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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6)화 (166/292)
  • 166화 

    요망한 남자 같으니.

    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코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흐음, 라크시스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래서 뭘 사용하게 해주겠다는 건데요.”

    시아는 여전히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라크시스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저를요. 오직 당신만이 이용할 수 있는 스크롤 말입니다.”

    그러나 라크시스와 시아가 실제로 뤼스에 도착한 건 다음 날이었다. 연착으로 악명높은 제국의 열차 탓이었다. 예정된 시간표와 전혀 다르게 운행되고 있는 열차 때문에 시아는 한참을 매표소 근처에서 서성이며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라크시스는 차라리 느린 마차를 타고 중간중간 쉬어가는 게 더 빨랐을지도 모르겠다며 툴툴거렸다. 그 말에 웃음이 터진 건 시아였다.

    결국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뤼스행 열차표를 예매하고 켈튼저로 돌아왔다. 시아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봉인을 이미 두 개나 찾아서일까. 마음이 한결 놓이는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둘이었던 일행이 넷으로 늘었다. 뤼스로 간다는 말에 요르문이 재깍 따라나선 것이었다.

    “누님께서 절 살리신 거라니까요? 누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끔찍한 봉투 더미에 파묻혀 있었을 거예요.”

    가족 문제. 이것만큼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핑계가 또 어디 있으랴. 며칠째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장과 수석 연구원을 찾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와중에 시아가 뤼스로 간다 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요르문은 갈리프콜 엔진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들의 연락을 피해 회사에서 도망쳤다. 술란에서 온 친척 누님의 핑계를 대며 말이다.

    모르간 근교의 뤼스는 기차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 이번 역은 뤼스, 뤼스 역입니다. 내리시는 승객 여러분께서는 두고 내리는 짐이 없는지…….

    톤이 일정한 목소리가 역사의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승강장에서 깃발을 흔드는 역무원은 아르카나 중앙역과는 그 수부터 달랐다.

    네 사람을 뱉어낸 열차가 하얀 증기를 뿜으며 떠나갔다. 새카만 몸을 이끌고 열차가 요란스레 사라지자 승강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만이 열차에서 점점이 내리는 승객을 반겼다.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적은 조그마한 역사는 전원적인 뤼스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별장을 지으면 딱 좋을 것 같은 분위기이긴 하네.”

    요르문이 허리를 이리저리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라크시스가 그를 따라 내린 남자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꼬리가 길군.”

    마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메이슨 비렌체였다. 애초에 미스터 비렌체까지는 데려올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메이슨만 버리고 올 수도 없잖아?”

    혼자 내버려 뒀다간 무슨 서류에 서명을 해버릴지 모르는걸. 메이슨의 발명 실력은 믿으나 마냥 순진하기만 한 그의 성격을 믿지 못했던 요르문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한편 메이슨은 조용한 역사가 신기한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뤼스는 처음이에요. 사실 수도를 벗어난 적도 처음이긴 한데요.”

    배곯으며 살았어도 수도 출신은 수도 출신이라 이거다. 메이슨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시골 풍경을 신기하게 감상하다가, 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아를 발견했다.

    “레이디도 처음이세요?”

    “네, 저도 뤼스에는 처음 와봐요.”

    나만 처음이 아니었구나. 메이슨은 시아의 대답에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한적한 소도시엔 역 앞을 오가는 삯마차도 적었다. 포장이 되다 만 길을 삯마차가 덜덜 거리며 굴러왔다. 엉덩이가 배는 아프겠지만, 선택지가 따로 있으랴.

    “아유, 한 번에 손님을 이리 많이 받는 것도 오랜만이로구먼?”

    두당 삯을 받는 마부가 횡재했다는 듯 손님을 맞이했다. 게다가 차림새도 좋아 뵈니, 팁도 두둑이 줄 게 분명했다. 시아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행선지를 말했다.

    “뮐러가의 별장으로 가 주시겠어요?”

    그때였다.

    어깨춤을 추며 문을 닫던 마부가 문을 붙든 채로 멈췄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 좋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마부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런 델 대체 왜 가려는 거요?”

    마부는 악마라도 발견한 것처럼 네 명의 손님을 훑어보았다. 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도르르 굴렸다.

    “어……. 그 별장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거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데. 그 별장 주인이 팔 년 전에 죽어버린 이후 발길이 끊어졌단 말이오.”

    마부는 별장을 상상하기만 해도 무서운지 몸서리를 쳤다.

    “얼마 전엔 한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까지 했지. 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물건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렸지 뭐요.”

    일주일쯤 전이었을 거다. 유난히 뤼스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던 날이다. 밤 열차를 타고 뤼스로 내려온 일가족을 태워주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평소였으면 지나가지 않았을 길인데, 빨리 쉬고 싶었던 마음에 별장 옆길을 냅다 달리던 그때. 마부는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을 들었다. 프레디 뮐러가 살아있을 때도 가끔 별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런 소리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굉음이었다.

    “거길 드나들던 영주도 영 이상한 자였지. 그런 땅을 사서는……. 돈 많은 괴짜라더니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니까.”

    마부는 혀를 차다가, 문득 레이디 하나를 빼곤 모두 실크햇을 눌러 써서 눈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수상한 외지인이 부쩍 늘어난 참이다. 아르카나 같은 관광지나 유흥지도 아닌데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 얼마 전에도 여기 레이디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왔었지. 지금처럼 음침한 수행원을 대동하고 말이야. 뻘건 옷을 뒤집어쓴 게, 점쟁이였나 뭐였나.

    진기한 잔재주를 지녀서 한동안 마을 광장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그 여자의 마술을 보고 기절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댁들은 뉘쇼? 거 수도를 뒤집어 놨다던 이단이라도 되쇼?”

    뜬금없는 이단 소리에 사고가 잠시 멈췄다. 난데없는 오해였으나 시아는 마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마차에 앉은 네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아뇨, 이단이라뇨. 설마… 혹시 이단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세요?”

    “아녀, 암것도 몰러. 그런 건 물어보지 말어!”

    강한 부정이 오히려 수상쩍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곁눈질했다. 황혼 국교회에 관한 조사 자료 중에 뤼스에서 벌어진 사건도 있었냐는 물음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입 모양으로 대답한 라크시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프레디 뮐러는 카얄과 관계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이다. 그의 별장을 찾으러 왔다가 이게 웬 단서란 말인가.

    “어쨌든 난 안 갈 거요. 다른 마차를 찾아보시구려.”

    거기 가 줄 삯마차가 있기나 할는진 모르겠지만. 마부는 재수가 옴 붙었단 얼굴로 침 뱉는 시늉을 하며 시아 일행을 끌어냈다. 아니,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일 분도 채 되지 않아서 말이 우렁차게 울었다.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와 어우러져 바퀴가 대강 포장이 된 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이리저리 틀며, 마부가 혀를 끌끌 찼다.

    “제기럴……. 내가 미쳤지.”

    다른 손님이었으면 그런 덴 안가겠다며 거부했을 텐데. 하지만 고작해야 불길한 소문만 도는 곳이다. 나만 안 들어가면 그만이지.

    마부는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빛나는 은발을 자랑하는 고대 마법사가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우릴 태워주면 삯의 열 배를, 군말 없이 지금 당장 출발하면 삯의 스무 배를 주지. 가주겠나, 미스터?’

    레베카가 말했던 별장은 뤼스 역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뮐러가의 영지가 시골 중에도 시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장원 시절에는 넓은 농경지를 가진 부유한 땅이었을 텐데. 마도 공학과 산업이 발전한 마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로 젊은이들을 모두 빼앗긴 한적한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뤼스 역에서 마차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더 이동했다. 시아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시아.”

    “고생은 다 같이 했죠. 이렇게 멀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나 마차에서 내린 네 사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레베카의 말에 따르면 죽은 프레디 뮐러는 영지 중 농지로 쓰이던 땅을 통째로 매입하여 작은 별장을 지었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회사의 주인이나 되는 사람이 별장을 지었다면 호화롭거나 못해도 번듯할 거라 생각했는데.

    “별장이라기엔 좀 황량한데요.”

    실제로 목격한 별장은 별장은커녕 다 쓰러져 가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이런 작은 건물이 주택가 한가운데에 거대한 부지를 차지하고 들어서서는 별장이라고 불렸던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관리되지 않아 잔뜩 우거진 풀숲에 그간 비바람이라도 맞았는지 쓰러진 고목이 길을 막고 있다. 홀로 우뚝 솟은 별장의 외벽을 덩굴이 잔뜩 덮고 있었다.

    “프레디 뮐러가 죽은 지도 벌써 팔 년이 지났으니까요. 아무도 여길 관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라크시스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 흔한 정원도 담장도 없었다. 담장이 있었던 흔적조차 없다. 별장 하면 으레 갖추고 있을 법한 시설들이 하나도 없었다.

    애초부터 허허벌판에 작은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놓은 게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 드나들면서 딸에겐 별장에 간다고 했단 말인가.

    라크시스는 마구잡이로 자란 풀을 지팡이로 헤치며 부지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마력이 많군요.”

    “설마 또 봉인일까요?”

    마력이라는 말에 긴장한 시아가 물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재킷과 바지 차림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봉인 주변에서 발견되는 이상 마류와는 다른 현상이거든요.”

    라크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마력을 읽어냈다. 주변을 살피니, 울창한 나무 너머 가까운 곳에 높게 솟은 지붕이 가장 먼저 보였다. 외관을 보아하니 중세 때부터 뤼스에 자리하고 있었던 국교회의 교회인 것 같다.

    ‘농지를 매입했다는 말은 거짓이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덕을 이런 데서 본다. 중세를 몸소 겪어온 라크시스에게 장원의 구조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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