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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8)화 (178/292)
  • 178화 

    * * *

    수화기 너머로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들렸다.

    - 아니, 이렇게 전화를 다 주시고. 하하하. 살다 보니 고대 마법사님께 전화도 다 받아보는군요! 덕분에 노후 걱정이 싹 사라졌지 뭡니까. 슬슬 다음 작품도 써볼까 하는데, 예? 누구요? 거스 벤슨 경정님이요? 그분은 갑자기 왜…….

    - 알긴 알죠. 그분이 메이덜린 서에 계실 적엔 같이 일했으니까요. 엄청 옛날 일인데, 어떻게 아시고. 아는 방법이 다 있다고요? 하긴, 맞는 말이긴 하네요. 경정님은 꽤 유능한 분이셨죠. 한때 아르카나 경찰서에서 총경까지 지내셨던 분이라 연줄 잘 잡았다 생각한 적도 있었고요.

    - 친했냐고 물으신다면, 네. 뭐, 나름 친했지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아아……. 그것 때문에 연락하신 거구나. 웬일로 고대 마법사님이 절 먼저 찾으신다 했네요. 할 말이나 먼저 하라고요? 예예, 알겠습니다. 저도 이제 경감인지라 꽤 바쁜,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휴, 전화가 낫죠. 서에 찾아오시면 불편하실 겁니다. 하하하…….

    -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거스 경정님, 아니 이젠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직도 근무 하시나? 아… 계속 뤼스에 계신다고요. 크흠, 사실 경정님껜 여동생이 한 명 있었어요. 단 한 번도 동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몰랐었는데, 거주민 명부를 정리하다 우연히 알게 됐죠. 경정님이 어릴 적에 잃어버린 동생이라 하더군요. 아직까지도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사망신고를 미뤘다고 하셨어요.

    - 경찰이 된 것도 동생을 찾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요. 실종자가 이십 년 넘게 발견되지 않았으면 그게 사망이지, 실종입니까. 게다가 아시다시피 이십 년 전엔 경찰이란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잖습니까? 당연히 당시 사건 정보니 뭐니 하는 것도 남아있지 않았죠. 경찰이 되신 후엔 맨땅에 머리를 박는 심정으로 동생을 찾아다니셨다는데, 찾을 수 있겠나요. 저도 경정님 앞이라 말은 못했지만, 참 미련해 보이더군요.

    홀로 떠들고 있는 수화기만 빼고, 그저 고요한 이곳은 다름 아닌 켈튼 저택의 연구실이었다.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은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프레디의 별장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하나씩 펼쳐 정리하고 있었다.

    - 고대 마법사님, 듣고 계시죠? 대답이 없으시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하시죠.”

    라크시스는 바람장미를 구역별로 정리해 연구실 벽에 붙이고 있는 요르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엔 피곤함이 뚝뚝 묻어있었다.

    얼마 안 가 정리를 마친 요르문은 다음으로 마류 탐지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듣던 그가 툴툴거렸다.

    “저 영감은 처음 만났을 때랑 이미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니까? 이렇게 방정맞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 로드 켈튼, 뭐라고 하셨나요? 잘 안 들려서요.

    “됐어! 할 말이나 마저 하게!”

    귀도 밝아. 자기 얘기 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듣는다니까? 요르문은 오이 샌드위치를 입 안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세 사람은 모두 뤼스에서 볼일을 보자마자 곧바로 수도로 돌아온 참이었다. 물론 메이슨도 같이 돌아왔지만, 그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짝사랑 상대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프레디 뮐러의 별장을 찾아낸 것만으로 시아 일행은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즉, 뤼스에서의 볼일은 별장을 방문한 것으로 끝난 셈이다. 그런데 어쩌다 마주치게 된 경찰 하나 때문에 그들은 또다시 골머리를 앓고 말았다.

    수화기 너머로 슈나이더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전화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거스 벤슨이었다.

    시아 일행이 혐의를 벗고 뤼스 경찰서에서 나가던 때였다.

    ‘라크. 어떻게 할 거예요?’

    수상한 외지인 신분으로 서에 들어가던 때보다 더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 속에서 시아가 가만히 물어왔다. 라크시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굳이 거스 벤슨 경감에게 협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광룡의 봉인이었고, 그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었을 프레디 뮐러의 죽음을 조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강령술사 이야기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어쨌든 그자는 필시 카얄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테니까요.’

    ‘그렇네요.’

    ‘만약 뤼스에 찾아온 붉은 옷의 여인이 팔 년 전 저주를 일으킨 강령술사가 맞다면, 언젠간 그들을 마주치게 되겠죠. 우린 봉인을 찾으러 다니면서 동시에 약한 상태의 카얄을 찾아내어 제거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으니까요.’

    카얄을 찾기 위해 황혼 국교회를 쫓다 보면 언젠가 팔 년 전의 그 강령술사도 만나게 될 거란 뜻이었다. 시아는 그의 말을 곱씹는 듯했다.

    ‘어쨌든 지금 뤼스에 방문해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은 지금 당장 최우선으로 조사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긴 합니다. 프레디 뮐러의 별장에서 찾은 자료를 먼저 해석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별장에서 발견한 바람장미와 일지를 해석하는 데만 해도 한나절은 걸릴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몰랐다. 대충 훑어본 자료엔 봉인이 있을 거라 추정된 지역만이 나와있을 뿐 정확한 좌표가 나와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상황이 정리되니까 좀 더 낫네요. 그럼 일단은 수도로 돌아갈까요? 봉인도 그렇고, 미스 뮐러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합을 맞춰놓고도 네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던 거스 벤슨.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거스와 아는 사이라던 슈나이더에게 연락을 넣었다. 옛 동료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모두 말해달라면서 말이다. 다행히도 슈나이더는 별생각 없이 거스 벤슨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세 사람은 삼십 분째 슈나이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먼저 전화를 걸자고 했던 사람이 라크시스라는 게 의외이긴 했지만.’

    강령술사니 뭐니 하는 것들이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해놓고 은근슬쩍 선수를 친 것이다. 시아는 라크시스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새삼 느꼈다. 릴리 알펜 이후로 깨달은 바가 있다더니, 그 말이 진짜이긴 한 모양이었다.

    “시끄럽긴 하군요. 괜히 전화했나 봅니다.”

    “아녜요. 저도 거스 경감님이 왜 그렇게 이단에 집착하게 됐는진 궁금했으니까요.”

    라크시스가 수화기에서 멀찍이 떨어지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 시아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구겨졌던 미간이 천천히 펴진다.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가 진한 보조개를 남기며 호선을 그렸다. 라크시스는 슬그머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능글맞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쁘군요.”

    “뭐가요?”

    대뜸 물어오는 라크시스에 시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드냐는 거야? 하지만 시아는 곧 그의 말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요! 라크 얼굴을 본 게 그, 얼굴을 본 게 아니라…….”

    “언제든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라크시스는 어느새 소파에 느슨하게 앉아있었다. 기다란 다리를 겹치곤 반쯤 내리깐 시선으로 가만히 있는 모습이 마치 이대로가 가장 아름다우니 마음껏 감상해 달라는 것 같았다.

    “제가 라크를 무슨 작품 취급한 것도 아니고, 감상이라뇨. 저 그렇게 껍데기만 보는 사람 아니라니까요.”

    “작품 취급이라. 나쁘진 않네요. 적어도 곁에 오래 두고 볼만하다는 뜻일 테니.”

    나른하면서도 고고하다. 연구실에 들어오며 살짝 풀어버린 크라바트가 조각 같은 얼굴과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감상한 적 없다고 못 박듯 외쳤는데. 그러나 시아는 순식간에 본능적으로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 버렸다. 모양 좋은 입술이 혈색을 띠고 자신을 부르는 것까지 관찰하고 나서야 시아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라크시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보셔도 됩니다만.”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결국 시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푹 익은 토마토가 되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시아를, 라크시스는 못내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요르문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 잠깐만요. 지금 다들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죠? 레이디 켈튼, 거기 계시죠?

    “네네! 경감님! 듣고 있으니까 마저 말씀하세요!”

    슈나이더가 기막힌 타이밍에 분위기를 끊어냈다. 와, 겨우 살았네. 라크시스는 여전히 요망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완전히 라크시스에게 휘말려버렸을 것이다. 시아는 애꿎은 자료를 뒤적거리다 요르문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남매의 연애를 목격해 버린 것 같은 이 껄끄러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남매도 아닌데 상황이 자꾸만 민망해지는 건 대체 왜일까. 결국 시아와 요르문은 헛기침을 하며 서로를 외면했다.

    거스 벤슨에 대한 인적 자료는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강등당했다 해도 어찌 됐든 팔 년이나 지난 일인데, 거스 벤슨은 경찰 내부에서 여전히 희대의 망나니로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스 벤슨은 제국 동부의 맨덜랜드 출신으로 지방 유력 귀족의 자식이었다. 삼 남매 중 둘째로, 밑으로 달리아 벤슨이라는 여동생이 있었으며 그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

    사건은 달리아 벤슨이 모르간에 지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린 거스 벤슨은 아카데미에 다니느라 수도의 친척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교계 시즌을 맞이하여 달리아 벤슨이 수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유력 인사의 자제라고는 하나 지방과 수도의 문화는 엄연히 다른 법. 달리아 벤슨은 보호자라고는 수도의 고모가 유일한 상태에서 동성의 친구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며 수도의 사교계를 만끽했다.

    어느 날부터였다. 달리아 벤슨의 귀가가 늦어지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묻자 그녀는 교회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회에서 만난 동성의 또래들과 친해져 근교로 여행도 가고 함께 기도도 드리느라 늦어졌다는 것이다.

    독실한 국교회 집안에서 나고 자란 거스는 달리아의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만난 친구라면 안심해도 좋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리아가 피폐한 몰골로 집에 돌아오고, 저녁 먹을 기력도 없이 지쳐 잠들었는데도 거스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혹독한 아카데미 일정을 따라가느라 그 역시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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