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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3)화 (183/292)

183화 

어찌 됐든 켈튼가의 사람이라는 거지. 재주가 많은 것도, 그래서 밖으로 자주 나다니는 것도 사교계를 노리는 여인에겐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게다가 시아 켈튼은 벌써 스물여덟이나 됐다고 하니, 결혼 시장에서 점수가 깎일 부분을 찾자면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누구인가.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을 지내는 사교계의 중심 중 중심이었다.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성으로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밀레이나는 시아 켈튼을 최고의 레이디로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대녀 레베카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으니까.

“무리한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군.”

“제가 청한 것도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라크시스는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이닝 테이블에서나 할 것처럼 시종들이 시아의 의자를 빼주고 사라졌다. 시아는 어색하게 시중을 받으며 멋쩍게 웃었다.

“저희도 미스 뮐러의 일로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았네요.”

“…레베카의 일이라고?”

차를 권하려던 밀레이나가 멈칫했다. 레이디 시아 켈튼의 데뷔 이야기를 하려고 마련한 자리에서 레베카의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밀레이나는 라크시스와 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라크시스는 시아에게서 대답을 들으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뒤이은 이야기에 밀레이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미스 뮐러의 주변에 위험한 자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어요. 팔 년 전 뮐러가를 몰살시킨 괴한의 일당이요.”

요점은 이러했다. 레이디 켈튼 일행이 프레디 뮐러의 별장을 찾았으나, 침입 흔적만 있었을 뿐 괴한이 무언가를 발견한 흔적은 없었다. 그곳에서 레이디 켈튼 일행은 레베카와 반지의 거취가 적힌 프레디 뮐러의 일지를 발견했다.

“그런데 괴한은 일지를 보지 못했어요. 일지가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엔 열린 흔적이 없었거든요. 그 말인즉 괴한은 미스 뮐러와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른 경로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죠.”

“그럴 수가…….”

“여기, 미스터 뮐러의 일지예요.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시아는 가방에서 낡은 일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손때 묻어 너덜거리는 노트 밑에는 프레디 G. 뮐러라는 서명이 작게 남아있었다.

밀레이나는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겼다. 봉인이나 사도에 관련된 부분엔 라크시스의 의식 교란 마법이 걸려있어 해당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그 부분을 빼고도 프레디의 일지는 차마 끝까지 읽어내리지 못할 만큼 가슴 아픈 비극으로 가득 차있었다.

미래를 보는 반지에 얽매이게 된 불행한 소년. 신의 명령에 따라 다가올 비극을 막기 위해 평생을 연구만 하며 살았던 프레디. 반지를 노렸던 괴한. 프레디가 지키고자 했던 작고 가엾은 딸 레베카.

“아아……. 프레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잔디 위로 떨어진 찻잔이 데구루루 굴렀다. 밀레이나의 드레스 밑단이 검은 찻물로 천천히 젖어갔다.

노부인의 어깨가 울음으로 들썩였다. 시아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밀레이나에게 건넸다.

바람이 한 차례 정원을 훑고 지나갔다. 한창의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슬픈 바람이었다.

밀레이나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레이디 로드리치. 미스 뮐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부인 외에 또 있나요?”

“없을걸세. …아니, 없어. 애초에 프레디는 레베카를 공식적인 자리에 데리고 다닌 적도 없었네. 게다가 뮐러가의 사람들은 오래전 모두 죽었어.”

시아는 어느새 탐정의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미스 뮐러가 뮐러 영애이던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은 없던가요?”

밀레이나는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기억에서 한 자락을 꺼냈다.

“…블레어가. 그래, 전대 블레어 가주는 레베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레베카의 약혼자가 그의 아들 리암 블레어였으니까. 그렇지만 그자도 병으로 죽은 지 오래야.”

시아는 눈썹을 밀어 올렸다. 전대 블레어 가주가 병으로 죽었다 한들 약혼 당사자인 리암과 레베카는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미스터 리암 블레어는 미스 뮐러의 정체를 알고 있겠네요.”

“모를걸세. 약혼은 그 아이들이 어릴 적 가문끼리 했던 약속이었으니까. 애초에 레베카는 레베카 뮐러로 살아온 기간이 얼마 되질 않아. 그 애는 프레디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뮐러 저택에서만 보냈네.”

밀레이나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그땐 프레디가 딸을 지나치게 감싸고돈다 생각했건만. 이제 보니 아니었군그래.”

시아는 말없이 밀레이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였다면 무례하다며 내쳤을 접촉이었으나 밀레이나는 가만히 있었다. 지금 밀레이나에게 필요한 건 충격받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과, 누군가의 온기였다.

라크시스의 부름에 메이드들이 새로이 차를 내왔다. 맑은 찻물에 각설탕이 퐁, 떨어졌다.

“그럼 프레디는…….”

“사고사가 아니에요. 타살이죠. 미스 뮐러가 말씀하신 대로요. 뮐러가를 몰살시킨 괴한은 애초부터 반지를 노리고 있었어요.”

밀레이나가 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고작해야 오래된 반지잖나! 고작 그것 때문에…….”

“일지를 읽어보셨으니 아시잖아요. 그 반지는 미래를 보여주는 반지였어요. 반지에 달린 보석은 미래를 보여줄 만큼 강한 힘이 담긴 마정석이었고요. 괴한은 그 힘을 노린 거예요.”

시아는 마정석과 괴한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마정석이 봉인이며, 괴한의 정체가 발자크 로스로 분한 카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밀레이나가 발자크 로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괜히 카얄을 자극했다가 레이디 로드리치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로 비극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시아는 침착하게 말했다.

“레이디 로드리치께선 뮐러가의 혈통만이 가주의 반지를 낄 수 있었다는 걸 알고 계셨죠.”

“…그랬지.”

“미래를 보는 반지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뮐러가의 피를 이은 미스터 뮐러와 미스 뮐러뿐이었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미스터 뮐러는 괴한으로부터 따님을 지키기 위해 반지와 미스 뮐러를 부인께 맡긴 거고요.”

“반지의 힘을 이용하려면 레베카를 죽이려 들어선 안 되는 거였네. 로렌시아호에서는 대체…….”

“그땐 괴한이 이미 그 힘을 이용한 후였거든요. 반지의 힘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게 싫었을지도 모르죠.”

실제론 카얄은 봉인의 힘을 손에 넣지 못했고, 저주의 후처리를 위해 비행선을 추락시키려고 했지만 시아는 적당히 둘러댔다. 밀레이나에게는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알겠네. 덕분에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괴로워했던 일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밀레이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팔 년 전 뮐러가의 집사가 한밤중에 자신을 찾아와 레베카와 반지를 맡겼을 때에도 상황을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레디가 죽고 뮐러가의 사람들이 살해당한 후엔 밀레이나 역시 공포에 시달리며 레베카를 숨겨왔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니. 밀레이나는 다시 한번 프레디를 애도했다.

“미스터 뮐러께서 돌아가시게 된 자세한 경위는 아직 더 조사해 봐야 돼요. 팔 년 전 경비행기 사고 현장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범인의 정체도 정확히는 모르고요.”

시아는 천천히 턱을 괴었다. 탐정의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밀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시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에 빨려 들어간 탓이다.

이곳이 대낮의 탁 트인 정원이 아니라 가스등이 타오르는 어둑한 서재였다면 조금 더 분위기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괴한은 아마 이단과 관련된 사람일 거예요.”

“이단이라 하면……?”

“황혼 국교회라고 하면 기억하실까요. 오래전 재키 레이븐으로 하여금 살인을 부추기도록 만든 집단 말이에요.”

저주니 뭐니 하는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단 강렬하고 자극적인 사건 하나를 입에 올리는 게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재키 레이븐이라는 말에 밀레이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끔찍한 놈들이 레베카를 노렸던 거라니……!”

“그래서 미스 뮐러를 더 신경 써서 보호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기도를 드린다며 갑자기 집으로 잘 돌아오지 않게 된 사용인이 있다던가, 이상한 말을 주문처럼 외고 있는 사용인이 있다면 의심해 보셔야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시아는 달리아 벤슨을 떠올렸다. 지금껏 봐온 황혼 국교회 신자에겐 이렇다 할 행동적 특징이 없었으니까. 거스 경감을 도우려다 그의 과거사를 듣게 된 것이 예상외로 도움이 됐다.

황혼 국교회의 상징인 기울어진 해와 달 표식을 제외하면 이단 신자를 보통 사람과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달리아 벤슨의 사례는 표식 외에 이단 신자를 알아볼 수 있는 첫 사례였다.

“기울어진 해와 달의 표식을 가진 사람을 보면 곧바로 알려주셔야 해요. 문신을 했을 수도 있고, 상징이 그려진 소지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기울어진 해와 달이라……. 알겠네. 발견한다면 즉시 경찰에 신고하겠네.”

시아는 밀레이나의 대답에 단호하게 말했다.

“레이디 로드리치. 경찰보다 먼저 저희에게 알려주셨으면 해요. 저희는 미스 뮐러의 신변 보호를 의뢰받은 사람이니까요.”

밀레이나의 눈이 잠시 커졌다. 범죄자를 신고하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다니. 시아의 말은 얼핏 경찰과 영역 다툼을 하는 탐정의 말로 들릴 법도 했다. 경찰을 불신하는 유능한 사설탐정이 으레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밀레이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경찰도 이단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거겠지.’

그녀 역시 재키 레이븐이 검거된 이후 그 배후에 있다던 세력의 조사가 흐지부지 끝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이나는 시아의 속뜻을 진작 눈치챈 듯했다.

“알았네. 이럴 때 고대 마법사만큼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말일세.”

“감사합니다, 부인.”

“아닐세, 오히려 내가 고맙지.”

라크시스는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가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시아는 유능했고, 실제로도 밀레이나 로드리치라는 거물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탐정을 열연하게 된 시아의 눈은 오늘도 동그랗게 빛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시아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덧 감정을 추스른 밀레이나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레이디 켈튼이 할 말을 끝냈으니 이젠 이쪽에서 할 말을 하기로 하지.”

“데뷔 말씀이신가요?”

“그래, 난 빙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사람을 겁주는 거람. 춤추는 연습이라도 하라고 하는 거면 어쩌나 싶어 각오하고 있었는데, 밀레이나가 꺼낸 제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레이디 켈튼, 나흘 후에 있을 황제 폐하의 알현식에 참석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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