꾸만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팔뚝을 문질렀다.

    “저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이번엔 사리 분별도 못했으니까 문제인 거죠.”

    “…이번엔 이쪽에서 뒷조사를 해봐야겠군요. 대공이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였다.

    “이런 거였어! 그래, 이거였다고!”

    연구실에서 환희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알몸으로 욕조에 들어갔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고대의 과학자가 기쁨에 환호했던 것처럼 말이다.

    “라크, 이리 와보지! 누님, 어서 와보세요!”

    아무래도 몇 날 며칠을 붙들고 있었던 바람장미에서 무언갈 발견한 모양이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짓했다.

    “라크, 가볼까요?”

    “그러죠.”

    고작 뚫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서재와 연구실의 분위기는 도무지 주인이 같을 거라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대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서재는 벽에 달린 황동 파이프관과 태엽 새 오르골 따위를 빼곤 얌전하고도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얇은 벽 한 장을 넘어서자 온갖 기계로 빽빽하게 채워진 요란한 장소가 나타났다.

    올 때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시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미래의 양부가 더는 연구실을 출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좋아했었던 마류학과 마도 공학을 포기하게 된다니. 마도 시대의 종말을 거치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광룡의 부활이란 진정으로 비극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만다.

    요르문은 구리 선과 종이에 둘러싸여 바닥에 앉아있었다. 시아와 라크를 불러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종이에 알 수 없는 그래프와 수식들을 휘갈기는 중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바보같이 헛발만 짚고 있었던 거잖아. 이건 장소에 대한 측정값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측정값이었다고. 프레디는 같은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봉인의 파장을 측정한 거야. 봉인의 위치는 진작 알고 있었고, 봉인이 언제 파괴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고!”

    분석에 몰두한 요르문이 혼자 중얼거렸다. 시아는 요르문의 등 뒤에 서서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요르문.”

    그러자 요르문은 그들을 환하게 올려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누님! 드디어 바람장미의 비밀을 알아냈어요! 이제 노동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 * *

    “다행이네. 그런데 원래 이런 바람장미가 그려진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시아는 아르카나라는 지명이 적힌 수십 장의 바람장미 중 수치가 최대로 측정되어 팔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그려진 바람장미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어떤 건 북동쪽으로 불쑥 치솟아있고, 어떤 건 남서쪽으로 불쑥 치솟아 있었다며. 처음엔 봉인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 여러 곳에서 마력을 측정해 그린 바람장미라고 했었잖아.”

    “그랬었죠.”

    시아는 팔각형 형태의 바람장미들을 골라 바닥 한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를 빙 돌아가며 중심을 향해 그래프가 솟구친 형태로 바람장미들을 놓았다. 그러자 꽃이 피어난 것처럼 한 묶음의 바람장미들이 모여 거대한 원을 그렸다.

    시아는 중심에 놓인 팔각형 형태의 바람장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프레디 뮐러가 바로 이 중심지의 위치 정보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했었지. 파장의 진원지 말이야.”

    그래서 요르문은 프레디의 별장에서 자료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봉인의 파장이 측정되는 장소를 아르카나부터 맨덜랜드까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지진의 진원지가 존재하고 그 진원지를 중심으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측정된 지진파를 기록한 그래프가 있는데 정작 진원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그래프에 적혀있지 않아서 발로 뛰며 지진의 진원지를 탐색해야 된다고 했던 상황이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그 지진은 아주 특이한 형태의 지진파를 발산하는 지진이라 요르문과 라크시스도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지진이었다.

    ‘그 비유를 적용하자면, 난 언제나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시점에 진원지 위로 시간 여행을 했던 거지.’

    그래서 예전에 요르문이 바람장미를 분석해서 봉인을 찾는 것보다 시아가 시간 여행을 하길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시아는 언제나 최적의 타이밍과 장소를 찾아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님은 바람장미를 이런 모양으로 배치하면서 바람장미의 방위를 모두 무시했죠. 이걸 봐요, 이건 이쪽이 위로 가야 되고 저건 저쪽이 위로 가야 한다구요.”

    “…그러네.”

    요르문의 지적을 받고 바람장미를 살펴본 시아는 자신이 정말로 동서남북 표시를 무시하고 바람장미를 배치했단 걸 알아챘다. 종이를 돌려 방위를 맞추니, 그녀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규칙성이 사라진 바람장미에서는 그들이 같은 지역에서 그려진 바람장미라는 것을 빼고 추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렵네…….”

    “저도 처음엔 이것 때문에 많이 헤맸었죠. 하지만 제가 발견한 게 있다고요?”

    요르문이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누님이 찾아다 준 서적에 적혀있던 그 파장값 기억하시죠?”

    어, 음. 시아는 말을 얼버무렸다. 얼마였더라.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현식을 준비하는 동안엔 봉인 찾기에 소홀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아는 요르문에게 미안해서 차마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980mght……?”

    “네, 그거요. 그 값 자체가 애초에 대지 위에서는 관측될 수 없는 값이라 지금까지 그 숫자에 너무 집착했었거든요.”

    시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충 그런 숫자였던 것 같은데, 다행히 어림짐작으로 맞혔다. 그나저나 대지 위에서 관측될 수 없는 값이라니.

    ‘검은 별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서적을 쓴 신화학자는 천체 물리학의 이론을 갈리프 신화에 대입해 사도의 존재를 추론했다. 그가 인용한 천체 물리학의 가설에 따르면 우주에는 검은 별이 존재한다고 한다. 거대한 별이 죽음을 맞이하는 형태 중 하나로, 스스로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한없이 수축하다 종국에는 가까이에 있는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파괴적인 검은 별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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