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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8)화 (188/292)

188화 

시아도, 홀에 모인 모든 사람도 그대로 멈춰버렸다. 시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던 밀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레베카만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흠잡을 곳이 없구나, 레이디 켈튼.”

최고의 평가였다. 방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 얼떨떨해 시아는 하마터면 현실 감각을 잊을 뻔했다. 사교계의 중심이 되겠노라 불타올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머릿속에 축제의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알리나의 기백에 압도된 건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든 황제의 찬사를 받으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설령 사교계의 사, 조차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시아가 정신을 차리는 사이 황제는 이미 레베카에게 똑같은 찬사를 보내고 단상 위로 돌아가 있었다. 등 뒤에서 트레인이 도로 당겨지는 느낌만 아니었다면 시아는 아마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있었을지도 몰랐다.

“레이디 켈튼, 뒷굽을 조심하세요.”

뒷걸음질 치던 레베카가 살짝 휘청거리며 조언했다. 아마 드레스 자락을 밟은 모양이었다.

홀에서 나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알현식이었다. 온전히 뒷걸음질로만 카펫을 다시 걸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시아는 뒷걸음질이 더 쉽다고 느꼈다. 속이 후련했다. 사교계 데뷔고 뭐고 간에 마도 시대의 황제를 이렇게 코앞에서 만나본 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으리라.

마침내 문이 닫혔다. 쏟아지던 관심과 시선에서 해방된 시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니, 그녀가 나온 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다음 차례의 숙녀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알현 순서가 늦으면 늦을수록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도 늘어난다고 했지. 봄이라곤 하나 아직 찬 바람이 부는 시기다. 짧은 소매의 드레스 차림으로 냉랭한 갤러리에서 대기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래서 권력의 척도가 알현 순서에 반영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라크시스가 대단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알리나를 처음으로 알현한 레이디가 될 수 있었던 건 라크시스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대모님. 저 잘한 거죠?”

“그럼. 레베카, 사랑스런 아가. 넌 누가 뭐래도 이번 시즌의 주인공이란다.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마는…….”

레베카는 아직까지도 알현식의 설렘에 빠져있었다. 밀레이나는 그런 레베카를 끌어안다, 시아를 돌아보았다.

밀레이나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켈튼. 그대의 덕을 봤네.”

“제 덕이라뇨. 어쨌든 부인께서 절 도와주신 거잖아요.”

“알현식을 나흘 만에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블레어 스트릿 전부와 황제 폐하를 매수할 순 없잖겠는가.”

매수라니. 그렇게 말하니 라크시스가 아주 나쁜 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들리는데. 시아는 멋쩍게 코끝을 긁으며 밀레이나의 인사를 받았다.

“레베카가 무사히 데뷔를 치른 것도 어찌 보면 그대 덕분이지. 그대가 로렌시아호에서 레베카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밀레이나는 처음 만났을 때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첫인상은 역사책에나 나오던, 능력은 대단하지만 고지식하여 상대하기 까다로운 귀부인에 가까웠는데.

‘이젠 내게도 대모가 생긴 것 같단 말이야.’

비록 밀레이나와 함께 한 시간이 험난하긴 했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시아의 데뷔를 돕고자 했다. 아무리 그것이 레베카의 안전보장에 대한 대가라고는 해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밀레이나도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는 다르게 속정이 있는 사람이라 평할 수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곤 하지만 대녀를 계속 메이드로 살아가게 한 건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었지. 이렇게 레베카를 사람들 앞에 선보이게 된 게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뭔가.”

“대모님…….”

레베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밀레이나는 시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네.”

“…저도 감사해요. 레이디 로드리치.”

그러나 감동의 순간도 잠시였다. 밀레이나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듯 눈을 빛내며 팔짱을 꼈다.

“앞으로도 갈 길이 험난하네. 이미 지나간 무도회야 어쩔 수 없지만 남은 무도회와 파티라도 열심히 다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밀레이나가 손꼽은 무도회가 대략 오십여 개, 파티는 여든 개 가량이었다. 거기에 만찬과 각종 전시회까지. 시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손사래를 쳤다.

“죄송하지만 저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레이디 켈튼. 결혼 시장에서 가장 우위를 점한 숙녀가 무도회 초대장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전 여기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요……!”

남은 시간 여행 동안 온전히 봉인만 찾아도 모자랄 판에 웬 무도회랴! 데뷔를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카얄이 참석한다고 확실하게 보장된 것도 아닌 행사에 시간을 빼앗길 순 없었다.

거기다 결혼이라니. 애초에 시아는 칠십 년 후의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서 결혼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녀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의술원 공부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웬 결혼이람!

그러나 밀레이나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어도 참석하게. 그대가 쌓아둔 명성은 앞으로 결혼하게 될 남자보다 그대의 이름을 더 드높일 자산이 될 테니까.”

이건 밀레이나의 실제 경험담이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로드리치 후작이 살아있을 때도, 로드리치가는 로드리치 후작보단 밀레이나 로드리치로 유명했었다. 사업이며 예술 분야에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던 밀레이나는 그녀를 후원하던 후작과 눈이 맞아 결혼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밀레이나를 로드리치 후작 부인이 아닌 밀레이나 돔의 극장주이자 예술감독인 밀레이나 로드리치로 기억했다.

그녀의 실력과 명성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레이디들은 사교계와 관련된 명성을 쌓지. 나처럼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사업 같은 것에 손댈 여인이 그리 많진 않으니 말일세.”

밀레이나는 단단히 말했다.

“이왕 한 분야에서 쌓아 올리기 시작한 명예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뭐가 됐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은 법이니.”

그러니까 그게. 제가 관심 있는 분야는 결혼이 아니라 의술이라니까요. 그러나 시아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은 단 한 번도 밀레이나처럼 의술에 몰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술사가 되고 싶어 회복학과를 선택했고 지금은 의술원에 입학해 의술사의 길을 걷고 있긴 하지만, 밀레이나가 하듯 의술사의 끝장을 보려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밀레이나는 마음가짐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뒤늦게 듣기론 밀레이나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원래였다면 로드리치 후작과 결혼할 수 있는 급이 아니었다고 했다.

관습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 그것도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면서까지 스스로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있다니.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결혼은 안 돼요.”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만, 어쨌든 레이디 켈튼은 앞으로도 쭉 나와 함께하게 될 걸세.”

결국 백기를 든 건 시아였다. 시아는 밀레이나에게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알현식도 끝났겠다, 이 우스꽝스러운 깃털부터 빼버려야겠다. 시아가 세차게 타조 깃털을 뽑으려 할 때였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내 호의를 거절했던 거였군.”

머리로 향하던 손목이 돌연 낚아채였다.

억센 힘에 시아의 몸이 훅 끌려갔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반항할 새도 없었다. 주변에서 나오던 짧은 탄성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적막과 긴장. 알현을 대기하던 여인들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다. 시아는 그녀를 잡아챈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의 반응이 왜 그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공 전하.”

시아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차탈이었다.

알현식 도중에 뛰쳐나온 게 분명한 기색이었다. 그는 견장과 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예복 차림이었다. 바짝 세워 올려 포마드로 넘긴 붉은 머리 밑으로 땀방울이 흘렀다.

그의 낯빛이 영 좋지 않았다. 시아는 그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려 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레이디 켈튼. 난 우리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차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시아도 지지 않았다.

“…제가 분명 아무하고나 파트너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내가 그대를 너무 얕본 모양이야.”

“제가 아니라 라크를 얕본 거겠죠.”

“하!”

차탈이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관리되지 않는 입꼬리를 겨우 붙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보통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라크시스가 대체 뭐라고 답을 보냈길래 저렇게나 열이 받았을까. 남의 속을 긁는 것도 참 능력이야. 시아는 라크시스가 차탈의 초대장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해 보며 차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는 눈이 많은데 이러셔도 괜찮겠어요?”

“괜찮겠지. 다른 이들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테니까.”

실제로도 차탈은 시아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레이디 켈튼에게 정말로 급한 용건이 있어 황자가 갤러리까지 찾아온 것처럼 보일 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차탈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아챘다. 황궁의 조명을 등지고 번득이는 눈빛이 마치 폭풍우 속에서 시아 켈튼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재키 레이븐과 꼭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대에게 반해서 알현식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한 차탈은 정말로 시아에게 반한 연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의 팔이 시아의 허리를 뱀처럼 감아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갤러리에 쳐들어온 황자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여인들이 미묘한 시선으로 시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왈츠를 추는 것 같은 자세로 시아를 내려다보는 차탈에게서 로맨스를 떠올린 탓이다.

그러나 시아는 차탈의 접촉에 몸서리를 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시아는 차탈을 노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라크를 경계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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