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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2)화 (182/292)
  • 182화 

    황제와 황실 가족에게 눈도장을 찍고 사교계 일원으로 인정받는 행사. 여인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하는 거라곤 고작해야 우아한 걸음으로 홀을 걸어가 무릎을 구부린 후, 황제의 인사를 받는 것이 전부였지만 사교계를 노리는 여인들은 그 잠깐의 순간을 위해 꼬박 반년 동안 알현식을 준비하며 목숨을 걸었다.

    그 짧은 순간,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그 명성이 끝모르고 치솟을지 단박에 추락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평가를 어떻게 받게 되든, 제국의 여인들은 알현식을 치러야만 했다. 알현식은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하는 제국에서 사교계 입성 티켓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생일에 맞춰 열리는 알현식까진 고작 나흘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알현식에 초대된 사람에겐 오래전에 이미 초대장이 날아갔을 터. 차탈은 초대장 명단에 시아 켈튼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떠본 것이다.

    [조만간 댁으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정식으로 황궁에 초대받고 나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차탈은 분명 로렌시아호에서 이렇게 말했었지.

    ‘서신을 보낸다는 게 그 뜻이었나.’

    라크시스는 차탈의 수를 가늠하며 소파에 천천히 기댔다.

    황제의 알현식에 참석하지 않고도 사교계 데뷔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다름 아닌 황실의 보증이었다. 일종의 편법이었는데, 황실의 지원을 받는 여인은 알현식에 참가하지 않고도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실 주최 행사 초대장을 위조하는 여인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라크시스 옌이 누구인가. 황제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고대 마법사였다. 그가 원한다면 황제는 언제든 그를 만나줄 것이다. 알현식 일정을 바꾸어달라 하면 황제는 구설수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렇게 해줄 터였다.

    그럼에도 라크시스가 그러지 않았던 것은 예법과 관례를 존중하는 제국의 풍조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황실 행사를 쥐락펴락하지 않아도 라크시스는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반쯤 마신 찻잔 바닥에 채 녹지 않은 설탕이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라크시스는 손가락을 가볍게 돌렸다. 그의 손짓을 따라 시류에 저항하던 설탕이 금세 찻물에 풀어졌다.

    라크시스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어찌 됐든 노든 대공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시아가 사교계에 데뷔하려 한다는 정보는 아마 로드리치가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알았을 것이다. 아니면 며칠 전부터 블레어 스트릿의 부티크의 의상 제작 주문이 일시에 멈춰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음침하기 짝이 없다. 남의 편지나 훔쳐보는 자가 황제가 된다니. 시아는 차탈이 미래에 황제가 된다고 했었다. 참 인물도 없지. 알리나가 조지 황자를 출산했는데도 차탈 같은 게 황제가 된단 말인가.

    ‘다들 속은 거지. 알량한 이미지 놀음에 말이야.’

    그러고 보니 조지 황자가 있는데 왜 차탈이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일까. 혹 그들 모녀에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는 것인가.

    제아무리 수많은 나라가 건국되었다 멸망하는 세월을 살아온 고대 마법사라고는 하나 지금의 라크시스는 세페란테 제국에서 살고 있는 제국민이었다. 거기다 케르딕 7세 등의 역대 황제들과 달리 알리나는 라크시스의 편의를 꽤나 봐주고 있었다.

    그러자 알리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자가 조지가 아닌 차탈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시아에게 물어봐야겠군. 알리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이야.’

    아무튼 지금은 차탈의 편지에 집중할 때였다. 차탈은 시아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알현식에 참가하지 못한 여인이 갈망할 만한 것.

    차탈은 황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달콤한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라크시스는 시아를 결혼 시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필요로 한 건 발자크 로스와 노든 대공을 상대할 수 있는 적당한 신분이었으니까. 시아를 남들 눈에 최고의 결혼 상대로 보이게 할 일 따위, 황제가 멱살을 잡고 협박을 해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면을 차릴 수 있게 레이디 로드리치에게 도움을 청했다. 데뷔는 성대하게, 콧대는 높게. 시아에게 보여줄 만한 수준의 큼직한 행사 몇 군데에만 참석하고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지켜줄 요량이었다.

    ‘어차피 시아는 시즌을 끝까지 보낼 만큼 이 시대에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니니.’

    이번 시간 여행이 얼마나 지속되더라. 기억하기론 이 주 정도였던 것 같다. 그녀의 시간 여행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길어졌다. 게다가 이번엔 봉인을 두 개나 찾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그녀의 이번 시간 여행은 더 길어질지도 몰랐다. 그녀가 칠십 년 후의 원래 시대를 그리워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라크시스에게 있어 시아의 시간 여행이 길어지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시아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시아는 여전히 초대장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차탈의 의도가 뭔지 해석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사교계 시즌의 황실 초대장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칠십 년 후의 시대에서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었나.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춤을 청한 남자가 있었지.

    ‘헬릭스 디아우스 세페란테, 였던가.’

    로렌시아호에서 맞이했던 시아는 그녀와 꼭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아의 그런 차림을 본 건 처음이라 괜히 의식하고 있던 찰나, 라크시스는 그녀의 손가방에서 비죽 튀어나온 댄스 카드를 발견했었다.

    그곳엔 난생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도 시대가 아닌, 시아가 원래 살던 시대의 남자. 시아에겐 스물여덟 해를 살아왔던 그녀만의 세월이 있단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만다. 라크시스는 한 박자 늦게 얼얼해진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고뇌에 빠졌다.

    칠십 년 후의 그녀는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춤을 출까. 마도 시대에는 여행처럼 잠깐 들르고는, 원래 시대로 돌아가선 어떤 삶을 살까. 그녀의 곁엔 누가 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 웃어줄까.

    모든 면에서 타인을 경쟁자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라크시스였다. 그러나 그가 경쟁해야 할지도 모를 자들은 그가 손을 쓸 수 없는 먼 미래에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라크시스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확실히 분발해야겠군.’

    라크시스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서렸다 사라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아의 곁으로 다가가 등 뒤에 섰다.

    “차탈은 당신의 사교계 진출을 간절히 원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거랑 미술원 초대가 무슨 상관인데요?”

    “사교계에 진출하길 희망하는 여인들은 황실의 보증을 원하죠. 알현식에 참석하지 못한 여인들이라면 더더욱이요.”

    라크시스의 설명에 시아는 그제야 초대장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실상 그녀를 평범한 상류층의 레이디로 봤다는 뜻이었다. 좋은 남편, 좋은 결혼에 안달이 난 이 시대의 레이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차탈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하……. 그런 거였어요? 노든 대공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간절하진 않은데요. 제가 신분을 보증받고 싶었던 건 그저 카얄과 라크 때문인걸요.”

    시아의 눈이 호승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자신을 쫓아다니며 자꾸 신경 쓰이게 하더니, 결국 사람을 멋대로 오해하곤 이런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 아닌가.

    라크시스만큼은 아니어도 시아 역시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삼 년 전 헨리 던로가 그녀를 여자라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말 하나에 자존심이 상해, 결국 헨리 던로를 함정에 빠트리려 한밤중에 살인마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시아는 이번에도 이를 악물고 웃고 있었다.

    “역사 시간에 배우기론 괜찮았던 황제라고 배웠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영 아니었네요.”

    “시아, 그렇다면 이 편지를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면 고맙죠. 전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하나도 모르거든요.”

    라크시스는 시아에게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고상함을 잃지 않고도 상대의 속을 긁을 수 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아 켈튼을 건드리는 자를 내버려 두는 것도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차탈의 초대장이 허공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라크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워내며 슬그머니 시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아는 그가 옆에 바짝 붙어 앉는 것도 모르고 로드리치가에서 온 봉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레이디 로드리치가 제 데뷔와 관련해서 상의할 게 있으시다네요.”

    시아는 영 감을 잡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데뷔하는 데 상의할 것까지 있나. 그녀의 얼굴엔 딱 이렇게 쓰여있었다.

    라크시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미스 뮐러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레이디 로드리치를 만나봐야 했습니다.”

    카얄이 레베카와 가주의 반지의 행방을 알게 된 경로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황혼 국교회의 세력이 그녀의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레베카 뮐러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따로 취해야만 했다.

    “하긴 그러네요. 당장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카얄은 사람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으니까요.”

    시아가 물었다.

    “당장 내일 방문할 수 있겠냐고 하는데 괜찮겠죠?”

    통상 초대장은 거절을 대비해 며칠 간격을 두고 미리 보내지는 편이다. 그러나 밀레이나는 다음 날 저택에 와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이 편지 또한 급보로 보낸 것일 테다. 부탁한 일이 잘 처리된 모양이었다.

    역시 레이디 밀레이나의 명성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 그녀를 시아의 샤프롱으로 선택한 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라크시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완벽한 타이밍이네요.”

    * * *

    로드리치 저택은 전과 다름없이 고전미를 가득 풍겼다. 등나무가 낭창거리는 보랏빛 뒤뜰 정원에서 은은한 홍차 향이 피어올랐다.

    “아아, 어서 오게.”

    밀레이나는 오늘도 꼿꼿하게 앉아 시아 일행을 맞이했다. 지난번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시아 켈튼이라는 여인에게선 생각보다 귀족의 태가 났다. 라크시스 옌의 에스코트를 받아 정원의 다리를 건너오는 모습이 생각보다 우아하고 부드럽다.

    라크시스 옌에게선 그녀가 데뷔를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한 적이 없었다 들었는데. 나름 레이디라고 불리는 여인이라 그런가. 나고 자란 환경이 풍족하고 엄격했음은 틀림없다. 고칠 점은 많아도 에스코트를 받는 모양새 하나는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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