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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4)화 (184/292)
  • 184화 

    “네?”

    시아는 기겁했다.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네. 그대들이 레베카의 신변을 책임져 주기로 한 이상 나도 레이디 켈튼의 데뷔를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마도 시대의 예법과 관습이 많이 사라진 칠십 년 후에도 알현식은 존재했다. 귀족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고는 하나 귀족들은 여전히 그들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고, 상류층에선 그들만의 교류의 장에서 자녀들의 결혼 상대를 찾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알현식을 준비하는 데 돈과 시간을 얼마나 들어가는지는 마리나 카트린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양부 요르문이 사교계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그녀의 양부가 여느 상류층 부모처럼 자식의 결혼에 관심이 많았더라면 시아는 아마 지금쯤 옷감과 보석에 둘러싸인 채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예정에 없던 일이라 시간이 촉박하긴 하다만,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이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아니겠는가.”

    밀레이나가 뿌듯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준비만 몇 달씩 걸리는 일을 고작 나흘 안에 해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책상에 처박혀 공부하는 게 전부였지, 살랑살랑 춤을 추며 무도회장에 나가는 게 아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이 시대의 사교계에 나가기로 한 건 애초에 마도 시대에서 활동할 적당한 신분이 필요해서였다.

    ‘라크, 그렇게만 보지 말고 빨리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러나 이어진 밀레이나의 말에 시아는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애초에 옌 경과 그렇게 약속하기도 했고 말이야.”

    라크시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저 뻔뻔하고 능글맞은 남자 같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엔 대체 뭐가 문제냐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설마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라크시스는 시아의 생각보다 더 제국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신사였다. 본인이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이 사교계에 데뷔를 한다? 적어도 남들 앞에서 체면치레할 정도는 해주어야 직성이 풀릴 터였다.

    물론 그 체면치레에 대한 기준이 한참 높다는 게 문제였긴 하지만 말이다.

    “엊그제 미스 샤샤 블레어에게 연락을 넣어두었네. 곧 도착할 테니 알현식 드레스부터 맞추지.”

    “이렇게 갑자기요?”

    “설마 알현식도 가지 않고 사교계 데뷔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밀레이나는 시아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정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풋맨을 불렀다.

    “제이미, 지금이 몇 시지?”

    “오후 세 시 사십 분입니다, 주인님.”

    “딱 좋군.”

    밀레이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가 딱 좋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시아는 지금 자신이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차나 좀 더 들게. 이따가는 차 마실 시간도 없을 테니 말이야.”

    아찔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홱 노려보았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홧김에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미스 허슬러께서 오셨다면서요?”

    정원 입구에서부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레베카와 메이드였다.

    레베카를 목격한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피투성이 메이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메이드일 적에도 보살핌을 받았다고는 하나, 지금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말라있던 팔이며 볼에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고된 일에서 해방되어 푹 쉬고 먹고 자기를 반복한 탓에 얼굴엔 윤기가 돌고 있었다. 사랑스럽게 말아 올린 갈색 머리카락이 나이대에 맞는 발랄함을 더했다. 가멜인과 제국인의 피를 모두 가진 소녀는 시원시원하면서도 이국적인 이목구비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베이지와 분홍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드레스가 뜀박질을 따라 펄럭인다. 굽이 아예 없는 신발도 아닌데, 정원의 돌길을 달리다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뛰어오는 모습이 그저 천진한 소녀 같아 시아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릴리 알펜도 이 정도 나이였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릴리 알펜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호텔방에 앉아 서럽게 울던 그녀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레베카나 릴리나 모두 비슷한 소녀들인데 보호해 줄 가정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그들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번 시간 여행이 끝나기 전에 릴리 알펜을 찾아봐야겠다. 거리의 모든 릴리 알펜을 챙길 순 없어도, 적어도 그녀가 알게 된 릴리 알펜은 다시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베카와 메이드는 헉헉거리며 도착해 있었다.

    밀레이나는 그런 대녀가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오, 레베카! 수업이 생각보다 이르게 끝났구나.”

    “아가씨가 워낙 출중하시니 선생님도 가르칠게 없으신 거죠. 오늘도 레베카 아가씨께선 칭찬만 들었는걸요! 춤도 어찌나 빠르게 배우시던지 보는 제가 다 흐뭇하더라니까요?”

    “에밀리! 내가 부끄럽댔잖아!”

    분명 밀레이나는 레베카에게 질문을 했는데, 옆에 있던 메이드가 먼저 나서서 우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밀레이나도 레베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뒤따라온 루즈 부인만이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올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에밀리, 내가 주인님 앞에서 경솔하게 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헤헤, 이젠 좀 익숙해지실 때도 되신 것 같은데.”

    “에밀리!”

    루즈 부인이 기가 막혀 소리를 쳤다. 그러나 밀레이나에겐 에밀리라 불린 메이드도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너무 혼내지 말게. 어려서 그런 것 아니겠나.”

    결국 에밀리만 기세등등해졌다. 레베카와 에밀리는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치며 작게 깔깔거리다 시아를 발견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와, 똑같아.”

    “뭐가?”

    “미스 허슬러 말이야. 진짜로 소설이랑 똑같다고.”

    에밀리가 입을 벌린 채로 중얼거렸다. 지난번과 달리 시아가 유백색 드레스를 입고 온 것도 아닌데 에밀리는 감탄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갸웃거렸다.

    “그래? 난 좀 다른 것 같은데. 삽화보다 실제가 낫지 않아?”

    “그건 당연하고! 글로 쓰인 거랑 똑같다는 말이지. 와인처럼 찰랑이는 머리칼에 나비 같은 눈매에다 오묘하고 매력적인 저 분위기 말이야!”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에밀리…….”

    분명 앨런 어셔의 소설에 나온 구절인데, 어딘가 조금씩 틀렸다. 황혼의 어둠을 닮은 짙은 머리카락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이는 속눈썹. 추리를 할 때면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눈동자가 깊어지며 반짝인다고 했나. 아무튼 에밀리가 기억하고 있는 건 반은 맞고 반은 이상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에밀리가 어떤 심정으로 말한 건지 공감할 수 있었다. 레베카 역시 로렌시아호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단번에 로렌 허슬러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까.

    “레베카, 서있지만 말고 인사드리렴.”

    레베카는 뒤늦게 자신이 로렌 허슬러를 기다리게 했단 걸 깨달았다.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미스 허슬러, 잘 지내셨나요? 아, 이젠 레이디 켈튼이라 불러드릴까요……?”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저도 그냥 레베카라고 불러주세요. 미스 뮐러는 좀 어색해서.”

    “그래요, 레베카.”

    시아가 레베카라고 부르자, 레베카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안 그래도 저 멀리서 오시는 걸 다 봤답니다.”

    다행히도 로렌 허슬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무슨 일 때문인지 차를 물처럼 들이켜고 있었는데.

    레베카는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오늘 로렌 허슬러가 저택을 찾은 이유는 그녀의 데뷔 때문이라고 했다. 춤 수업이 평소보다 일찍 끝난 것도 잠시 후 네 시에 저택에 찾아올 샤샤 블레어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레베카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선 알아내신 게 있으실까요?”

    아, 그건. 시아는 레베카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라크시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보여줄까요? 원하는 대로 하시죠. 그런 속닥거림이 오고 갔다.

    레베카가 초조해하는 게 보였다. 막상 보여주려니 일지의 앞부분 내용 때문에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했던 건데, 그래도 딸에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줘야 하지 않나. 시아는 결국 레베카에게도 일지를 내밀었다.

    “레베카. 미스터 뮐러가 마지막까지 쓰셨던 일지예요.”

    “아버지의 일지라고요……?”

    이미 일지를 읽어본 밀레이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남긴 편지가 있어요. 끝까지 읽어볼래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편지라.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그리 좋은 내용이 적혀있지는 않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시아와 밀레이나의 반응이 이상했다. 심지어 고대 마법사까지 조용히 상황을 외면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모두 이런 반응이지. 두렵고도 궁금했다. 아버지는 내게 무슨 말씀을 남기신 걸까.

    레베카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일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사락, 첫 장을 넘겼다.

    ‘…아.’

    나와 어머니를 가멜에 두고 떠나버린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날 찾아온 아버지. 나를 사랑한다 했지만 곁에 있어주지 않았던 아버지. 결국 나를 떠나간 아버지. 경악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괴짜 대부호 프레디 뮐러.

    레베카는 결국 일지의 처음부터 맨 마지막의 편지까지 모두 읽었다.

    “아버지, 아아… 아버지…….”

    그녀가 우는 소리만이 정원에 가득했다. 밀레이나와 에밀리가 레베카를 달래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흑, 흐으읍, 이게 뭐야, 아버지, 끅, 미워, 흐흑……. 아빠 미워어, 이런 것만, 흑, 남기고… 흐어어엉…….”

    프레디를 원망도 했었지만, 결국엔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됐다. 프레디 뮐러는 어머니까지 잃고 버려진 자신을 유일하게 찾으러 와준 사람이었다. 함께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는 건 그가 곁에 없게 된 후에야 깨닫고 말았다.

    아직도 그가 죽었다는 신문을 보았던 그날이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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