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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3)화 (173/292)

173화 

일기가 끝났다. 신의 음성을 들은 이후 프레디 뮐러는 연구하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곧바로 뤼스를 떠난 듯했다.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었는지 일지의 페이지 한 장 하단부가 쭉 찢어져 사라져 있었고, 찢어진 페이지 뒤편에는 그가 급히 남긴 편지가 적혀있었다.

[사랑하는 레베카. 이 일지를 읽고 있다는 건 결국 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레베카. 나의 레베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딸아. 평생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기를 바랐었지.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단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너를 너무 늦게 찾아간 죄를 그렇게라도 갚고 싶었어. 나의 딸로 태어난 죄를 짊어지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하구나. 난 결국 너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어. 그들의 시야에서 네 존재를 지우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는데도 여전히 후회해. 네게 이런 인생밖에 남겨주지 못한 못난 아버지라 미안하구나.

레베카,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단다. 사도의 신전을 지켜다오. 태고의 주인께서 찾아올 것이니, 부디 다가올 종말로부터 제국을 지켜다오. 우리의 뿌리인 뮐러가를, 사랑했던 가신들을 어둠으로부터 구해다오.

네가 이 일지를 읽고 있을 즈음이면 태고의 주인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영특한 아이이니 내가 남긴 단서를 알아볼 수 있을 거다.

사랑한다. 레베카. 난 널 정말로 사랑했단다. 부디 그분께서 너만은 구원해 주시길 바라며. 언제나 건강하길.]

적막이 맴돌았다. 언젠가부터 시아와 라크시스의 어깨너머로 함께 일기를 보고 있던 요르문과 메이슨도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요 속에서 먼지만이 천천히 부유하다 가라앉았다.

누구도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유서가 된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 프레디 뮐러는 딸이 편지를 받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딸에게 부탁할 것들을 꾹꾹 눌러 적었다. 자식에겐 아무런 업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심정과 미래를 봐버린 자로서 걸어야만 했던 안타까운 숙명이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레베카는 한때 자신이 버림받은 줄 알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했었지. 메이드로 살아온 지난날이 그녀에겐 비참했을지도 모르나, 프레디에게는 딸이 그렇게라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단 사실이 절박함 속에서 겨우 쥔 목숨 줄과도 같았을 것이다.

시아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 일지는 미스 뮐러에게 가져다줘야겠어요.”

라크시스가 나직이 답했다.

“그뿐이겠습니까. 프레디 뮐러가 남긴 모든 유산은 이제 미스 뮐러의 것이니까요.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여기서 찾은 모든 것을 그녀에게 돌려주도록 하죠.”

이후 시아 일행은 프레디의 별장에서 챙길 수 있는 단서들을 모조리 챙겼다.

책장 밑 비밀 공간에서 발견된 일지들은 물론이요, 돌돌 말린 지도와 나침반, 정체 모를 기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기계도 마류 탐지기였다고 한다)와 수백 장의 바람장미까지 고스란히 서류철에 넣어 슈트 케이스에 넣었다.

물론 슈트 케이스는 라크시스가 마법으로 어디선가 가져온 물건이었다. 소환된 먼지 쌓인 슈트 케이스를 보자마자 요르문이 경악했는데, 얼핏 말하는 걸 들어보니 요르문의 아버지가 언급될 만큼 꽤나 오래된 물건 같았다.

“이제 나갈까요? 다들 챙길 건 다 챙겼죠?”

“그럼요. 누님. 여기 단단히 챙겨뒀죠.”

올 땐 단신이었는데, 나갈 땐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짐이 한가득이었다. 프레디 뮐러가 연구 자료로 쓰던 책들까지 챙기니 어느새 한 사람당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게 되었다. 모자까지 도로 눌러쓰니 정말로 친척 집에 방문하러 소도시에 온 신사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책을 넣었는데도 짐이 가볍다는 게 신기하네요.”

“마법이죠. 과학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기술이랄까요.”

과학과 환상의 경계. 시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마법이 없는 미래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 같은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계단을 오르자 초대 가주의 부서진 묘실이 보였다.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자니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을 거스르는 것만 같았다. 몇백 년 내내 자리를 지켜온 뮐러의 묘지에서, 3520년 마도 시대의 뤼스로.

라크시스가 정령의 사체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나저나 카얄이 생각보다 별장을 늦게 발견했군요. 프레디 뮐러가 죽은 건 팔 년 전인데, 이곳 묘지를 찾아온 건 고작해야 일주일 전쯤이니 말입니다.”

“자료들도 생각보다 온전히 남아있었고요. 찢어진 페이지를 빼면 일지도 멀쩡했잖아요? 있는 대로 다 헤집어놓기만 하고 말예요.”

시아는 결론을 내렸다.

“카얄은 여기서 아무것도 못 찾았던 거였어요.”

“제 생각엔 가주의 반지를 찾으러 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지는 팔 년 전부터 미스 뮐러와 함께 로드리치 저택에 있었으니 여기선 찾을 수 없었겠죠.”

하긴 그렇겠네. 메이슨 비렌체의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도 봉인만을 찾았지, 다른 것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었다.

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미스 뮐러와 가주의 반지가 로드리치 저택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여기서도 찾아내지 못한 봉인과 레베카의 거취를 카얄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아야야, 누님. 갑자기 멈춰 서시면…….”

뒤따라오던 요르문이 한눈 팔던 그대로 시아에게 부딪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시아와 라크시스는 요르문을 신경 쓰지 못했다. 라크시스는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걸 조사하는 게 우선이겠군요.”

“만약 로드리치 저택에 이단의 신자가 있었던 거라면 미스 뮐러는 위험할지도 몰라요.”

“가주의 반지가 이미 파괴되었잖습니까. 카얄이 미스 뮐러를 주시하고 있을 확률은 낮을 겁니다.”

시아가 반박했다.

“이젠 카얄이 봉인만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란 걸 라크도 알잖아요. 황혼 국교회의 세력이 근처에 있다면 틀림없이 살인 사건이 벌어질 거예요. 카얄은 마력을 필요로 하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요. 미스 뮐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계속 살펴두는 게 좋겠습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요? 누님, 저도 좀 끼워주시면 안 될까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요르문은 시아와 라크시스를 보채진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자신에게 언젠간 말해줄 테니까. 물론 자신만 쏙 빼놓고 둘이서만 속닥거리는 모습이 약 오르긴 했지만 말이다.

“라크, 일단 수도로 돌아가요. 요르문, 미스 뮐러가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미스 뮐러가 위험하다고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요르문이 놀라며 반문했다.

“카얄이 미스 뮐러의 거취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밝혀내야 돼. 생각보다 가까이에 황혼 국교회 세력이 있을지도 몰라. 미스 뮐러 근처에 말이야.”

사태를 이해한 요르문의 걸음이 빨라졌다. 영문 모르고 끌려온 메이슨까지 붙들고, 네 사람이 별장의 경계를 서둘러 넘었다. 일렁이는 투명한 환각을 넘어서자, 등 뒤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묘비를 밟아 나타난 별장의 환각이었다. 악령 들린 폐가처럼 쓸쓸히 서있는 별장의 현관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정령이 다시금 동그랗게 떠올라 맴돌았다.

유령처럼 등장했을 땐 언제고, 그새 경계를 풀었는지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 풀어줬어요?”

“여기에 남겠다더군요. 죽은 동료들을 두고 혼자 떠나기 싫다 하기에.”

라크시스는 정령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령이 제 품을 떠나기 전 조잘거리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죽은 정령은 모두 초대 뮐러 가주가 살아있을 적부터 그를 보필하던 정령이었다고. 자신은 이곳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나 뭐라나.

갑자기 정령이 멀리서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라크시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할 말이 있으면 진작 할 것이지, 헤어질 때가 다 되어서 들리지도 않게 외쳐대는 이유는 뭔가.

라크시스의 손짓에 정령이 순식간에 끌려왔다. 밀알만 한 얼굴에 흐릿한 표정으로도 정령이 당황한 게 빤히 보였다. 정령이 실 같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라크시스에게 왱왱거렸다. 줄곧 성가시단 표정이던 라크시스의 얼굴이 서서히 놀라움과 심각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카얄이 이곳을 찾기 전에도 별장 근처까지 왔던 자들이 몇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오래전에 공간왜곡 마법을 거의 풀어냈던 자가 있었다는군요.”

“…정말요?”

“수하를 대동한 젊은 여인이라 했습니다. 거대한 술식으로 아예 공간왜곡 마법 자체를 파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는데, 카얄과 관계가 있는 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로드리치 저택을 나설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뜻대로만 되는 건 아무것도 없나 보다.

별장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카얄을 제외하고도 또 있다니.

정령이 포르르 도망치듯 날아갔다. 뒤늦게 말해 미안하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다 이내 별장의 어둑한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정령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시야를 가득 메우던 벽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공터만 남아 허전해진 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별장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공간왜곡 마법이 다시 발동된 것이다. 처음 도착했던 모습 그대로, 저 멀리 작게 보이는 폐가를 보자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듦과 동시에 앞으로 풀어야 할 단서들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점점 미궁에 빠지는 것 같네요. 프레디 뮐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요.”

“시아, 발밑에.”

“아.”

생각에 빠져있다가 땅에 파묻힌 묘비를 잘못 밟고 미끄러졌다. 휘청이는 순간 단단한 팔이 시아를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라크시스는 시아의 팔을 제 손 위에 얹었다. 가만히 두었다간 또다시 넘어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지팡이를 자처하기로 했다. 시아는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별장 부지를 거의 벗어났을 때였다.

“거기 네 분.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낯선 이를 경계하는 듯한 불퉁한 목소리가 네 사람을 가로막았다.

“누구신데 이러시는지.”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일에 찌들대로 찌들어 거뭇한 눈과, 그와 대조될 만큼 깔끔하게 바짝 깎은 수염에서 깐깐한 경찰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의 뒤엔 부하로 보이는 경찰 두엇이 서있었다. 앞서가던 요르문이 바짝 날 선 태도로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춤의 배지를 들어 보였다.

“아, 전 브라이던힐 경찰청 북부 지부 소속 거스 벤슨 경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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