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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4)화 (174/292)
  • 174화 

    본인을 거스 벤슨 경감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보고 시아가 라크시스에게 속삭였다.

    “브라이던힐 소속이요? 여긴 뤼스잖아요.”

    “모르간을 뺀 다른 지역은 지방경찰청 단위로 치안이 관리되고 있죠. 아마 뤼스는 인구가 적어서 브라이던힐의 관할에 속해있는 것 같습니다.”

    거스 벤슨은 뒤편에서 속닥거리는 두 남녀를 가느다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거스는 별장 부지 주변에 잠복시킨 부하 녀석들을 떠올렸다. 도망치려는 수작이라면 틀렸다 이거야.

    “수상한 외지인이 폐가에 드나든다는 신고를 받고 조사 중입니다. 잠시 서까지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그새 소문이 났다고? 시아는 당황했다. 뤼스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신고를 당하다니.

    “수상한 외지인이라뇨. 저희는…….”

    “자세한 이야기는 서에 가서 하시죠. 무고한 분들이라면 저와 함께 가셔도 큰일은 없으실 겁니다.”

    저 멀리 고목의 뒤를 보니 낯익은 실루엣이 있었다. 뤼스 역에서 프레디 뮐러의 별장까지 시아 일행을 태워준 마부였다.

    ‘저 사람이 신고한 거였어?’

    기가 막혔다. 수상한 외지인이라는 소리도 저 마부가 했나 본데. 시아는 가만히 마부를 노려보았다. 찔리는 게 있는지, 마부는 시아와 눈이 마주치고 쏙 숨어버렸다.

    게다가 거스 벤슨이라고 하는 경감, 쓸데없이 고지식해 말이 안 통할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여차하면 때리든 총을 들든 하려고 허리춤에 슬그머니 손을 얹고 있지 않은가.

    “시아. 주변에 잠복한 경찰이 많습니다.”

    라크시스가 불어오는 바람을 잠시 느끼더니 말해주었다. 시아는 기가 막혔다. 수상하면 얼마나 수상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람. 그때 한 가닥 기억이 시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댁들은 뉘쇼? 거 수도를 뒤집어 놨다던 이단이라도 되쇼?’

    분명 우릴 태웠던 마부가 이런 말을 했었지. 시아는 가만히 속삭였다.

    “라크. 우리,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라크시스가 눈알을 천천히 굴려 거스를 바라보았다. 황혼 국교회라. 그런 거라면 경감의 지나친 경계를 이해할 만했다.

    “거 그만 속닥거리고 따라오시죠. 할 말 있으면 앞에서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라크시스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가 요르문을 제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깊게 눌러쓴 실크햇 밑으로 드러나는 입매의 호선에 사방에서 철컥, 하는 장전 소리가 들린다.

    라크시스가 우아하게 모자를 벗었다. 드러나는 은발에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진다. 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결에 날려 보낸 모자가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아는 그 광경에 감탄하다, 둥글게 말아쥔 손이 허전한 것을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손에 들린 슈트 케이스도, 시아와 요르문, 메이슨이 들고 있던 짐 가방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후였다.

    허공에서 얇게 공기를 움킨 그의 손에 다시금 모자가 감겨들었다. 반대 손엔 어느새 금장 손잡이의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시선을 빼앗는 마법에 거스는 네 사람의 짐 가방이 사라진 것도 몰랐다.

    노련한 경감의 심장이 갓 부임한 순경처럼 쿵쾅거렸다. 고대 마법사라니. 저런 거물이 대체 왜 이런 조그마한 시골 영지까지 와있는 거야?

    라크시스는 모자를 쥔 손으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몸을 숙여 인사했다. 춤사위처럼 우아하면서도 예법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신사의 정석을 보는 듯한 정중한 몸놀림이었다.

    시아도, 거스도, 잠복하던 경찰에 나무 뒤로 숨은 마부까지 모두 넋을 잃었다. 라크시스는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사라면 응당 법을 따라야겠지요. 협조할 테니 서로 가십시다. 거스 벤슨 경감.”

    * * *

    “레이디, 저희 이러다가 여기 갇히는 건 아니겠죠?”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유치장에 갇힐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시아는 잔뜩 움츠러든 메이슨을 보며 당황했다. 네 사람이 있는 곳은 경찰서 로비에 마련된 자그마한 테이블이었다. 몇 없는 민원인들을 위해 가져다 둔 테이블인 것 같은데, 서의 규모가 작긴 작은지 뤼스 경찰서는 메이덜린 경찰서에 비해 건물은 컸어도 내부는 비교적 휑했다.

    게다가 함께 고생하며 일하는 사람들 특유의 묘한 끈끈함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시아가 드나들었던 경찰서는 메이덜린 경찰서와 이곳 뤼스 경찰서가 전부였긴 했지만, 메이덜린에서는 외부인을 경계하긴 했어도 저들끼리는 동료 의식 같은 친밀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가 휑하고 인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이 삭막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시아는 그 원인이 수상한 외지인인 이쪽이 아니라 경찰서 내부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딱히 사이가 나빠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런 분위기의 원인은 조직에서 동떨어진 사람으로 인해 무리가 나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아는 경찰서를 천천히 훑다 메이슨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경찰서는…….”

    “미스터 비렌체, 괜찮아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겁부터 먹어요. 진정하고 차 좀 마셔요.”

    시아는 메이슨을 달랬다. 메이슨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라며 거스 경감이 자리를 비운 사이, 경감을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자 괜히 졸아들고 만 것이다.

    경찰서는 죄를 지었을 때나 잡혀 오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인 듯했다.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시체를 도굴하던 시절, 재키 레이븐으로 오해받고 슈나이더에게 잡혀갔던 기억이 있는 메이슨에게 경찰서는 여전히 발걸음을 해선 안 되는 장소로 남아있었다.

    “한결 낫네요.”

    메이슨은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하긴 범죄자에게 수갑도 안 채우고 차를 내어주는 경찰이 어디 있나. 메이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하던 경찰들이 책상 너머로 이쪽을, 정확히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라크시스 옌을 흘긋거리다 도로 숨고 있었다. 평생 가도 보기 힘들다는 고대 마법사가 뤼스 같은 소도시에 나타나다니. 무슨 일인가 하여 구경이 난 것이다.

    그런 고대 마법사와 함께 있다 생각하니까 왠지 안심이 됐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다 잘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다.

    “고마워요. 레이디. 진짜로 덜 무서워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렇죠?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에요. 별일 없을 거라니까요.”

    그때였다.

    “말씀만 들으면 레이디께선 경찰서에 꽤 자주 드나드신 것 같군요.”

    거스 경감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시아 일행에게 달라붙어 있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이곳의 묘한 분위기는 거스 경감님 때문이었구나.’

    거스는 여전히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시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모르는 건지, 아는데도 무시하는 건지.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아는 한순간에 타자기 소리만 남아버린 경찰서에서 천천히 눈길을 돌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느새 라크시스 못지않게 능글맞아진 그녀였다.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물론 합법적으로요.”

    거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고갯짓을 했다.

    “네 분 모두 따라오시죠.”

    메이덜린보다 예산이 덜 들어간 듯한 경감의 사무실은 삭막하면서도 곳곳에 주인의 손길이 많이 묻어있었다.

    “딕슨. 차 좀 내오지.”

    딕슨이라 불린 순경이 잠시 거스를 바라보다 고개만 끄덕이곤 사라졌다. 잡심부름이라지만 상관의 지시인데도 대답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이곳의 분위기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거스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딕슨이 사라지는 광경을 잠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순식간에 차를 내온 순경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거스는 블라인드 줄을 당겨 사무실에 드리운 칙칙함을 걷어내곤 자리를 안내했다.

    “편하신 곳에 앉으시죠.”

    빈 조사서와 서류철 따위가 테이블 위에 툭 던져졌다. 거스의 만면에 찌든 피곤함과 노련하고도 예리한 표정이 동시에 감돌았다. 그는 시아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 우선 네 분의 성함 좀 들어봅시다. 고대 마법사께선 워낙 유명하시니 넘어가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쪽은 미스터 메이슨 비렌체, 켈튼 코퍼레이션의 연구원이고 그 옆은 켈튼가의 로드 요르문 켈튼이에요.”

    고대 마법사 못지않은 거물들에 거스가 혀를 차며 펜을 놀리는 사이, 시아는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소개 듣기를 건너뛰었다는 깨달았다. 거스가 펜을 탁 내려놓으며 턱을 괴었다.

    “그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의뢰와는 영 어울리지 않게 생긴 신사 셋과 숙녀 하나. 의뢰를 했으면 했지, 오래된 사유지를 헤집으며 돌아다니는 것과는 거리가 먼 네 사람을 훑으며 거스가 물었다.

    “혹 여기 계신 신사분들이 탐정이라도 되십니까?”

    “제가 탐정이에요. 별장 주인의 의뢰를 받아 조사 중이었고요.”

    예상 밖의 여자가 당당히 자신을 탐정이라 소개하며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듣던 거스는 처음부터 당황하고 말았다.

    “탐정, 잠깐 레이디께서요? 것보다 별장 주인이라니…….”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안 하고 있었네요. 시아 켈튼이라고 해요. 탐정 로렌 허슬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거스 벤슨 경감님.”

    로렌 허슬러.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이름이다. 거스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와 일행들의 구성이 묘하게 익숙한 것을 알아차렸다. 검붉은 머리칼을 가진 묘령의 여인과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이 어째서 이런 시골까지 행차했는지 의아했는데.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심쩍어 거스는 제게 악수를 청한 여자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레이디가 진짜 로렌 허슬러라고요.”

    “네. 제가 바로 그 로렌 허슬러예요.”

    라크시스 옌이 뭘 의심하냐는 듯 눈썹을 밀어 올리며, 로렌 허슬러를 눈짓했다. 마치 자신이 보증하는 사람이니 감히 의문을 가지지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한땐 재키 레이븐을 잡았다던 로렌 허슬러를 만나고 싶어 수도의 탐정 사무소란 탐정 사무소는 다 뒤졌다. 그 후 누구의 의뢰도 받지 않겠다는 듯 홀연히 사라져, 결국 거스가 먼저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된 후로 그는 로렌 허슬러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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