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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0)화 (180/292)
  • 180화 

    “누님, 이걸 보세요. 모든 방위에서 마력 수치가 최고점을 찍었죠. 봉인은 아마 이 바람장미가 그려진 장소에 있을 거예요.”

    요르문은 마른세수를 벅벅 해댔다.

    “하지만 이 장소가 정확히 어딘진 몰라요. 프레디 뮐러가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으니까요. 이 그래프와 일치하는 장소를 찾아내면 해결될 문제 같지만, 그곳을 찾으려면 프레디가 했던 것처럼 매일같이 아르카나 시내에 나가 하루 종일 마류 탐지기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고요.”

    요르문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르카나부터 맨덜랜드까지 여덟 지역을 모두 돌며 이 바람장미와 똑같은 그래프가 그려지는 장소를 우리가 따로 찾아야 한단 소리였다.

    그것도 수년이란 시간을 들이며 말이다.

    ‘이래서 별장에 자료를 그대로 두고 간 거였구나. 카얄이 자료를 가져가 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시아는 프레디 뮐러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차라리 내가 시간 여행을 오는 게 빠르겠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어차피 누님은 매시간 여행마다 불안정한 봉인 근처로 오시니, 누님이 도착한 곳 주변을 탐색하는 게 배는 빠를걸요.”

    라크시스도 긍정하는지 요르문의 투정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요르문이 들고 있던 기계를 내밀었다.

    “게다가 마류 탐지기도 영 이상하고 말이죠. 뤼스에서부터 켜두었는데, 계속 이 모양이라니까요.”

    별장에서 찾아낸 마류 탐지기는 요르문의 마류 탐지기와는 또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계기판에 버튼이 주렁주렁 달린 건 지금까지 봐왔던 마류 탐지기와 비슷했지만, 납작한 상단부에 나침반처럼 생긴 판이 하나 더 달려있었다.

    아마도 봉인 특유의 마력 파장이 감지되는 곳을 가리키는 장치 같은데.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나침반 모양의 판 위에서 바늘이 갈피를 잃고 돌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다 북쪽을 가리키더니 갑자기 빙그르르 돌아 동쪽을 가리키거나 남쪽을 가리킨다.

    시아는 바늘을 유심히 관찰하다 문득 팔각형에 가까운 바람장미를 떠올렸다.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강력한 마력이 측정되었기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그려졌댔지.

    만약 그 바람장미가 그려진 곳에 이 마류 탐지기를 켜두면 어떻게 될까. 봉인과 아주 가까운 곳에, 혹은 봉인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이 마류 탐지기를 켜둔다면.

    “…이건, 봉인이 가까이 있단 소리야?”

    “이론상으로는요. 하지만 뤼스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바늘이 이렇게 돌고 있었다구요. 고장 난 것도 아닌데 이래요, 누님. 제가 아까 이걸 모조리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는데…….”

    “잠깐만.”

    “네?”

    봉인이 가까이 있다, 라. 시아는 퍼뜩 고개를 들어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요르문의 자료를 보느라 가까이 있었던 탓에 하마터면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턱에 정수리를 박을 뻔했다.

    “라크.”

    “…왜 그러십니까.”

    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라크시스는 그 눈빛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가 지금 무언가를 깨달은 거다.

    “말씀하세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라크가 가지고 있었던 봉인 때문이에요. 별장에서 제게 보여줬던 봉인, 지금 보여줄래요?”

    * * *

    “…아무튼 갖고 있던 봉인이 원인인 건 맞았나 보네요.”

    요르문은 시아를 두려움과 경외가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한바탕 섬광이 몰아친 연구실은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책상이며 기계들이 죄다 엎어져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요르문의 머리가 강풍을 만난 버드나무처럼 한 방향으로 죄다 쏠려있었다.

    라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던 은발이 제멋대로 뒤집혀 이마가 드러났다. 빳빳하게 관리된 정장이 폭풍이라도 맞은 양 힘을 잃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폭풍을 맞긴 했다. 어둠이 천칭 위로 올라가고, 빛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만든 섬광의 폭풍이었다. 라크시스의 손 위에는 활짝 열린 보석함이 있었다. 아스타가 준 현자의 별 보관함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었을 세 개의 봉인이 온데간데없었다.

    시아가 민망한 듯 웃었다.

    일전의 폭풍에서 유일하게 차림이 흐트러지지 않은 건 시아뿐이었다. 그녀의 발치에 기다란 은발이 몇 가닥 떨어져 있었다. 왜인지 시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좋아 보였다.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혈색이 좋아 보인달까. 혼자서만 모든 피로를 씻어낸 얼굴이었다.

    요르문이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님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요.”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한데.”

    시아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프레디 뮐러의 마류 탐지기가 이상하게 작동되는 원인을 찾다가, 그의 별장에서 라크시스가 보여줬던 봉인을 떠올렸을 뿐인데.

    ‘어, 어어! 진짜 그것 때문이었나 봐요, 누님! 바늘이!’

    라크시스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보관함을 꺼내자마자 바늘이 일제히 라크시스를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얇은 유리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바들바들거렸다. 요르문이 만든 기계들이 조용한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관함을 연 이후였다.

    ‘라크! 이거 다시 못 닫아요?’

    ‘아무래도 지난번에 한 번 열었던 것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만…….’

    보관함을 열자마자 확 피어오른 무지갯빛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요동쳤다. 분명 별장에서 열어봤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어린아이가 부모를 발견하고 울어젖히듯 격렬한 마력이 연구실 안에 마구잡이로 뻗어나갔다.

    그간 라크시스가 봉인의 불안정화를 늦춰왔다는 말이 단박에 실감 났다. 봉인은 보관함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파괴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어보자고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시아의 외침에 라크시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미안합니다. 보관함의 마법이 잘 유지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불안정한 봉인에서 흘러나온 이상 마류를 감지한 연구실의 기계들이 일제히 저택이 떠나가라 경고음을 울렸다. 프레디의 마류 탐지기가 작동될 때만 해도 잠잠했던 기계들이 날뛰자 요르문이 허둥거렸다.

    ‘으아아! 이러다 요크 부인 올라오게 생겼네. 누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시끄러운 소리부터 꺼야겠어요!’

    그때를 틈타 라크시스가 시아를 붙잡았다.

    ‘시아. 지금이에요.’

    ‘…지금이요?’

    라크시스가 보관함을 눈짓했다. 시커먼 어둠이 봉인을 당장이라도 뚫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봉인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눈도 뜨지 못할 강렬한 빛이 곧바로 연구실을 덮쳤다. 기계를 만지던 요르문은 화들짝 놀라 시아를 바라본 채로 굳어버렸다.

    봉인 세 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로렌시아호 정도의 수준을 예상했던 라크시스조차 당황하며 다급히 마력을 둘러 연구실을 감쌌다. 그럼에도 찔러 드는 빛을 모두 막지 못해 소파며 가구들이 벽으로 밀려나고 기계들이 죄다 엎어져 난장판이 됐다.

    연구실의 그 무엇도 멀쩡하지 않았다. 단 한 명, 시아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누님이야말로 진짜 사도였던 거잖아요! 그러니 시간을 뛰어넘어 마도 시대까지 오실 수 있었던 거고요.”

    “…사도는 아냐.”

    “사도가 아니면 뭔데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누님 머리가 라크와 똑같은 색으로 빛나는 걸요. 지금도 봐요. 이게 다 뭔데요.”

    요르문은 뒤엉킨 전선을 감아올리다가 바닥에서 긴 은발을 주워서 시아의 눈앞에 내밀었다.

    “누님 머리카락이잖아요.”

    이렇게 증거가 있으니 발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갈리프라는 걸 밝힐 수도 없었다.

    ‘밝힐 순 있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가 태고룡이니 광룡이니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얽힌 사연 정도야 어차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해해 줄 테니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갈리프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라크시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에게 갈리프는 애틋하고도 그리운 존재일 테지. 시아가 갈리프라는 걸 알아도 라크시스는 그녀에게 변함없는 호의를 보일 터다. 어쩌면 전보다 더 그녀에게 애정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애초에 라크와 난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라크시스의 성격상 쉽사리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지금 당장 정체를 말해버리면 속은 시원하겠지. 어차피 언젠간 말해야 할 이야기인데. 차라리 요르문까지 모두 있는 지금, 정체를 털어놓는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분명 전에도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그땐 내가 누군지 말하려고도 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쳐오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라크시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요르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었다.

    고백한다 해도 라크시스와 눈을 마주치며 하고 싶었다. 그녀가 갈리프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무슨 표정을 짓게 될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 감정이 대체 뭐길래.

    ‘…나 정말로 바보 같구나.’

    시아는 숨을 삼켰다. 대답을 미루기엔 그녀를 향한 요르문의 눈빛이 날카롭다. 이걸 어떻게 발뺌해야 하나. 사도가 아니라고 하면 이 머리카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가 사도라면 지금 이렇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었겠지.”

    라크시스였다.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갈리프의 존재가 요르문에게 드러나지 않길 바랐던 걸까. 어찌 됐든 그 덕분에 시아는 뒤늦게 변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사도였다면 지금쯤 아마 자갈만 한 봉인이 되어있었을걸.”

    “그래. 그러니 시아를 너무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라크시스의 철벽같은 수비에 요르문이 당황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하아, 그건 그렇지.”

    고대 마도 시대에 모든 사도는 본인의 육신을 매개로 광룡의 힘을 봉인했다. 대전제와도 같은 이 사실 하나 때문에 요르문은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요르문은 쉽게 의심을 풀지 못했다. 은발이라니. 이토록 마력이 응축된 신체를 가지고 고대 마법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야?

    ‘하긴 생각해 보면 라크도 멀쩡히 살아있긴 하지. 저 녀석이 진짜로 사도였다면 녀석도 오래전에 조막만 한 봉인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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