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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1)화 (171/292)
  • 171화 

    그런 라크시스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이었다.

    “시아. 사실 이 시대엔 마정석 광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연 엄청난 사실을 고백해 왔다. 처음엔 라크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뒤늦게 그가 뱉은 문장의 의미를 깨닫게 된 시아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정석 광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니. 그 사건은 칠십 년 후에도 종종 회자될 만큼 상당한 사상자를 낸 비극으로 꼽혔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됐다고?

    라크시스의 시선이 무저갱의 바닥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얼핏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나, 시아는 지금 그가 과거의 사건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보다 더 거대한 비밀을 꾹 다문 입 속에 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라크시스는 품을 뒤적였다. 시아의 슈트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공간이 무한정인 그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두 손 크기의 묵직한 보석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생김새였다.

    “…이거 현자의 별 보관함 아니에요?”

    “눈썰미가 좋네요.”

    라크시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상자의 표면이며 모서리에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설마 진짜로 현자의 별 보관함이란 말이야? 우리가 훔치려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 현자의 별 보관함?

    “이걸 라크가 어떻게 갖고 있어요? 설마 또 훔친 거예요?”

    훔쳤냐는 말에 라크시스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훔치긴요. 이건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정확히 말하자면 선대 백작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가 제게 준 물건입니다.”

    그가 은근하게 보관함을 내밀었다.

    “열어보시겠습니까?”

    “라크가 제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게 이 안에 들어있는 건가요?”

    라크시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보관함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질 않으니,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한데.

    시아는 조심스럽게 보관함을 받아 들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건 봉인이잖아요……!”

    기이한 광채가 맴도는 광물이 검은 덩어리를 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마정석이나 보석 따위로 오해할 소지도 없었다. 무생물에 잠들어 있다는 표현을 누가 쓰겠나. 광물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광물이 아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모양새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누가 봐도 봉인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찾았어요?”

    하마터면 메이슨이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리 지를 뻔했다. 솔직히 소리를 안 지른 게 용하지.

    시아는 봉인과 라크시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봉인의 광채만큼이나 눈부시고 오묘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라크시스가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보관함에 들어있던 봉인이 바깥 공기를 느끼고 움찔거렸다. 시아는 손가방을 건 팔뚝이 무겁게 떨리는 걸 알아챘다. 동시에 삐― 하는 소음이 그녀의 팔과 저 멀리 요르문에게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메이슨과 함께 책장 밑 비밀 공간을 뒤적이고 있던 요르문이 인상을 쓰며 주머니에서 마류 탐지기를 꺼냈다. 계기판의 바늘이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며 버튼에 하얀 불을 밝혔다.

    “응? 뭐야. 이게 왜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요르문이 라크시스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라크, 자네! 그걸 지금 여기서……!”

    보관함 안에서 무지갯빛 마력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보관함이 완전히 닫혀있어야 봉인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요르문이 당장 이쪽으로 달려올 기세라, 시아는 얼른 보관함을 닫아버렸다.

    “…봉인이 맞긴 한가 보네요. 그것도 요르문도 다 알고 있는 봉인이고요.”

    정말이지 이 남자가 꾸미는 계획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시간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광룡의 봉인을 찾는 것 아니던가. 봉인이 그리 쉽게 찾아지는 것이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고생하며 마도 시대를 헤집고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라크시스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봉인을, 그것도 세 개나 찾아두었다. 시간 여행이라는 힌트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이래서 보일러실에서 제게 봉인 찾기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거였네요.”

    이미 봉인을 찾아두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거다. 온전한 봉인이 그의 손에 있었으니까.

    라크시스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시아가 눈빛으로 추궁했으나,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말을 고르던 라크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세의 다무스로 갔던 그때, 전 과거의 제 자신에게 단서를 남겼습니다. 광룡의 부활을 막기 위해 먼 미래에서 시간 여행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백삼십 년 전, 다무스의 지하 미궁에서 아스타의 망토 단추를 뜯어내 중세의 자신에게 보냈던 계획은 성공했다. 찜찜한 걸 참지 못하는 자신은 실제로 아스타를 찾아가 단추의 정체에 대해 캐물었고, 대륙 곳곳에 잠든 광룡의 봉인이 머지않아 파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스타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중요했던 건 다름 아닌 3517년에 제게 찾아온다는 시간 여행자의 정체였다. ‘신과 가까운 자’라는 은발의 여인.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라크시스는 백작성의 주인이 아스타에서 레오나로 바뀌는 긴 시간을 홀로 버텨왔다.

    “그래서 당신이 기억하는 우리의 첫 만남과 실제로 일어났던 우리의 첫 만남은 달라지게 됐죠. 당신이 어째서 바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번 시간대의 전 당신을 줄곧 기다려왔습니다.”

    라크시스는 보관함을 만지작거렸다.

    “미래를 알고 있던 중세의 저는 3517년에서 만나게 될 당신을 위해 여러 가지를 계획해 두었죠. 이건 그중 하나인 거고요.”

    “…이것들 모두가 진짜로 봉인이라고요.”

    시아는 그녀가 본 것들이 봉인인 걸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보관함을 내밀었다.

    “카얄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닥쳐올 운명을 미리 알게 된다면, 이를 바꾸지 않고 내버려 둘 자는 얼마나 될까. 시아가 과거를 바꾸려 했던 것처럼, 오래전의 라크시스도 과거를 바꾸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서 보관함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현자의 별 보관함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갔다. 아무리 적국의 백성이라도 아스타라면 광룡의 봉인으로 고통받게 될 무고한 제국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을 찾아온 중세의 라크시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감쪽같이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이렇게 중요한 건 파트너인 내게도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시아는 라크시스가 하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는 봉인에 대해 하나하나 캐물었다.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여기 세 개의 봉인 중 하나는 마정석 광산에서 발견되었단 뜻이겠네요.”

    “맞습니다.”

    “저와 3517년에 만나기 전에 마류 이상 현상을 발견했던 두 곳이 지르가나와 술란이랬으니, 남은 둘 중 하나는 술란에서 발견된 봉인이겠고요.”

    “정확하군요.”

    라크시스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아가 따박따박 물어오는 것도, 묻는 족족 정답만 말하는 것도 기특하니 사랑스러웠다.

    “술란에서 발견된 봉인은 인어의 눈물이란 별칭을 갖고 있던 저주받은 보석이었습니다. 봉인을 찾아다니던 중 마침 전주인이 죽어 보석이 경매장에 올라왔기에 냉큼 사버렸죠.”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뭐예요?”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현장에서 발견한 봉인입니다. 출처를 확인해 보니, 에이즈번의 갈리프콜 광산에서 섞여 들어온 것이더군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 미리 현장을 돌아다니며 찾아두었죠.”

    그래서 세 개인 거였어. 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라크시스가 본인이 모아둔 봉인에 대해 지금껏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한들, 그가 발 빠르게 찾아두지 않았다면 이 봉인들은 진작 폭발해서 사라져 버렸을 터다.

    게다가 지르가나나 술란의 봉인은 시아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파괴되었던 봉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일기장을 통해 다가올 종말이며 봉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곤 하지만 3517년 이전에 나타났던 봉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시아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고마워요. 어쨌든 라크시스 덕분에 종말이 다가올 가능성이 줄었으니까요.”

    이번에도 라크시스가 옳았다. 슈나이더를 부추겨 소설을 예정보다 일찍 출간하게 만든 것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에게 손해가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찾아둔 봉인 세 개도 마찬가지였다. 시아에겐 지금껏 봉인을 찾아두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라크시스 덕분에 지금 온전한 봉인을 세 개나 손에 넣게 된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미안해요.”

    “갑자기요?”

    시아는 당황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라크시스가 갑자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미리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바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아, 그것 때문이었나. 라크시스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토라졌는지, 왜 서운해했는지. 그에겐 다 보였나 보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가 중세의 저에게 그러더군요. 미래에서 온 이방인은 시간 여행의 기억이 온전치 않아 괴로워했다고요.”

    아스타의 귀에 시간 여행자라는 내 정체가 흘러 들어가게끔, 그녀의 정령이 든 등불을 들고 루드윅과 대화하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루드윅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었지. 내가 알던 과거가 나도 모르는 새 바뀌었는데, 정작 시간 여행자인 나는 바뀐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몹시 힘들었다고. 그럼에도 난 다무스에 우두법을 알려주겠다며, 과거를 바꾸겠다고 선언했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것만큼 최선의 선택은 없으니까.’

    그런데 아스타가 이런 내 얘기를 라크시스에게 그대로 전했던 모양이다. 라크시스가 내게 봉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결국 나의 업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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