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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1)화 (181/292)
  • 181화 

    요르문은 라크시스가 고대 마법사라고 불리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방대한 마력과 가늠할 수 없는 나이 탓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했지. 돌이켜보면 라크시스가 먼저 나서서 스스로를 사도니 뭐니 하는 호칭으로 소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누님은 뭐지? 그간 누님이 마법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요르문은 시아를 가만히 관찰했다. 봉인을 잡은 직후,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그녀의 몸을 돌아다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마력이 저렇게 겉으로 드러난다는 건, 가진 마력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누님은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서 왔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라크시스보다 더 막대한 마력을…….’

    한두 마디로 설명될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을 건너다니는 여행자. 고대 마법사보다 배는 많은 마력을 소유하고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

    ‘잠깐. 그러고 보니 방금 봉인을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부순 것도 아니고 없앤 것도 아니고. 설마 지금 누님의 몸에 돌아다니는 마력이 봉인과 관련이 있는 건가. 봉인을 처리하면 마력을 얻는다든가……!’

    정확한 추리였다. 만약 시아가 요르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놀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르문은 함부로 단정하지 않았다. 모든 건 그저 추측일 뿐이었으니까.

    진실은 누님만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시아는 요르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요르문은 저를 피하는 시아를 보며 더 캐묻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크시스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뭔가 있는데.’

    단순히 라크시스가 시아를 좋아해서 감싸주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예전이었다면 저와 같이 나서서 시아를 의심했을 라크시스가 별다른 추궁도 없이 그녀를 변호하고 있었다. 라크 녀석의 성격이라면 아무리 좋아하는 여인이라도 끝끝내 비밀을 파헤쳤을 텐데.

    지금의 라크시스는 동류의 존재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시아가 저와 같은 은발을 지녔기 때문일까. 하지만 시아가 은발이었던 건 봉인을 쥐었던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크 녀석, 누님의 은발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잖아.

    ‘확실해. 저 녀석은 누님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정답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라크시스의 저택에 걸린 초상화 속 은발 여인과 시아가 꼭 닮아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요르문이 그 그림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라크시스의 저택 자체가 남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누님을 만나거나 봉인을 연구하는 일 등은 모두 켈튼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은발 여인의 초상을 본 요르문의 기억이 퇴색되는 건 당연했다.

    일단은 한보 후퇴였다. 라크시스 옌이 아닌 또 다른 은발 마법사의 등장이라. 어느새 마력을 안정화시켰는지, 시아의 몸을 돌아다니던 마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만약 누님이 의도해서 마력을 갈무리한 것이라면, 그것도 참 대단한 일이었다.

    요르문은 소년미 넘치는 얼굴을 십분 활용했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몸을 슬쩍 꼬았다.

    “알았어요, 누님. 저한텐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다는 거죠?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죠.”

    효과는 직방이었다. 시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많이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누님과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 생각했어요. 누님은 아니셨나 보네요.”

    “요르문, 그건…….”

    피는 안 섞였어도 누나 동생으로 지낸 기간이 꽤 되어서 그런가, 시아는 요르문에게 비밀을 만든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시아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냥 확 말해버려? 만약 그녀가 속으로 미친 듯이 갈등한 것을 알았다면, 요르문은 아마도 곧바로 쐐기를 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르문은 한발 물러났다.

    “그래도 언젠간 누님이 어떤 사람인지 제게도 알려주세요. 저도 누님의 시간 여행을 돕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요르문은 시아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미련이 뚝뚝 남는 낯으로 아련하게 돌아서며, 라크시스를 불퉁하게 바라보았다.

    그 꼴을 목격한 라크시스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망측하게 어린애 흉내라니. 속에 든 건 서른은 족히 넘은 아저씨가 말이다.

    하지만 시아에겐 그 연기가 제대로 먹혀들어 간 모양이었다.

    “알았어.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결심이 서면 모두에게 알려줄 테니까. 생각이 정리되면 곧바로 말해줄게.”

    ‘모두에게 알려준다고? 그럼 라크 녀석도 모른다는 소린가?’

    요르문은 뒤돌아선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라크시스도 누님의 정체를 모른다니. 그럼 아까 그 태도는 대체 뭔데?

    그때였다.

    “주인님, 들어가겠습니다.”

    【 입성 】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은쟁반을 든 헤이든이었다. 그는 난장판이 된 연구실을 보고 기겁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기계들이 죄다 엎어져 부서져 있고 주인님과 고대 마법사가 한바탕 마법으로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차림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안 그래도 로비에 진동이 전해질 정도로 거대한 울림이 저택을 뒤흔든 탓에 사용인 모두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하필이면 그때 편지가 오는 바람에 사용인끼리는 누가 연구실에 가냐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주인을 보좌하는 저택의 총책임자는 집사였다. 그리하여 결국 헤이든이 울며 겨자 먹기로 연구실에 찾아온 것이다.

    “하, 하하하…….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어딜 가나! 왔으면 들어와야지.”

    도망치려다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다. 헤이든은 바닥에 널린 잔해를 피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곤 은쟁반 위의 편지를 시아에게 내밀었다.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고생하셨어요, 헤이든. 저희 때문에 놀라셨겠네요.”

    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편지를 받아주자 헤이든이 금세 풀어져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주인님께서 이러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요르문은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꼈다.

    “누가 보면 내가 매일같이 뭘 부시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요즘은 요크 부인이 왜 잔소리를 하시는지 알 것 같다니까요.”

    도대체 주인이 나인지 누님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젠 대놓고 제게 툴툴거리는 헤이든에 요르문이 헛웃음을 흘리며 구시렁거렸다.

    한편 시아는 페이퍼 나이프를 들다 멈칫했다.

    “라크, 편지가 두 통인데 하나는 로드리치가에서 온 거고 다른 하나는…….”

    “황궁에서 왔군요.”

    황궁이란 말에 모든 시선이 일제히 시아에게로 향했다. 황궁이라. 마도 시대의 황궁에서 미지의 레이디 시아 켈튼에게 편지를 보낼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이든은 먼발치에서 귀를 쫑긋거렸다. 주인의 편지를 함부로 볼 순 없었지만, 들리는 내용을 듣는 것까진 어쩔 수 없잖아? 안 그래도 고리타분하게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황궁 시종이 황실 인장이 찍힌 편지를 턱 내밀어 전달하고 사라진 이후, 켈튼 저택의 사용인들끼리 난리가 난 참이었다.

    황궁에서 온 편지라니. 게다가 편지는 레이디 시아 켈튼 앞으로 온 것이었다. 아가씨께 빨리 편지를 드리자며 사용인들이 앞다투어 시아를 찾아가려고 하던 차에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연구실에서 들려온 것이다.

    요르문이 기가 막히다는 듯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새 소문이 다 났나 봐요. 로렌 허슬러이자 레이디 켈튼이 이 저택에 있다고요.”

    “…그러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시아는 황실 인장이 떡하니 찍힌 편지를 떨떠름하게 집어 들었다.

    “황제 폐하일까요?”

    “황실 인장을 쓸 정도면 황제 폐하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만.”

    라크시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이상한 일이군요. 황제가 데뷔도 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이렇게 공식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는 게요.”

    “일단 열어볼게요.”

    시아는 숨을 들이켜고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연구실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가르던 짧은 시간이 마치 수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봉투가 완전히 열리고 향을 입힌 빳빳한 종이가 툭 떨어졌다.

    시아는 종이를 펼쳐 들었다.

    “황립 미술원의 연례 전시회 초대장이에요.”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구르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초대장을 끝까지 읽어내린 시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가 아니라 노든 대공에게서 왔네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요르문이 책상을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그놈이 보낸 초대장이라고요?”

    요르문은 시아에게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초대장이야 전시회에 오라는 평범한(황궁에서 온 초대장을 평범하다고 치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내용뿐이었지만, 동봉된 편지에 담긴 뉘앙스가 아주 가관이었다.

    [이 기회에 황립 미술원에 와보시는 것도 레이디 켈튼에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시아를 초대해 주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요르문이 길길이 날뛰었다.

    “누님, 이런 건 그냥 무시하세요. 속이 시커먼 놈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요.”

    시아는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차탈의 초대장이라니.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한편 라크시스는 이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차탈은 무슨 의도로 시아에게 초대장을 보냈는가.

    ‘뻔한 수로군.’

    라크시스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알맞은 온도로 식은 차가 부드러운 향을 품고 목을 넘어간다.

    차탈이 이 정도로 공격적으로 나오리라 생각하진 못했는데. 하지만 그의 편지에 당황할 정도로 라크시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쪽을 얕본 모양이지.’

    차탈의 초대장은 다름 아닌 시아의 사교계 데뷔를 노린 편지였다.

    지금은 바야흐로 사교계 시즌. 제국 상류층에게 사월이란 무르익기 시작한 사교계 시즌이란 말과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대략 삼월부터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까지 제국 수도의 저택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무도회가 열렸다. 이 시기엔 세레타 지구의 고급 저택들이 아르카나의 유흥가 못지않게 불야성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백조처럼 우아하나 동시에 물 밑에서 아등바등 헤엄치는 백조의 발처럼 치열한 결혼 시장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의 여인들에겐 데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바로 황제의 알현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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