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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5)화 (165/292)

165화 

‘경비행기 사고가 나기 전에도 아버지는 뤼스에 계셨어요. 그러다 한밤중에 수도로 급히 올라오셔선 제게 당장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미워했었죠. 보시면 알겠지만, 전 가멜인의 피가 섞여있는 아이였으니까요. 절 버렸다고 생각해서 원망도 많이 했어요.’

회상이 괴로운지 레베카가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아버지는…….’

레베카는 프레디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경비행기 사건이 벌어지기 몇 주 전부터 프레디는 정신이 나가있었다. 뤼스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었고, 가끔가다 돌아오는 날엔 깊게 잠들지 못하고 한밤중에 깨어, 자꾸만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시아는 직감했다.

프레디 뮐러는 카얄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바로 뮐러가의 가주 반지, 그 위에 달려있던 광룡의 봉인 때문이었다.

‘이상한 말도 반복하셨죠. 마치 주문처럼요. 악령이 들린 사람처럼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셨어요.’

‘혹시 그 말이 이거였나요? …시그무스 아 함 나타(위대하신 나타여).’

‘마, 맞아요. 정확해요!’

시아는 라크시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아는 손가방에서 자그마한 벨벳 주머니를 꺼내 풀었다. 그을린 자국이 남은 동그란 금속을 모두의 앞에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반지는 역시 미스 뮐러의 것이겠네요.’

그러나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밀레이나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난 것이다. 티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찻잔이 나뒹굴었다. 밀레이나의 드레스 자락에 거뭇하게 홍차가 스며들었다.

정작 레베카는 반지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레이디 로드리치께서는 이게 뭔지 아시는 모양이군요.’

시아는 밀레이나의 눈앞에서 반지를 도로 낚아챘다. 시아의 손바닥에 있던 반지를 가져가려던 밀레이나의 손이 허공에서 휘청였다. 체통도 잊고 몇 번을 더 손을 휘적거리고 나서야, 밀레이나는 시아에게서 반지를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다.

밀레이나는 시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아도 만만찮은 기백으로 밀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언의 기 싸움에 묵직한 적막 속,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애초에 반지를 가진 사람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최종 승자는 시아였다. 밀레이나는 결국 고백하듯 실토했다.

‘…그 반지는 레베카가 뮐러가의 핏줄을 이었다는 걸 증명해 줄 유일한 수단일세.’

폭발했던 광룡의 봉인을 받치고 있었던 금속의 정체는 라크시스가 추측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뮐러가의 가주에게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반지. 그러나 프레디 뮐러는 생전에 이 반지를 끼고 다닌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미스 뮐러는 이 반지를 보고도 반응이 없었나 보네.’

밀레이나는 프레디 뮐러가 죽기 전 제게 레베카를 맡기러 와서는 이 반지를 레베카와 함께 숨겨주기를 청했다고 한다.

자신이 현재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으며, 괴한이 기이한 힘의 반지와 뮐러가의 후손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레베카와 가주의 반지가 그의 눈을 피해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분명 저택의 지하 금고에 숨겨두었는데 그게 어떻게 여기에…….’

황급히 지하 금고를 살펴보고 온 밀레이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언제 털렸는지도 모를 만큼 금고가 감쪽같이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물건이 오직 뮐러가의 반지 하나뿐이었다는 사실도 밀레이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괴도 흑장미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하게 이루어진 절도였다.

‘일단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네. 그 반지가 장물인지 아닌지. 정말로 레베카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물건인지 말이야.’

‘그걸 어떻게 확인하실 수 있으신지…….’

‘이게 진짜 뮐러가의 반지라면 오직 레베카만이 주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후 벌어진 일은 정말로 놀라웠다. 옆의 메이드에게 반지를 껴보게 하라는 밀레이나의 제안에 따라, 시아는 근처의 아무나를 붙잡고 뮐러가의 반지를 껴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반지를 받아 든 메이드들이 하나같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도무지 낄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마치 자석의 극과 극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반지가 제 손가락을 거부하는 것 같다고 한다. 억지로 껴보려다가 비명을 지르며 반지를 놓친 이까지 있었다.

밀레이나는 결국 시아가 가져온 반지가 제 금고에서 사라진 진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가 꼭 맞는 신발을 신는 사람처럼 반지를 아주 편하게 손가락에 끼웠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자신도 반지를 편하게 끼웠다가 뺐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시아는 덧붙였다.

‘혹시라도 저희를 반지 도둑이라 생각하신다면, 그건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자네들이 도둑이 아니란 건 알고 있네. 세상 어느 도둑이 훔친 물건을 뻔뻔하게 주인 앞으로 가져오겠나? 그것도 그렇게 어마어마한 물건을 훔쳐놓고 말이야.’

밀레이나가 말했다.

‘원랜 여기에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있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이 반지를 손에 넣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혹시 자네들이 이 반지를 발견했을 때부터 반지가 이 꼴이었나?’

큼지막한 에메랄드라는 말에 레베카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황급히 반지를 다시 빼선 내게 주었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네. 시아와 라크시스는 서로를 번갈아 보다, 봉인의 존재를 제외하고 사건의 전말을 실토했다.

‘레이디 로드리치.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모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사고에 불과해요. 그러니 놀라지 마시고, 자책하지도 않으셨으면 해요.’

레베카를 홀렸던 정체불명의 냅킨 링. 별관 2028호에 얽혀있던 저주. 로렌시아호의 모든 승객을 제물로 쓰려 했던 저주의 시전자.

거대한 마폭탄으로 이용된 기이한 힘의 반지.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밀레이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세, 세상에……. 아아, 아…….’

밀레이나는 한참을 비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파티를 열었기 때문에, 그 많은 승객이 모두 표적이 되었던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자선 파티를 열어보라 부추긴 건 라크시스였다. 비행선의 보일러실에서 발견될 광룡의 봉인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했던 게 아니었던가.

‘레이디 로드리치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훔쳐 간 사람이 나쁜 거지, 도둑맞은 피해자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제야 옌 경이 이런 의뢰서까지 보내오면서 저택에 찾아온 이유를 알겠군그래.’

레베카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밀레이나는 눈앞의 두 남녀가 어떻게 레베카와 뮐러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바로 가주의 반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분명 내 저택에 드나들었던 사람 중 범인이 있을 것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저택의 지하 금고까지 걸음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시아는 그 범인이 발자크 로스일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마법사도 아닌 노부인이 카얄과 직접 맞서 싸워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카얄의 목적은 광룡의 봉인과 저주였다. 이미 로드리치가에서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으니, 괜히 뒤를 캐내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이상 카얄이 밀레이나를 표적으로 삼을 일은 없었다.

밀레이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비통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뮐러가를, 로드리치가를, 자신의 대녀를, 감히 밀레이나 본인을 건드린 범인을 반드시 두 손으로 직접 감옥에 넣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어느덧 마차 밖의 풍경이 번잡한 시내에서 조용한 주택가로 바뀌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시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엔 큼지막한 로켓 목걸이가 있었다. 시아가 로드리치 저택을 떠나기 전, 레베카가 건넨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이에요. …조사가 끝나면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로켓 안에는 의미를 모를 숫자들이 빼곡히 쓰인 종이가 들어있었다. 시아는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서 유품을 받아 들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미스터 뮐러의 비밀 별장으로 갈 차례인가요?”

“그렇죠. 그다음엔 그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던 북부에 가봐야 하고요.”

막스 블레어에겐 그 후에 다시 찾아가 봅시다.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레베카와 밀레이나에게서 얻은 정보는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종결된 지 벌써 팔 년이 다 되어가는 사건을 재수사하는 것치고, 이렇게 한 번에 수사 방향과 행선지가 결정되는 일도 드물었다.

프레디 뮐러가 죽기 전에 가장 많이 발걸음했다던 뤼스의 별장.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곳에 카얄과 관련된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어쨌거나 프레디는 광룡의 봉인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카얄은 봉인을 얻게 될 때까지 프레디를 뒤쫓았을 테니 말이다.

딸을 피신시킬 정도로 카얄에게 위협을 받던 남자가 죽기 직전까지 드나들었던 별장이라면 봉인과 관련된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라크시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나저나 뤼스는 마차로 가긴 좀 멀겠군요.”

“공간이동이라도 하려고요?”

“아뇨. 그렇게 가기엔 정확한 좌표도 모르는 터라.”

마차도 안 되고 공간이동도 안 되고. 그럼 어떻게 갈 건데? 속으로는 그의 공간이동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시아가 되물으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열차가 있잖습니까. 제국의 곳곳을 이어주는 위대한 발명품 말입니다.”

라크시스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렇지. 열차가 있었지. 김이 팍 샜다.

사실 아르카나 시내를 돈답시고 마차를 오래 타서 멀미가 나던 참이었다. 은은한 체향에 둘러싸여,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주위의 풍경이 바뀌는 경험이 그리웠다.

“표정을 보니 기대했던 모양인데.”

“뭘 기대해요?”

시아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대꾸했다. 라크시스가 짓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뤼스에 도착하면 사용하게 해드리죠.”

“왁, 깜짝이야. 그렇게 갑자기 다가오면 놀라잖아요.”

시아가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고작해야 조그만 좌석이 양옆으로 붙어있는 것이 전부인 비좁은 마차였다. 시아의 등이 등받이와 하나가 되듯 달라붙었다. 그들이 탄 마차가 보통 마차에 비해 큰 편이라는 걸 잊을 정도였다.

라크시스의 얼굴이 또다시 가까워진다. 자꾸만 어제의 일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이마에 닿던 열기가, 뜨거운 숨결이 깃털처럼 이성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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