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옌 경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이지.”
“약속을 깬 건 대공 전하 아니신가요? 라크와 요르문은 대공 전하께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어요. 먼저 제 뒷조사를 하고 라크를 감시한 건 대공 전하셨고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질 자격도 없지. 순진한 여자 같으니. 방심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만큼 멍청한 실각도 없을 거야.”
완전히 미쳤어. 시아는 차탈의 일방적인 주장에 진절머리가 났다. 역사에 기록된 17대 황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설마 차탈이 이렇게 된 것도 시간 여행 때문인 걸까?’
역사가 권력의 서사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터다. 차탈은 알리나 다음으로 호평을 받는 황제였다. 차탈에게 이런 모습이 숨어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아무도 기록하지 못했던 걸까.
전자든 후자든 차탈에게 실망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이제라도 실체를 알았으니 됐다. 첫 번째 시간 여행에서 라크시스가 차탈을 뱀 같은 자라고 평하던 게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아파요. 이거 놔주세요.”
차탈의 손이 시아의 손목을 점점 파고들었다. 장갑을 벗어보면 틀림없이 붉게 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와 차탈을 제외한 갤러리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그저 흥미롭게 구경할 뿐이었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가 레이디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틀림없이 가십거리가 되리라. 고대 마법사의 연인, 황자와 사랑에 빠지다. 시아는 차탈이 노리는 것을 단번에 파악했다.
“대모님, 두 분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금만 기다려보고 정 안되면 내가 말리마.”
라크시스와 시아의 실제 관계를 알고 있는 레베카와 밀레이나만이 불안한 마음으로 차탈에게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라크시스 옌이 이 꼴을 보면 재미있겠군. 안 그런가?”
차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끝에 느껴지는 남자의 숨결이 지나치게 불쾌하다. 시아는 차탈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러다 키스라도 하시겠어요.”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명예라는 건 자고로 레이디에게 더 엄격한 법이니까.”
미친 새끼. 조금만 더 가까이 와봐라. 내가 그 잘난 이마를 부숴버릴 테니까. 시아는 당장이라도 박치기를 할 수 있게 심호흡을 하며, 목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추하군.”
“뭐?”
시아를 뒤덮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확히는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졌다. 차탈이 뒤로 휙 끌려간 탓이다.
“……!”
쿠당탕탕! 제 옷깃에 목이 졸려 캑캑거리던 차탈이 볼썽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꺄악! 차탈을 피해 화들짝 도망친 여인들의 새된 비명이 갤러리를 울렸다. 바닥을 구르면서도 차탈은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겠다. 차탈은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갤러리에서 대기하던 여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알현 순서가 된 여인들은 그네들의 이름이 호명되어 홀의 문이 열린 것조차 잊고 멍하니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새 나타난 라크시스 때문이었다. 그의 발밑엔 공간이동의 증거처럼 동그랗게 바람이 고여있었다.
고대 마법사의 손엔 신사의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지팡이를 거꾸로 잡고, 지팡이의 손잡이로 차탈의 뒷덜미를 잡아채 당겨낸 것이다. 낚싯대에 채여 물 밖으로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차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내동댕이쳐졌다.
반면 라크시스는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를 보자마자 그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음장 같은 미소가 그린 듯이 고대 마법사의 얼굴을 지배했다. 초승달처럼 가늘어진 시선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라크시스는 공중에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크시스가 지나가자 복작이던 갤러리에 길이 생겨났다. 여인들은 라크시스의 기세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해 물러섰다.
“신사가 되어서 숙녀의 손을 이렇게 함부로 잡으면 쓰나.”
“큭, …네놈이 감히!”
차탈이 벌떡 일어나 노성을 내질렀다. 라크시스는 그를 가뿐히 무시하고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 괜찮습니까?”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라크시스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툭 났다. 시아는 코를 삼켰다. 차탈에게 잡혔던 자리가 아직까지도 욱신거렸다. 괜찮다는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차탈이 이렇게까지 미친놈인 줄은 몰랐으니까.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요시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자가 알현식 대기실인 갤러리까지 찾아와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차탈에게 감겼던 허리며, 붙잡혔던 팔목에 끔찍한 소름이 돋았다. 시아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이 젖어 드는 걸 본 라크시스가 시아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장갑을 벗겨냈다.
“…많이 부었군요.”
차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시아의 손목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크시스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치유술이 시작됐다. 고대 마법사의 청량한 마력이 팔목을 감싸고 통증을 제거했지만 시아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당한 걸 제대로 갚아주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짓씹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뜯어져 새빨갛게 부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칠십 년 후의 사람이었으니까. 황제도 귀족도 절대적인 세를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결혼 시장도 없는 데다가 스물여덟의 귀족 여인이 의술사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으니까. 마도 시대의 고리타분한 예법이나 무형의 계급이 없는 시대에서 온 사람이었으니까.
칠십 년 후에 그녀가 이런 일을 겪었더라면 아마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거나, 경찰에 신고해서 범인이 죗값을 치르게 했을 것이다. 주변인들도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을 황자의 로맨틱한 출현 따위로 오해하지 않았을 테지.
그러나 이곳은 시아에겐 낯선 곳이었다. 누구도 황자의 짓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갤러리에 있던 여인들이 그녀와 차탈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라크시스는 시아의 머리칼을 가만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곱슬기가 풀려 원래대로 돌아온 잔머리가 식은땀과 뒤엉켜 뺨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
“…네.”
라크시스는 시아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한 번만 도와줄래요?”
낮게 가라앉은 라크시스의 목소리에서 시아는 라크시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차탈을 엿 먹이는 것. 시아는 벌게진 눈으로 조용히 끄덕였다.
라크시스가 대중을 향해 몸을 돌리며 소리를 높였다.
“음침한 사내로군그래. 발정 난 개도 이 정돈 아니겠어.”
발정 난 개. 자극적인 단어에 여인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단번에 이목을 모은 라크시스는 기세를 몰아 차탈에게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여인들만 모인 갤러리에 찾아와선 다짜고짜 숙녀를 끌어안다니. 이게 발정 난 개가 아니면 뭐겠냐는 말이야.”
갤러리엔 어느덧 구경꾼이 모여들고 있었다. 알현 순서가 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여인들이며, 고요한 홀을 울려대는 바깥의 소음까지. 갤러리의 열린 문 너머로 몰려든 인파가 보였다. 개중에는 주인의 목소리에 다급히 달려온 올가 웰링턴도 있었다.
차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누가 할 소릴! 그러는 네놈은 왜 갤러리에 왔지? 네놈이야말로 그 여자를 만나러 온 거잖나! 발정이 나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주제에……!”
그때였다.
“대공 전하!”
귀부인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귀부인에게로 향했다. 노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밀레이나 로드리치였다.
“옌 경은 제가 불렀습니다.”
“레이디 로드리치, 그대가 감히…….”
그러나 연륜의 귀부인 밀레이나 역시 차탈에게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정말로 무례하시군요. 황제 폐하의 탄신을 경축하는 신성한 날일진대, 이리도 소란을 일으키시다니요!”
“전하아, 제발 고정하시지요.”
차탈의 보좌관 제프리가 가운데로 뛰어들며 울먹였다. 그러나 차탈의 눈은 이미 반쯤 뒤집혀 있었다.
“자네들이 불건전한 관계인 건 온 제국민이 안다고!”
그러나 라크시스는 여유롭게 차탈의 말을 받아쳤다.
“불건전한 관계라니. 듣는 사람 서운하게.”
“다 큰 여인을 피후견인으로 삼아선 같이 사는 게 불건전한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야!”
“하아, 대공은 후견인이 치한으로부터 피후견인을 보호하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군.”
그러더니 라크시스는 시아를 향해 물었다.
“레이디 켈튼. 저자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라크시스는 웬 미치광이를 다 봤다는 듯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급격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라크시스에게서 이런 과장된 표정을 보게 되다니. 시아는 연기하듯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서, 그가 아까 부탁한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아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아, 여러분. 아아… 옌 경!”
동시에 라크시스가 굳었다. 시아가 갈대처럼 휘청이며 라크시스에게 안겨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공 전하께선 오래전부터 제게 추근대셨어요. 싫다고 했는데도 멋대로 서신을 보내시고 저희 가족에게도 찾아가셨죠……!”
로렌 허슬러로 다져진 연기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절정에 달해 있었다. 시아는 탐정뿐 아니라 케케묵은 관습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레이디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벗겨진 실크 장갑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라크시스의 품에서 애절하게 절규하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 레이디 켈튼이 지금까지 사교계에 나서지 않았나 보오! 맞아요, 얼마 전에 레이디 켈튼의 부친께서 주신의 곁으로 돌아가셨다고도 했죠?
이래서 옌 경에게 보호를 청했는지도 모르지. 대공 전하로부터 도망치려면 고대 마법사의 후견 정도는 받아야 했을 테니 말이오!
사람들은 이제 시아의 사정을 알아서 오해하기 시작했다. 웅성임이 커질수록 차탈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도 저도 못하고 시퍼레진 낯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 시아는 쐐기를 박았다.
“결국 허락도 없이 제 몸에 손을 대고, 파트너가 되어달라면서 위협하셨어요. 하지만 대공 전하를 제가 어떻게 거부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