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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6)화 (186/292)
  • 186화 

    요르문은 진작 체념한 듯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오래 걸리는 일이었으니까요. 애초에 이번 시간 여행 내로 끝날 분량도 아니었어요. 그러니 누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요르문은 아련한 표정으로 연구실로 도로 들어갔다. 헤이든에게 듣기론 하루 종일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데. 미안해서 뭐라도 해주려고 했지만 시아는 그러지 못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로드리치가에서 그녀를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알현식까지 여기서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레이디 켈튼.’

    ‘와! 정말 여기 머무시는 거예요? 레이디 켈튼이 여기 계셔준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은데요.’

    고작해야 황제 앞에서 인사만 드리고 마는 행사를 준비하는데 외워야 할 예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라리 의술원 준비를 두 번 하라고 하는 게 백배 천배는 나을 것 같았다. 거기다 춤은 왜 이렇게 배워야 하는지. 그러나 이 반박 또한 밀레이나 앞에서 대번에 막히고 말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교계에 데뷔한다면서 춤은 추지 않을 생각이었나 보지?’

    그렇게 전쟁 같은 나흘이 지나간 것이다. 정신없이 보낸 나흘 간 라크시스와 요르문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들을 보지 못하니 왜인지 괜히 섭섭하고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바빠서 얼굴 볼 시간도 못 냈던 건 자신이었는데, 왜 애먼 라크시스가 원망스러운지 모르겠다.

    ‘보고 싶다.’

    시아는 마차 창에 드리운 커튼을 닫아버렸다.

    황궁에 방문한다 하여 고전적인 검은 정장을 입은 라크시스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사람을 압도했다. 며칠 동안 로드리치 저택에 갇혀 살다시피 하다 알현식인 오늘,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온 라크시스를 오랜만에 보았는데.

    ‘…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확실히 태가 나는 사람은 뭘 입어도 다르다. 완벽한 신사의 표본을 자랑하던 라크시스는 그녀의 손을 받아 들어 그의 팔에 걸치며 말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입어야겠군요.’

    그 모습을 좀 더 감상하고 싶었는데. 마차에 탄 이후로 보이는 거라곤 그의 다리뿐이니 괜히 심통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목을 빼서 밖을 바라볼 수도 없고.

    “그래도 레이디 켈튼과 같이 알현식에 가게 되어서 기뻐요! 아는 사람도 없고, 솔직히 혼자 알현식에 가는 건 조금 겁났거든요. 외롭기도 했고요.”

    옆에 앉은 레베카는 그저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가씨는 아가씨라는 건가. 지난 나흘 내내 레베카는 첫사랑을 꿈꾸는 소녀처럼 들떠있었다.

    메이드일 적엔 가십지를 그렇게나 많이 봤다고 하던데. 하긴 이상형과 사랑에 빠지는 상상 같은 건 누구나 하곤 했다. 특히 굴러다니는 낙엽만 봐도 즐거워할 나이의 소녀라면 말이다.

    “블레어가에서도 오면 좋겠는데.”

    “초대를 받았으면 아마도 오겠지. 하지만 블레어가에서 사람이 오지 않아도 알현식 도중엔 실망한 티를 내선 안 된다, 레베카.”

    밀레이나가 엄하게 타일렀다. 레베카는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가다 보니 말이 길게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투레질 소리가 두어 번 들리더니, 마찬가지로 흰 가발을 쓴 황궁의 시종이 다가와 문을 열고 나무로 된 작은 계단을 마차 입구에 받쳐주었다.

    삼 야드나 되는 새하얀 트레인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팔에 칭칭 감고 좁디좁은 마차의 문을 낑낑거리며 나오는데,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엉겁결에 붙들었다가 익숙한 크기와 모양새에 놀란 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생했어요. 앉아있느라 힘들었을 텐데.”

    라크시스였다. 그는 말을 타고 달려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던 은발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리니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공터에 모여든 마차에서 쏟아진 아가씨들과 그의 가족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대부분의 마차에선 황궁 시종이 문을 열고 알현식 참가자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라크시스 옌이 에스코트하는 검붉은 머리의 여자.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시아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여인들이 입을 가리고 속닥였다. 그녀들과 함께 온 신사들은 로드리치가의 마차에서 내린 두 숙녀에게 흥미를 보였다.

    라크시스는 보란 듯이 시아에게 자상하게 굴었다. 그것은 함부로 이쪽을 넘보지 말라는, 무언의 영역표시와도 같았다. 그러나 긴장한 시아의 눈엔 그런 것까진 보이지 않았다. 함께 내린 레베카만 어머, 하는 소리를 내며 밀레이나에게 붙었을 뿐이다.

    수군거림에 민망해진 시아는 가만히 속삭였다.

    “역시 라크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이네요.”

    “그러려고 노력하긴 합니다.”

    눈에 띄려고 노력한다고? 시아가 인상을 쓰며 갸웃거리자, 라크시스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래야만 당신 눈에도 띌 테니까.”

    뭐, 뭐라는 거야! 보는 눈이 많아 평소처럼 소리를 빽 지르지도 못한 시아가 라크시스의 팔뚝을 꽉 잡으며 무언의 항의를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사실 그가 이러는 게 싫은 적은 없었다. 단지 남자에 면역이 없었던 그녀에게 처음부터 라크시스 옌이라는, 지나치게 완벽한 남자가 달라붙은 게 문제였을 뿐.

    그러나 그의 낯간지러운 말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시아였다. 라크시스의 바람대로였다.

    이런 식으로 달콤한 말에 빠져들게 해서, 자연스럽게 구애까지 하리라. 라크시스는 아직까지도 이런 말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 버리는 시아를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더 이상 놀란 생쥐처럼 도망가지 않을 순간에 비로소 진심을 고백하리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연심을 품고 있었는지를.’

    시아를 보며 걷자 속도가 느려졌는지, 황궁 시종이 그들을 재촉했다. 그들이 알현식의 첫 순서인 탓에 시종의 마음이 급한 듯했다.

    한편 라크시스 때문에 잊힌 요르문은 밀레이나와 걸음을 맞췄다. 저 앞에 라크시스와 시아가 속닥거리며 황궁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 밀레이나는 읊조리듯 요르문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디 켈튼에겐 사교계 데뷔가 굳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보이는군.”

    둘의 뒷모습이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연인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알현식 드레스가 희어서 그런지 시아에게선 진짜로 신부의 느낌이 났다. 두 사람에겐 사교계에서 서로를 재며 결혼 상대를 찾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지나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요르문은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시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누님을 둔 동생의 마음이려나요. 눈꼴이 시면서도 서운하기도 하고.”

    “후후. 나도 내 자식들을 결혼시킬 때 그런 심정이었지. 얼른 결혼시켜 버렸으면 했는데, 막상 결혼식이 끝나니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

    피가 섞인 진짜 누님도 아닌데. 심지어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처음엔 그저 사기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 여행이 뭐라고. 봉인을 찾으며 했던 고생들이 그들을 끈끈하게 이어주기라도 했는지, 요르문은 어느새 시아를 진짜 누이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런 게 가족이라는 건가.”

    “잡담 그만하고 얼른 따라가세. 우리가 첫 번째 순서이니까.”

    밀레이나가 핀잔을 주며 요르문을 불렀다. 멀어져 가는 일행들을 보며, 요르문은 옅게 웃었다.

    “네네, 갑니다.”

    * * *

    굳게 닫힌 화려한 문 앞으로 펼쳐진 붉은 카펫. 그 길을 따라 양옆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있었다. 모두 알현식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알현식에 참가하는 여인들의 가족도 있었고, 알현식에 초청받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카펫의 끝엔 높다란 단상과,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한 거대한 황실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초상화에 그려진 황실 가족들은 총 네 명. 황제 알리나를 중심으로 가장자리엔 차탈이, 알리나 옆엔 황제의 남편인 칼라일 공이 그려져 있었다. 아장거리는 조지 황자가 함께 그려진 것을 보니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인 따끈따끈한 초상화인 듯했다.

    그리고 그 앞엔 초상화와 똑같은 모습과 구도로 황실 가족이 단상에 앉아있었다. 심드렁한 차탈과 멍한 칼라일 공, 위엄있는 알리나와 아직 세상이 신기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조지 황자까지.

    그들의 속내와 별개로 견장과 예복으로 중무장한 황실 가족의 모습을 본다면 알현식이 처음인 심약한 숙녀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기절할지도 몰랐다. 특히나 황제는 무표정에 가까울 정도로 엄숙하고도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다가올 알현식에 스트레스를 받은 황제가 화났다고 오해할 만했다.

    그러나 황제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모셔온 시녀들은 단번에 깨달았다. 그들의 주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지루한 알현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열두 시군.”

    시간이 되자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눈짓에 따라 시종과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폐하! 해리가 제 손을 핥았어요!”

    그 와중에 조지 황자가 황실에서 기르는 푸들과 장난을 치다, 푸들의 침으로 범벅이 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냐. 해리는 네가 좋은가 보다. 이따 마음껏 뛰어놀게 해줄 테니 지금은 자리에 앉거라.”

    늦둥이 황자가 못내 귀여운지 알리나가 조지를 쓰다듬었다. 알리나의 뒤에 선 차탈이 조지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대공 전하! 이거 보세요! 손이 축축해요!”

    세상모르고 천진한 조카를 어찌하면 좋은가.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지. 차탈은 저와 황위 계승을 다투게 된 핏덩이를 한숨을 쉬며 달랬다.

    “감촉이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레이디 웰링턴, 미안하지만 황자 전하의 손을 닦아주시겠소?”

    “예, 대공 전하.”

    올가가 재빨리 나서서 조지의 손을 닦았다. 황제는 아직 남동생 차탈이 자신의 아들을 미워하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한때 차탈이 황제의 배 속에 든 조지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올가는 조지가 그저 흐뭇한 알리나와 그런 그녀를 뱀 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차탈을 번갈아 보며 복잡한 심정을 가만히 숨겼다.

    종이 울렸다. 마침내 알현식의 시작이었다. 홀의 문간에 선 궁내관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자,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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