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5)화 (185/292)

185화 

“정말, 흑, 이게 아버지가 남기신 편지인 거죠.”

“네. 레베카를 아끼던 미스터 뮐러의 편지예요.”

레베카는 그 후로도 하염없이 울었다. 자꾸 울면 눈이 부어 못생겨질 거라는 에밀리의 말에도 레베카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이런 울음은 멈춘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속에 든 응어리를 모두 토해내고, 슬픔의 찌꺼기까지 모두 긁어내야만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미스 허슬러. 아니, 레이디 켈튼.”

“편하신 대로 부르라니까요.”

시아는 레베카를 도닥이며 말했다.

“아직 범인을 찾지도 못한 걸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경비행기 사고 당시에 대한 조사는 더딜 거예요. 어쩌면 타살이라는 것 외에 다른 진실을 더 밝히지 못할 수도 있고요.”

반쯤은 거짓이다. 범인을 찾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레베카는 시아의 말에 위로를 받은 듯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덕분에 진실을 알았으니까요.”

차라리 헨리 던로처럼 법으로 심판할 수 있는 범죄자라면 좋았을 텐데. 시아는 가만히 손수건을 들어 레베카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그때, 정원 입구에서 소식을 받은 풋맨이 밀레이나에게 다가와 가만히 몸을 숙였다.

“주인님, 미스 블레어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지금 가지.”

눈물과 경악으로 한차례 소동을 겪은 티 테이블엔 후련함만이 남았다. 밀레이나는 시아와 레베카를 훑었다. 사랑스러운 대녀와 베일에 싸인 켈튼가의 레이디. 이젠 두 사람을 한데 불러 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알현식 전까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

밀레이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시아가 그 미소의 의미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할 말은 가면서 해도 충분하니, 모두 나를 따라오시게.”

* * *

그렇게 전쟁통 같던 나흘이 지나가고, 마침내 알현식 날이 밝았다.

시아는 밀레이나, 레베카와 함께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레베카는 뭐가 그리 설레는지 연신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고, 밀레이나는 맞은 편에서 그런 레베카를 대견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흘 사이 핼쑥해져 버린 시아는 마차 구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진짜로 죽을 것 같아…….”

함께 탄 레베카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레이디 켈튼, 괜찮으세요? 창문이라도 열어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냥 눈을 감고 있을게요.”

다각다각. 거리가 온통 말발굽 소리로 가득한 가운데 엉덩이가 마차의 박자에 맞춰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엉덩이가 쪼개질 것 같은데, 숨은 또 어찌나 답답한지.

솔직히 평가하자면 로드리치가의 마차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편에 속했다. 한 의자에 세 명은 넉넉하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로드리치가의 마차는 여느 가문의 마차와는 다르게 큼직하여 묵직한 위용을 자랑했다.

“왜 증기 마차를 안 타는 거야…….”

증기기관과 마도 공학으로 이루어낸 문명이 꽃을 피운 마도 시대에 말이 끄는 마차라니. 지금껏 마도 시대에서 여러 마차를 타왔지만 진짜 말이 모는 마차는 뤼스의 삯마차를 빼곤 처음이었다.

오늘 마차를 타기 전, 라크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 이유를 묻긴 했었는데.

‘증기 마차가 있는데 대체 왜 말이 모는 마차를 타요?’

‘그 또한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제국의 특성 탓이죠. 증기 마차를 타면 황궁 출입을 거부당할 겁니다.’

‘대체 왜요?’

‘…격이 떨어진다, 라더군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서 밖이 온통 말로 가득한 거냐고. 흰 가발을 쓴 시종이 마차마다 앞뒤로 달라붙어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인 광경이 가관이었다.

시아는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바라보았다.

로드리치가의 마차 바로 옆에선 라크시스와 요르문이 켈튼의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말 등의 높이 때문에 보이는 건 말과 함께 덜렁이고 있는 그들의 다리뿐이었다.

원랜 두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탈 생각이었으나, 밀레이나에게 그 얘기를 하자마자 대차게 거절당했다.

‘젊은 신사들은 원래 말을 타는 법이지. 게다가 옌 경과 레이디 켈튼은 약혼한 사이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네만.’

요약하자면 가족도 아니면서 남자와 어떻게 마차를 탈 수 있냐는 거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껏 라크시스, 요르문과 함께 셋이 마차를 탔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시아는 밀레이나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레이디 시아 켈튼 】

아르카나에서부터 황궁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엔 가로등마다 금사가 수놓인 붉은 벨벳 휘장이 펄럭였다. 황제 알리나의 생일을 맞아 걸린 상징이었다.

붉은 휘장. 그것은 매년 사월, 알리나 황제의 알현식을 기다리는 여인들에겐 축제의 깃발이었다. 그러나 덜컹이는 마차에 앉아 시뻘건 천을 바라보고 있는 시아의 입장에서 붉은 휘장은 죽음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지난 나흘 동안 그녀는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미스 뮐러,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가요? 그을린 피부가 실크 원단과 한 몸이라도 된 것 같네요! 황제 폐하가 보신다면 분명 몇 번이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실 거예요.’

‘그런 칭찬은 부끄러운걸요.’

‘겸손해하지 마세요, 미스 뮐러. 지금의 미스 뮐러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답니다!’

레베카가 빙그르르 돌았다. 체력도 좋지. 어지간히도 알현식이 기대되는 모양인지 소녀의 뺨에선 발그레한 기운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흘 전 로드리치 저택에 방문한 후 그대로 알현식 드레스를 맞추는 데에 끌려간 시아는 저녁까지 집에 가지 못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샤샤 블레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어떤가? 남대륙에서 공수해 온 타조 깃털일세.’

‘어머, 뽀얗고 윤기가 자르르 도는 게 완벽하네요. 이런 건 또 언제 구해오셨대요? 여기, 구두 시안도 보시겠어요?’

‘나쁘지 않군. 어차피 드레스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 발이 편한 걸로 해주게.’

시아는 블레어 부티크의 디자이너란 디자이너는 모두 불러온 것 같은 방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거기다 뮐러사에서 다이아몬드를 들고 방문한 직원들까지. 레베카와 시아는 그들에게 둘러싸여 몇 시간이나 마네킹 노릇을 해야만 했다.

‘보석은 레이디 로드리치가 준비하셨겠죠?’

‘당연하지. 뮐러사의 주인, 아, 이젠 아니지. 어쨌든 뮐러사의 경영자를 무얼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나.’

‘그나저나 모든 준비가 알현식까지 마무리되는 건 확실한 거겠지?’

‘그럼요. 저기 계신 고대 마법사분이 블레어 스트릿의 일주일 치 매출 금액을 미리 모두 지불하셨으니까요.’

이 사태의 뒷배경에 라크시스가 있단 소리였다. 방에 모인 사람들이며 레베카, 심지어 샤샤 블레어까지 라크시스의 재력에 감탄했으나 시아는 그러지 못했다. 라크시스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예전엔 그가 그렇게 큰돈을 턱턱 사용해 버리는 것에 함께 감탄해 주었을 텐데.

‘내가 데뷔하겠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한 거라니.’

지칠 대로 지쳐버린 시아는 그저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그의 실행력과 추진력에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완벽해요. 아주 완벽해, 레이디 켈튼. 당신이라면 제 드레스와 완벽하게 어울리겠어요. 그런데 그 우울한 표정만 좀 어떻게 해보겠어요?’

‘그래, 레이디 켈튼. 웃는 것도 습관이지. 알현식에 가서 얼굴 굳히고 있을 건 아니겠지?’

‘…하하하. 네엡. 웃어보겠습니다.’

지친 와중에 겨우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데,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카탈로그를 보고 있는 라크시스가 보였다. 보아하니 부티크의 의상 카탈로그 같은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괜히 얄미워서 째려보았다가 고개를 든 라크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시아를 바라보다 아주 기분 좋게 웃었다.

저는 편하게 앉아있으면서 날 보곤 웃는다 이거지?

그러나 시아는 차마 험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불같은 화도 식혀버릴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로드리치가에서 겨우 탈출해서 늦은 시간에 켈튼 저로 돌아갔더니, 잔뜩 삐져있는 요르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님. 같이 식사하려고 기다렸는데.’

‘늦어서 미안해. 레이디 로드리치가 난데없이 알현식을 준비하자고 하는 바람에…….’

그러자 요르문이 펄쩍 뛰는 게 아닌가.

‘누님, 너무해요. 지금 저보고 봉인을 혼자 찾으라는 말씀이신 거죠?’

‘내가 언제! 어쩌다 보니 알현식에 가게 됐다고만 말했는데.’

‘그게 그 말이잖아요. 알현식까지 고작 나흘 남았는데, 누님이 절 어떻게 돕느냔 말이에요.’

알현식이 그 정도였어? 그러고 보니 요르문의 차림이 내내 연구실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안 그래도 바람장미의 정확한 분석을 위해 그간 발견된 봉인의 정확한 좌표부터 찾아나가기로 했던 터였다.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을 되짚어 가며 봉인이 있던 장소와 바람장미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자고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시간 여행 당사자인 시아가 빠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냐, 도울 거야! 같이 찾기로 했잖아. 무도회도 아니고 고작해야 알현식 준비인데, 내일이면 진짜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요르문은 이미 잔뜩 토라진 듯했다.

‘이번 시간 여행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이러다 또 저와 라크만 두고 사라지실 거죠?’

요르문의 말에 시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게. 이번 시간 여행은 얼마나 하더라. 대략 이 주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 닷새 정도를 로렌시아호와 뤼스를 조사하면서 보냈으니, 남은 건 일주일 하고도 이틀가량이었다. 그리고 나흘 후에 알현식이 이루어진다 했으니 알현식 이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닷새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네.’

그러나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실제로 겪은 시간 여행은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겪은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기장에 적힌 것보다 이르게 진행된 적이 많았기에 이번에도 시간 여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번 시간 여행에서는 봉인을 두 개나 찾지 않았는가. 그녀의 시간 여행이 불안정한 봉인에 기인한 것이라면, 이번 시간 여행의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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