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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7)화 (187/292)
  • 187화 

    누가 황제 앞에 가장 먼저 선보여질 것인가. 알현식에서는 황제를 만나는 순서 또한 중요하게 여겨졌다. 황제를 먼저 알현하는 숙녀일수록 그녀의 부모가 가진 권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황족을 제외하고 작위상으로 현재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 콘힐 공작이 말없이 크라바트를 고쳐 맸다. 예정대로라면 그의 딸이 가장 먼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 콘힐 공작은 황제를 흘긋거렸다. 전에 없이 밝은 표정이신 것을 보니,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 자신의 딸을 만나길 기대하심이 분명했다.

    이름 카드를 받아든 궁내관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저런 표정이지? 예상치 못한 이벤트라도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알현식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는 고작해야 황제의 퇴짜를 맞은 여인이 졸도하거나, 최고의 찬사를 받은 여인이 기세등등하게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궁내관의 입술이 어떤 모양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궁내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첫 번째 숙녀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쳤다.

    “레이디 시아 켈튼!”

    사람들은 아연했다. 레이디 켈튼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콘힐 공작가의 미스 아이다 콘힐이 첫 번째 아니었나요?”

    “켈튼이라니, 설마 소문의 그 레이디 켈튼이라는 걸까요?”

    시아 켈튼이라는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알현실엔 한차례 웅성임이 번졌다. 콘힐 공작은 급작스럽게 오른 혈압에 뒷목을 잡았다.

    “아니, 내 딸보다 먼저 알현식에 등장할 수 있는 여인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러나 그다음에 불린 이름이 더 가관이었다.

    “미스 레베카 뮐러!”

    결국 알현식장엔 소란이 일었다.

    “레베카 뮐러라니요! 프레디 뮐러는 자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기서 등장하는 여인이 진짜 뮐러라면 이번 사교계 시즌은 완전히 뒤집어지겠구먼!”

    알현식에 등장한 이는 아직 아무도 없으나, 사람들은 벌써부터 알현식을 다 구경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쑥덕이는 인파 속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이가 있었으니.

    ‘나쁘지 않군.’

    다름 아닌 라크시스 옌이었다.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은발의 마법사는 주변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단상 위를 슬쩍 보니, 알리나는 첫 번째 숙녀들을 보고 싶어 잔뜩 안달이 나 있었다.

    그 뒤로 썩어들어간 차탈의 면상이 보였다. 그때였다.

    “조용. 귓가에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군.”

    알리나가 성가시다는 듯 일침을 날렸다.

    황제의 한마디에 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안 그래도 주변이 시끄러워 궁내관은 다음 대사를 날릴 타이밍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궁내관은 이제 아주 상황이 재미있어졌단 얼굴로 입꼬리를 실룩대고 있었다.

    그리고 궁내관이 첫 번째 호명을 마무리하며 문을 연 순간.

    “이 숙녀들을 소개할 부인은 작고한 로드리치 후작의 작위를 계승한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입니다!”

    밀레이나 로드리치라니.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이요, 아무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알현식 조합을 마주하곤 경악하고 말았다.

    * * *

    ‘살다 살다 이런 관심은 또 처음이네.’

    홀의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진 건 뜨거운 시선이었다. 요르문 켈튼의 양녀로 입적되었을 때도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레이디 켈튼, 어서 가세요!”

    레베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시아를 슬그머니 찔렀다. 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문이 열리고도 한참을 멍청하게 서있었음을 깨달았다.

    삼 야드나 되는 트레인이 서서히 들리는 느낌이 났다. 온통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도배된 황궁의 벽이 창문 가득 밀려오는 태양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사방이 귀족이었다. 물론 귀족이 아닌 자들도 있겠지만, 붉은 카펫을 사이에 두고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한 가격 하는 의상과 보석을 두르고 홀 안에 들어서는 이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홀에 들어오기 전 머리에 꽂았던 타조 깃털의 존재감이 새삼 느껴졌다. 황제를 알현하는 여인들은 반드시 깃털 장식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머리를 가누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여 버리는 거대하고 우스꽝스러운 깃털을 어찌할 줄 몰라 시아가 헤매고 있자, 밀레이나는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사뿐사뿐 걸으면 깃털이 떨어질 일이 없을 거라며 네 차례나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튈이 이렇게나 뒤통수를 잡아당기는데 말야. 머리가 앞으로 기울어질 일은 없겠어. 시아의 등 뒤엔 삼 야드나 되는 트레인 외에도 이 야드나 되는 베일이 달려있었다. 도합 오 야드 길이의 천의 무게를 머리통과 등으로 지탱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극한 체력을 요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신부가 딱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알현식 드레스는 칠십 년 후의 신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고 난이도가 높은 복장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식탁보로 연습하던 이유가 있었구나.

    등에 힘을 주니,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틴 장갑을 낀 손가락이 맞부딪히며 미끌거렸다. 시아는 머리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목에 잔뜩 힘을 주며 홀을 가로질렀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카펫을 걸어가던 그 짧은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던 순간이라 생각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저 멀리 단상에는 무려 황제가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잘하고 있네. 조금만 더 걸어가서 고개를 숙이게.”

    밀레이나가 복화술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시아에게 중얼거렸다. 잘하고 있단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며 긴장이 살짝 풀렸다. 덩어리져 귓가를 맴돌던 웅성거림이 점차 선명한 음형을 띠며 따박따박 꽂혔다. 잠시 흐릿했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아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요르문은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눈짓 중이었다. 힘내라는 뜻 같지? 시아는 요르문에게 눈웃음을 지어주곤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실루엣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워요, 시아.’

    내가 보기엔 저 남자가 더 아름다운 것 같은데. 수많은 보석이 난무하는 가운데 은발의 마법사는 독보적인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공작처럼 치장한 다른 이들보다, 아무런 장식 없는 검은 정장만을 입은 라크시스가 훨씬 눈에 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도 잘 어울리는군요.’

    ‘이게요? 머리에 이런 바보 같은 깃털을 달고 있는데요?’

    시아가 눈으로 오만 인상을 쓰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녀의 신호를 알아챈 라크시스는 그만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든 안 아름답겠습니까. 일단 앞부터 보시는 게 어떨지.’

    앞을 보라고? 고개를 돌린 시아는 곧바로 질겁하며 멈춰 섰다. 그녀는 단상에 엎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야에 황제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배운 대로만 하자, 배운 대로.’

    황제의 단상 앞에 도착하면 가능한 최대한 몸을 낮춰 인사를 할 것. 지난 나흘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황제가 반응을 보이기 전까진 절대 무릎도, 고개도 들어선 안 된다.

    만일 알현을 청한 숙녀의 지위가 높거나, 알현을 온 여인이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면 황제가 먼저 나서서 여인의 이마에 키스를 해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여인이 황제의 손등에 키스를 해야만 했다.

    물론 관습이 그렇다는 얘기다. 황제는 찾아온 여인에게 마음이 내키는 대로 대할 수도 있었다. 그 말인즉, 이마 키스든 손등 키스든 혹은 그 외의 반응이든 결국 황제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알현식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시아는 숨을 죽였다. 알현실의 모든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알현식 초대 명단에 오르지도 않았던 레이디가 콘힐 공작의 딸을 제치고 황제를 첫 번째로 알현하다니. 게다가 그녀를 보증하는 건 다름 아닌 밀레이나 로드리치였다.

    과연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 황제가 천천히 일어났다.

    “……!”

    황제가 단상을 걸어 내려왔다. 부축하려고 뒤따라오던 올가도 제치곤, 눈치 없이 왈왈거리며 짖어대는 푸들 해리도 가볍게 무시했다.

    황제의 시선은 오로지 시아 켈튼에게 꽂혀있었다.

    쿵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홀 안의 모든 구경꾼들의 심장 소리가 한데 모여 공명하는 것 같았다. 시아는 터질듯한 박동과 정수리를 찌르는 듯한 황제의 시선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이마냐, 손등이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꿇어앉은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대로라면 금방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묵직한 튈과 트레인을 저항 삼아 안간힘을 쓰며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숙인 고개 앞으로 황제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그때였다.

    “그대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단다. 레이디 켈튼.”

    아주 작은 속삭임. 기품 있는 목소리 속에 숨겨진 뜻밖의 흥분.

    시아의 턱이 순식간에 잡혀 올라갔다.

    숨이 멎었다. 역사서 속에서만 보던 알리나 황제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밀레이나나 메이슨을 만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제국의 한 시대를 지배하던 지도자를 실제로 본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전율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과도 같았다.

    입매를 따라 접힌 주름이 인자하면서도 노련한 지도자의 분위기를 풍겨낸다. 세월과 함께 처져버린 눈꺼풀 밑에서도 사자 같은 기백의 선명한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찰랑이는 머리칼이 더 어울렸겠구나. 미래에는 다들 그런 머리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지.”

    미래라니. 황제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를 듣자 시아의 사고가 멈췄다.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어쩌지. 황제는 대체 내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알리나는 시아의 반응이 그저 귀엽다는 듯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보자꾸나. 캘커티 남작.”

    캘커티 남작.

    그것은 아주 오래전, 시아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라크시스가 그녀를 위해 마련해 둔 수많은 위조 신분 중 하나였다.

    시아는 그제야 알리나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제국에서 작위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황제뿐이었으니까.

    “저, 그……!”

    시아가 무어라 대답하려 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알현식 땐 황제 외엔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규칙을 깨려 하자 밀레이나가 다급하게 시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신호했다.

    그러나 그보다 알리나가 한발 더 빨랐다.

    “완벽해.”

    찬사를 품은 황제의 입술이 시아의 이마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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