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2)화 (172/292)
  • 172화 

    “봉인의 존재를 밝혀도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당신에게 온전한 기억이 쌓이게 되는 순간까지.”

    시아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라크시스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언제부터 이 사람이 남의 눈치를 보게 됐을까.

    사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앞을 제외하곤 여전히 오만하고 당당하게 굴었다.

    시아는 미소 지었다. 지금의 모습이 모두 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화가 안 풀릴 수가 없다. 사실 애초에 화를 낸 적도 없었는데 말이야.

    “미안해하지 말아요. 라크도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뿐이잖아요.”

    라크시스의 손등을 가만히 도닥이자,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게 보였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라크시스는 봉인을 세 개나 찾아뒀으면서 왜 지금껏 처리하지 않고 보관해 뒀을까.

    “라크. 그러면 봉인을 찾은 후론 지금까지 줄곧 보관만 해온 거예요?”

    “방법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처리했을 겁니다.”

    라크시스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저로서도 불안정화의 가속화를 막는 것 빼곤 어찌할 도리가 없더군요. 시간 여행자인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그저 기다렸었죠.”

    그렇게 기다리던 중 시아가 다무스 지하 미궁의 봉인과 로렌시아호의 봉인을 보란 듯이 해결해 버린 것이다. 라크시스는 섬광에 휩싸이던 시아를 보고 그가 찾아둔 봉인을 건네야겠다고 확신했다 말했다.

    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지금 할까요?”

    라크시스가 옆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미스터 비렌체에게 들켜도 상관없다면요.”

    아, 여기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 시아는 요르문과 메이슨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라크시스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그와 나 둘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 이따 저택에 돌아가서 할래요. 일단은 프레디 뮐러의 일지를 마저 봐야겠어요.”

    “편하신 대로.”

    【 진실과 진심 】

    [고대의 신전을 찾으라. 무너지고 뒤덮여 종국에는 태고로 돌아간 사도를 찾으라.]

    이 말을 끝으로 회고록은 끊겨있었다. 낙서에 가까운 일기들이 간단한 날짜와 함께 간간이 적혀있었을 뿐 별 내용이 없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일기의 날짜도 점점 간격이 길어졌다. 그사이 요르문이 바닥 공간에서 발견한 연구 일지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곳에 적힌 날짜를 보니 아마도 봉인의 위치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 한동안 회고록 노트에 일기를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별 내용 없는 일기를 한참 넘기고 난 후였다.

    한참 일기를 읽어내려가던 시아가 멈칫했다.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내용을 가리켰다.

    “…미스 레베카 뮐러에 대한 일기예요.”

    [내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가멜에서 벌써 다섯 해가 넘게 자라왔다는 것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아이로 자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도 남들처럼 자식이 생긴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핏줄. 나의 아이. 가엾은 작은 뮐러. 나의 딸은 뮐러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같은 업보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간 사랑도 결혼도 포기하며 살았던 세월이 무상할 만큼 아이가 보고 싶어지고 만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마음인가.]

    [하루빨리 아이를 본국으로 데려와야 한다.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아이의 어머니 되는 여인은 이미 죽었고, 그 후로 아이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들었다. 가멜은 어린 여자아이 홀로 지내기엔 위험한 곳이다. 내가 직접 가멜에 가봐야겠다.]

    눌러쓴 글자마다 프레디의 마음이 뚝뚝 흘러나왔다. 환희와 비통. 신의 종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자식이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그토록 바라왔으나,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던 생명.

    시아는 나직이 말했다.

    “프레디 뮐러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어요.”

    “자식이 본인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랐던 거였군요.”

    평생을 홀로 살아온 라크시스는 프레디의 일기를 보며 그의 감정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수천 년을 살아오며 비극이란 비극은 어지간히 목격해 온 라크시스였다. 고작해야 물방울 수준의 활자들로는 오랫동안 메말랐던 가슴을 적시기엔 한없이 부족했으나,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이유 모를 울렁거림을 느꼈다.

    묘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아이를 찾았다. 아이를 보는 순간 이름을 레베카로 정해버리고 말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꼭 닮아, 나의 핏줄인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함께 간 슈펜타인 소위도 레베카와 내가 닮았다고 했다. 닮았다는 말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아이의 엄마도 찾아내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니하. 내게 작은 선물을 주고 떠난 여인. 그녀에게 난 본국 출신의 무책임한 남자였을 터다. 레베카를 배 속에 품은 채 날 원망했겠지. 이제라도 그녀의 명복을 빌어본다.]

    그 후로 프레디는 한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다. 내용의 대부분은 레베카와 함께 보낸 시간으로 가득했다.

    레베카는 프레디가 본인을 버린 줄 알고 원망했다 했는데. 프레디의 시선으로 바라본 레베카의 세월은 따스한 부정과 가슴 아픈 사랑으로 가득 차있었다.

    시아는 묵묵히 일기를 읽어나갔다. 원래 시대의 요르문 님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만다.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 어땠더라. 괜히 눈물이 찔끔 나왔다.

    노트를 넘기던 라크시스가 멈칫했다.

    [3512년 1월 5일]

    “…프레디가 죽기 직전이군요.”

    3520년인 이 시대를 기준으로 약 팔 년 전. 프레디 뮐러가 경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뜨기 약 삼 주 전이었다. 이는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에서 처음으로 이상 마류를 탐지했던 시기와도 거의 일치했다.

    [마침내 오랜 업이 끝났다. 위대하고도 불안정한 존재가 있는 곳을 모두 알아냈다. 아르카나, 지르가나, 뤼스, 에이즈번, 술란……. 지긋지긋하고도 신성한 과업이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젠 나도 레베카도 순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레베카가 나와 같은 짐을 짊어질까 잠 못 이루지 않아도 된다.

    이다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명하신 대로 사도를 모두 찾았으니,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두면 당신의 형제는 머지않아 멸망하고 말 것이오. 그러니 신이여, 답을 주소서. 신이여, 사도 나타ㅇ―]

    문장이 뚝 끊겼다. 누가 펜을 빼앗아간 것처럼, 칼로 베어낸 듯 잉크가 날카롭게 번져있었다.

    그 밑엔 전혀 다른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에게 오라. 갈리프의 죄악이여. 네가 본 것을 전능한 어둠에 고하라.]

    시커먼 잉크로 수없는 동그라미를 그린 페이지가 섬뜩했다.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친 자의 흔적 같았다. 아아악! 나가! 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 거친 펜 자국으로 남은 글씨는 모두 절규뿐이었다.

    [작은 영혼이여. 미물이여. 육신을 넘겨라. 네 모든 것을 어둠에 바쳐라.]

    그 후론 온통 엉킨 실타래 같은 잉크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침묵했다.

    “…카얄이 프레디 뮐러에게 저주를 걸었던 모양이군요. 그가 봉인의 위치를 모두 찾아냈단 걸 어떻게 알아냈나 봅니다.”

    죽기 직전 자꾸만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말했던 프레디 뮐러. 레베카는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을 거라 말했다. 프레디 뮐러가 난데없이 경비행기를 타고 북부로 갔던 것도, 그곳에 있을 봉인을 카얄보다 한발 먼저 손에 넣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레디 뮐러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던 거네요. 죽은 프레디 뮐러는 저주에 끝까지 저항했고요.”

    괴짜의 죽음. 그가 추락하는 경비행기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음에도 시체로 발견된 건 아마도 카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헐벗은 동사자로 발견된 프레디 뮐러를 그저 어리석은 죽음을 택한 괴짜 대부호라 칭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3512년 1월 12일

    악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젠 그를 거부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악령의 소리가 들린다. 그가 날 찾아내고 말 것이다. 나의 뇌를 끄집어내고 모든 지식을 난도질해 종국에는 레베카마저 찾아내 제물로 쓰고 말 것이다.]

    [3512년 1월 20일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위대하신 나타여. 위대하신 나타여. 종말이 보인다. 세계의 종말이 다시 한번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 어둠, 어둠. 그들이 뮐러가에 왔다. 사특한 것들이 저택의 안까지 스며들어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엊그제엔 마부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원사가 그를 죽였는데, 정원사는 경찰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인이 어디를 다녔는지 말을 해주지 않아 마부를 죽였다, 고.

    사방에 눈이 있다. 삿된 어둠이 저주로 나를 옥죄어 온다. 모든 곳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살한 건지, 살해된 건지 알 길이 없다. 레베카가 위험하다. 이대로 가다간 레베카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도 없다.]

    [3512년 1월 26일

    어둠의 수족들이 뤼스를 장악했다. 도처에 그의 수하들이 기어 다니고 있다. 반지의 힘을 빌려 별장의 정체를 숨기곤 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이 자꾸만 별장 근처를 맴돌고 있다. 경찰에 사유지 보호를 요청했으나, 경찰조차 저주에 걸려있었다. 별장의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연구실을 옮길 때가 온 것 같다. 가문의 반지를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어디에 두어야 삿된 어둠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3512년 1월 29일

    신이 울부짖는다. 괴롭다. 종말이 자꾸만 보인다.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결국 종말을 막지 못하게 되었나 보다. 밖에 어둠이 가득하다. 더 빨리 피했어야 하는데. 이젠 레베카와 반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할 때다.

    신의 음성이 들린다.

    태고의 주인을 기다려라. 그분이 너를 구원할 것이니. 삿된 어둠이 길을 잃게 하라.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프레디는 결국 태고의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시아는 사도 나타가 프레디를 통해 남긴 말을 되뇌었다. 나타가 애타게 찾던 태고의 주인은 다름 아닌 갈리프, 즉 시간 여행자인 시아 켈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