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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0)화 (170/292)
  • 170화 

    시아가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멈췄다. 라크시스는 그녀가 왜 머뭇거리는지 알아챘다.

    “잠깐만 쉬었다가, 아뇨. 더는 못 읽겠어요. 라크, 당신이…….”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까 계속 읽어줘요.”

    “…알았어요. 어차피 다 읽어봐야 하긴 하니까. 그런데…….”

    [하얀 마법사. 영원할 것 같던 마법사가 패배했다. 광룡이 죽었으나, 그도 죽었다. 검은 괴한이 라크시스 옌을 찌르자 검붉은 것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저렇게 피를 쏟고도 움직일 수 있는가.]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라크시스 옌의 희생으로 광룡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역사서의 한 줄로만 배웠을 뿐이다. 종말의 현장에서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싸웠는지, 얼마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적나라한 묘사가 고대 마법사의 죽음을 실감 나게 그렸다. 검은 괴한이 연단에 선 라크시스 옌을 칼로 찌르자, 라크시스가 그대로 허물어졌고 곧바로 하늘이 갈라지며 광룡이 나타났다 한다. 검은 괴한은 아마도 카얄이겠지. 지금은 발자크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배신자 사도 말이다.

    한 팔을 잃고도 광룡에 달려들었던 고대 마법사. 이 구절을 더 이상 넘어서지 못하고 시아는 숨을 헐떡거렸다.

    위급 환자를 맞이하는 게 일상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죽어가는 라크시스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예전이었다면 그저 비극적인 역사의 일부라고만 여겼을 텐데. 이젠 그가 죽는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라크시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시아. 미래는 바뀔 수 있어요. 당신이 날 구해줄 거잖아요. 그렇죠?”

    “…제, 가 라크를요.”

    “네. 시아, 당신이요. 당신은 종말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왔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요. 이건 그저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에요. 그러니 안심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가만히 붙잡아 주었다. 뒤늦게 시아는 자신의 숨이 과호흡에 가깝게 불안정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또다시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눈길로 라크시스가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살아있는 자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목을 잡았다. 불거진 핏줄을 따라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까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말도, 광룡의 부활도, 라크시스의 죽음도. 그 무엇도 정해진 건 없었다.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었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 제국은 황혼을 지나 완전히 저물어버렸다. 제국뿐이랴. 이 자그마한 별에 존재하던 마법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

    [모든 것이 멈췄다. 공장의 연기도, 컨베이어 벨트도, 증기 마차도, 황금을 실은 무역선도 모두 멈췄다. 오로지 인간만이 남은 시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광룡보다 더한 공포로 죽어갔다. 거리는 부랑자로 전락한 마법사들로 가득했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물가에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잔느 강에 몸을 던졌다. 정부가 붕괴한 나라가 속출했다.]

    [내가 사랑하던 이 땅이, 이 나라가 지옥으로 변했다. 이런 것이 머지않아 닥쳐올 미래라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반지가 빠지지 않았다.

    신의 음성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도 나타. 신은 내게 말했다. 미래를 보았다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처음에는 내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며 도피했다. 그러나 끔찍한 미래는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신은 내가 당신의 음성에 답할 때까지 불타는 제국을 보여주었다. 수일을 미치광이처럼 바닥을 구른 후에야 나는 신의 종이 되겠노라 맹세했고, 신은 내게 자유의 족쇄를 선물했다.

    신은 내게 명했다.

    고대의 신전을 찾으라. 무너지고 뒤덮여 종국에는 태고로 돌아간 사도를 찾으라.]

    “…이래서 그런 책을 보고, 저렇게나 바람장미를 그렸던 거였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아의 혼잣말에 라크시스가 나직이 물어왔다.

    “아까 저 구석에서 찾은 책에서 본 내용이에요. 바람장미에 적혀있던 지명이 이 책에 그대로 나와있었어요. 아마도 여기의 모든 바람장미들은 바람이 아닌 마력 파장을 나타낸 그래프일 거예요.”

    라크시스는 시아가 건넨 책을 받아 들었다. 검은 별의 파장을 연구한 신화학자의 자료들이 어딘가 낯익었다. 바람장미의 형태는 아니나, 그도 이와 비슷한 수치의 파장을 발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시아가 마도 시대에 최초로 도착했던 3517년보다도 오 년이나 이른 3512년. 라크시스는 본인 소유의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에서 처음 보는 형태의 마류를 맞닥뜨렸다. 그 마류가 딱 이것과 같은 굴곡의 기이한 그래프를 그렸더란다.

    그리하여 라크시스는 당시 요르문과 함께 마류를 연구하며, 지금껏 대륙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었던 이 현상을 마류 이상 현상이라 처음으로 명명했었다. 그 원인을 신화 속 봉인이라든가, 미지의 검은 별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상상 밖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상한 정보를 담고 있던 바람장미의 비밀이 마침내 풀렸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프레디 뮐러는 당신이 이곳에 오기 훨씬 이전부터 봉인을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이 지역 중 아르카나와 다무스는 우리가 실제로 봉인을 발견한 지역이기도 하고요.”

    “지르가나와 뤼스, 에이즈번, 술란도 포함되겠군요.”

    모든 단서가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시간 여행의 거대한 흐름이 한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봉인이 있을 지역을 연구해 놓은 자료라니. 정말로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프레디 뮐러의 바람장미를 분석한다면 다가올 시간 여행을 완벽하게 예측해 낼 수도 있을 터다. 그렇게 된다면 마도 시대의 운명을 바꾸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문득 라크시스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뤼스야 프레디 뮐러의 별장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나머지는요? 아직 지르가나나 에이즈번, 술란에는 가보지도 못했는걸요.”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시아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던졌다.

    “시아. 혹 일기장 속의 당신이 몇 번이나 시간 여행을 하는지 기억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아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그러게. 구체적으로 몇 번이었더라. 일기장을 읽어본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시아는 손가방을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잠시만요……. 어? 저택에 두고 왔나?”

    “자, 이걸 찾으시는 듯한데.”

    눈앞에 짙은 보라색 양장 노트가 불쑥 들이밀어진다. 노트를 쥔 길쭉한 손가락도 함께 보였다. 애타게 찾던 일기장이 라크시스의 손에 들려있었다. 저택에 두고 온 게 맞았던 모양이다.

    “이젠 척하면 척이네요.”

    “제가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기는 합니다.”

    라크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아는 피식 웃었다.

    “네에. 그런 걸로 해요.”

    시아가 일기장을 채 훑어보기도 전에 라크시스가 입을 열었다.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은 봉인이 모두 아홉 개라고 했었죠. 그런데 그녀의 시간 여행은 고작해야 일곱 번 진행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일곱 번이었구나. 시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라크시스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러게. 왜 일곱 번이지?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요.”

    라크시스가 물었다.

    “시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다니까요?”

    라크시스 옌과 시아 켈튼의 첫 만남. 지금이야 허물없는 농담도, 묘한 열기도 주고받는 사이라지만 그때의 두 사람은 수상한 사기꾼과 그런 사기꾼을 엿 먹이려는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라크시스가 능글맞게 말을 받아쳤다.

    “잊을 수 없었다니. 제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런 거 말고요! 라크가 절 속여서 요르문과 만나게 했었잖아요.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죠?”

    “…그때야 당신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신이 내 입장이었어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겁니다. 아무튼 미도리 셰프 식당에 들렀던 것보다 훨씬 이전에, 당신과 제가 인부 쉼터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말입니다.”

    라크시스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찾아냈는지 궁금하진 않으셨습니까?”

    어라. 그러게. 라크시스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어딘가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그때의 라크시스는 새하얀 예식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 말인즉 고대 마법사의 지위를 드러낼 만큼 중요한 행사에 참석 중이었단 말인데, 왜 공사장 인부 쉼터에 그가 있었던 걸까?

    “당신이 나타났던 인부 쉼터에서 이상 마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 주변의 이상 마류와 봉인의 이상 마류가 다르다는 걸 뒤늦게 알긴 했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저희는 쉼터에 나타난 당신이 마류 이상 현상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저희라면……. 요르문이군요.”

    “네. 당신이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저와 요르문은 마류 이상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이상 마류를 두 번이나 발견했었죠.”

    “그렇다는 건 제가 오기 전에 이미 봉인이 두 개나 파괴되어 있었다는 말이네요.”

    그래서 일기장 속 시아 켈튼의 시간 여행이 일곱 번밖에 되지 않았던 거였구나. 왜 하필 두 개의 봉인이 파괴되고 나서야 시간 여행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 그의 설명으로 앞뒤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라크시스는 봉인이 파괴되어 있었다는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빛이 서렸다.

    “두 번의 이상 마류가 발견되었던 곳이 바로 북부의 지르가나와 남부의 술란이었습니다.”

    북부 마정석 광산 파괴 사건. 라크시스의 입에서 나온 사건은 시아도 역사 속 참극 중 하나로 이미 들어보았던 이야기였다. 채광 과정에서 마정석 매장량이 계획에 비해 증가하게 되자, 새 구역을 지정하여 시추 탐사를 하던 중 원인 모를 폭발로 인해 일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참사였다.

    원인 모를 폭발이란 말에 시아는 단번에 눈치챘다.

    “그렇다면 프레디 뮐러가 난데없이 경비행기를 몰고 북부로 향했던 것도…….”

    “봉인을 찾으러 갔던 것이었겠죠. 카얄은 그런 프레디를 뒤쫓았고요.”

    라크시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시아와는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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