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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90)화 (190/292)

190화 

【 숙녀를 위하여 】

다음 날,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와, 진짜 살벌하네요.”

시아는 진절머리를 치며 신문을 덮었다. 그녀의 발치엔 모르간 타임즈를 비롯한 각종 일간지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뿐이랴. 날이 밝기가 무섭게 시아 켈튼의 앞으로 날아온 무도회의 초대장이 테이블 위에 수북했다.

켈튼 저택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 사용인들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아주 즐거워했다. 다행히 그들의 주인, 요르문도 저택으로 초대장이 날아드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켈튼 저택의 서재에서 아침부터 홍차 향이 풍겼다. 사용인 하나 없는 공간에서 다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요르문은 서재와 연구실을 이은 문을 들락거리며 바람장미를 분석한 데이터값을 정리하고 있었고, 라크시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폭의 명화처럼 차를 우려내는 중이었다.

“여기요. 마셔봐요.”

“고마워요. 라크.”

시아는 라크가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지금 그녀의 앞엔 들고 있는 잔 외에 또 하나의 찻잔이 있었다. 두 잔 모두 레이디 마거릿에 우유를 타서 만든 부드러운 홍차였다.

차를 홀짝인 시아가 살짝 인상을 쓰며 갸웃거렸다.

“별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요. 제가 둔해서 그런가.”

“대부분은 못 느끼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라크시스는 본인 몫의 찻잔과 함께 시아의 맞은 편에 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제국민들에게 있어 세기의 난제라는, 홍차에 우유를 넣는 순서였다.

우유를 먼저 넣느냐, 나중에 넣느냐. 도기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뜨거운 찻물을 부으면 찻잔이 깨져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찬 우유를 먼저 넣고 뜨거운 찻물을 부어 밀크티를 즐겼다. 그러나 다무스에서 고급 다기가 수입이 되면서부터 상류층을 중심으로 뜨거운 홍차의 색과 맛, 향기를 즐긴 후에 우유를 넣어 먹는 방법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국민들은 홍차에 우유를 먼저 넣느냐 나중에 넣느냐를 가지고 사소하지만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취향과 기호의 영역에 놓인 홍차는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난제로 남을 것이다.

“라크는 어떻게 마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우유를 나중에 넣는 걸 좋아합니다.”

역시 어느 시대에서나 상류층이었다 이건가. 시아는 라크시스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보며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하긴 뭐든지 귀족적인 게 어울릴 것같이 생기긴 했지. 우유를 나중에 넣는 게 상류층의 방식이었다 하니 왠지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라크도 본연의 차 맛을 즐기는 편인가 봐요.”

맑고 따뜻한 차를 먼저 즐기고 그 후에 우유를 넣는다, 라. 나도 한번 그렇게 마셔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라크시스가 만들어준 차를 다시 한번 입 안에 머금고 음미했다.

그러나 라크시스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전 그저 맑은 찻물에 번져나가는 우유를 보는 걸 좋아하는 것뿐이라.”

“…맛 때문이 아니라요?”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도 그 둘의 차이를 잘 모른다고요.”

그러면서 차를 홀짝 들이켜는 게 아닌가.

시아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어? 차 맛을 예민하게 느껴서 그런 게 아니라?

라크시스가 찻잔에 우유가 퍼져나가는 걸 가만히 구경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겼는데. 이런 걸 귀엽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시아의 시선을 느낀 라크시스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웃음이 살짝 미심쩍었으나 라크시스는 되묻기를 그만두었다. 아무렴 어떠랴. 그녀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시아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좋네요.”

차를 마시며 소파에 기대니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시아는 따스한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초록 가득한 켈튼의 정원을 보고 있자니 활자에 지친 눈의 피로가 씻겨나가는 것 같다. 거리의 희미한 소음 사이로 새의 지저귐이 들렸다.

알현식이 있었던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특종이 연이어 쏟아졌다. 대부분은 알현식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었다. 알현식의 순서를 완전히 뒤바꾸며 나타난 두 여인과 그들이 황제에게서 받은 극찬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지면엔 두 여인에게 얽힌 사연이 자극적이면서도 동정심을 유발하게끔 잔뜩 부풀려져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고꾸라진 주식이라든가 풍랑에 침몰한 무역선은 빛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의회조차 휴식하는 사교계 시즌이었다. 물론 의회의 회기가 끝나기에 열리는 것이 사교계 시즌이었으나, 시즌이 몰고 오는 폭풍 같은 가십 덕에 사람들의 머릿속엔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탈 세페란테의 추락 - 두 얼굴의 황위 계승자]

차탈에 대한 사설이 난무했다. 대공의 보복을 두려워한 기자들은 차마 싣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차탈의 지지자들과 그 반대 진영의 세력이 피 터지게 싸워가며 알아서 신문에 실어준 탓에 온 제국민이 알현식 날 갤러리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게 되고 말았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이번 일로 시아는 제국에 미치는 라크시스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라크시스 옌은 누구를 지지하는가?]

라크시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진 여러 당 중 총리 리암 블레어를 필두로 한 보수당이 의회를 장악하여 기득권을 차지한 가운데, 다음으로 세력이 큰 노동당이 끊임없이 의회에 도전하며 보수당과 대치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상 양당 대립 구도라고 봐도 상관없는 상황에서 두 세력은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조무래기 당들은 감히 싸움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라크시스 옌이 어떻게 끼어드느냐에 상황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바뀔 수 있다는 거다.

[보수당과 노동당의 대립은 이미 정체된 지 오래다. 향후 정국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라크시스 옌뿐이다.]

시아는 제국의 판도를 뒤집네 마네 하는 남자를 눈앞에 두곤 중얼거렸다.

“이러니 대공이 안달 날 만했네요.”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라크시스만큼 본인의 파급력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시아는 눈만 끔뻑거렸다. 이젠 겸손마저 재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신 나간 놈이었죠.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요.”

계속해서 무언가를 끄적이며 돌아다니던 요르문이 말을 보탰다. 지난 나흘과 달리 요르문의 표정은 꽤나 밝아져 있었는데, 시아가 알현식 준비를 하느라 그간 확인하지 못한 봉인의 좌표와 시간 여행의 시기를 오늘 아침 결국 모두 맞춰보았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오늘 아침 해가 뜨자마자 머리를 맞대고 그간 발견했던 광룡의 봉인이 정확히 언제부터 불안정해졌는지를 추론해 냈다. 그녀의 시간 여행 시기와 봉인이 발견된 장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었는데,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작업을 마치고도 이들이 아침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간 홀로 고생했던 요르문을 위해 시아와 라크시스가 새벽같이 일어났던 덕분이었다.

한편 라크시스는 한층 가라앉은 표정으로 아찔했던 알현식 날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뭐, 큰일까지야 있었겠어요.”

“시아.”

험한 일을 당한 당사자인 시아는 오히려 그날의 공포를 살짝 잊은 듯한데, 그 광경을 뒤에서 목격했던 라크시스는 숨통이 옥죄어 오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아가 떨고 있었다. 만난 이래 그녀가 그토록 떨고 있었던 모습은 처음이었다. 차탈에게 당한 게 억울하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느낀 두려움에 온몸에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재키 레이븐을 만났을 때도, 아스타의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도 이렇게까지 겁에 질린 적이 없었다. 그랬던 시아가 고작 차탈 같은 놈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니.

라크시스는 시아를 우악스레 붙들고 있었던 차탈의 손을 공간왜곡으로 잘라버릴 뻔했다. 이성이 그를 붙들지 않았더라면 라크시스는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저는 당신이…….”

“사실 그 변태 자식 이마를 깨부수려고 했거든요. 코를 물어뜯거나요.”

뒤이어 시아가 험한 말을 하며 시원하게 차탈을 욕했다. 조용히 분노하고 있던 라크시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멍하니 시아를 바라보았다.

라크시스와 마찬가지로 놀라버린 요르문이 움찔 굳어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렸다. 그러곤 왈칵 웃어젖혔다.

“아학학학! 정말이지, 역시 내 누님이라니까!”

시아가 욕을 하다니.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사였으나 그렇다고 귀에 착착 감기는 이 찰진 욕설은 절대 못 들은 척하고 넘길 수 없었다! 결국 요르문은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아학, 와아 진짜 누님, 아흑흑, 그 깐깐한 부인이 들었다면 그대로 기절했겠어요! 큭큭큭큭…….”

여기서 그가 말한 깐깐한 부인은 다름 아닌 밀레이나였다. 요르문이 상상 이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자 부끄러워진 시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욕설의 학습처를 실토했다.

“…내가 누구에게 이런 걸 배웠겠어. 아버지에게 배웠겠지.”

“아버지라뇨! 누님, 소름 돋아요!”

아버지. 그 한 단어에 실컷 웃던 요르문이 질겁을 하며 팔짝 뛰었다. 어쩜 자신을 그렇게 부를 수 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팔을 문질러대는 게 아닌가.

시아는 당황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원래 시대의 양부도 자신을 나이 든 사람 취급 하는 걸 굉장히 꺼려했었다. 예컨대 아흔 언저리의 노집사 헤이든이 본인에게 연세라는 표현을 쓴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질색을 하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니까 괘씸한데. 지금의 요르문도 껍데기만 소년이지, 속에 든 건 스물여덟인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아저씨잖아.

“그렇게 따지면 지금 네가 날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알지?”

“거기까지. 그 이상은 저도 못 견뎌요, 누님.”

라크시스에게 꼬맹이 소리를 듣는 건 어떻게 버텨도 시아에게 연장자 취급을 받는 건 못 참겠다는 거다. 실제로도 마도 시대의 요르문은 스무 살쯤으로 보이는 낯짝을 하고 있었다.

오호, 그렇다 이거지?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당해봐라. 시아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장난기 발동 경고음이 왱왱 울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아가 수줍은 듯 몸을 꼬았다. 순진한 표정으로 무장한 얼굴을 들며, 요르문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요르문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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